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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01/29 주현후 넷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3. 1. 25. 21:49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미가 6:1-8

      응송 | 시편 15

    2독서 | 고린도전서 1:18-31

    3독서 | 마태복음 5:1-12

     

    설교음원

    http://naver.me/50oFbwGN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qYs4jOz-2RA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그뢰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60-1528)가 그린 ‘그리스도 책형’

     

    유대인헬라인 그리고 우리는?

    # 01

    새해가 되고 다섯번째 주일을 맞고 있음에도 여전히 기대감의 여운이 남아 있는 것은, 구정설을 지난지 한주 밖에 되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새해가 시작된지 얼마나 지났느냐는 정도 때문에 간절함이 커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가더라도 기대감의 크기만큼 간절함도 깊어가게 될 겁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지는 기대감은 ‘복’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더 평안하고 더 형통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복’이라는 단어안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복’을 구하고 바라는 마음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복’을 구하는 마음안에는 자신이 비어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담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 ‘행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복’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복’이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정작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저 ‘복’이라고하면 ‘돈’이나, ‘성공’을 떠올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얻기 위해 늘 고통스럽고, 혹은 그런 것을 가지고도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 02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복’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직전에 외치셨던 여덟까지나 되는 ‘복’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먼저 주님이 가르쳐주신 참된 ‘복’ 때문에 실족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구하고 바라던 ‘복’이 복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지금까지 바라지 않고 거절하려 했던 것이야말로 ‘복’이었음을 말씀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의 대부분은 ‘팔복’을 ‘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 마음과 달리, 원어 성경은 ‘마카리오이’라는 헬라어로 본문을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행복할 것입니다’라는 선언입니다. ‘복’ 받은 ‘그런 사람’들은 ‘가난’, ‘애통’, ‘온유’, ‘의’, ‘긍휼’, ‘마음의 청결함’, ‘화평’, ‘박해’를 경험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가난', ‘애통’, ‘박해’는 사실 ‘복'이 아니라, 명백히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게다가 듣기에는 좋아도, 나머지 것들도 딱히 ‘복’이라고 생각해본 분도 없을 겁니다. ‘온유’나 ‘의로움’, ‘긍휼’, 청결한 마음’ 모두 좋은 것들이라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손해를 받고 어리석게 여겨지기 뻔하다 생각한 탓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중에 누구도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이 여덟가지의 ‘복’받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복’일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말씀이 주님을 통해 외쳐지고나서야, 그 동안 ‘복’을 ‘복’으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얼마나 어두운 세상속에서, 눈이 가리워지고 무지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여덟개의 복에 관한 말씀은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6장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용상 네개의 ‘복’과 네개의 ‘화’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과,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만 씌여있다는 것이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태가 누가의 복음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는 말씀이 본래 주님의 말씀에 더 가까운 셈입니다. 여튼 말씀대로 이것이 ‘복'이라면 우리는 모두 다 가난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마도 교회가 문을 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 03

    이런 말씀을 드리면 ‘부자’가 무슨 문제냐고 하거나, 돈이 많아도 남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분들도 많다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삶의 모습은 얼마든지 그렇게 보일 수 있고, 스스로도 그렇게 부를 얻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거나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이고 왜곡된 자기 변명일 뿐입니다. 자꾸만 ‘청부론’이라고 하는 ‘착한 부자’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싶은 이유도, ‘그런 사람도’라고 하면서 ‘부자’이야기를 부러워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야 말로, ‘돈’의 영향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자꾸만 돈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복, 믿음, 신앙을 가늠하고 평가하려고 듭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사고에 갇혀 살아갑니다. 돈의 영향력과 지배력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청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양이 윤리, 도덕적으로는 그럴 듯해 보여도, 그건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는 무관합니다. 물론 성경안에도 ‘부자’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들이 있지만, 사실 ‘복음’은 ‘부’를 어떻게 처리하고 바라볼 것이냐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가난한 사람’은 이라고 말한 것이나, 마태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사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의 핵심이 그런 것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덟개의 ‘복’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가난, 애통, 온유, 의, 긍휼, 마음 청결, 화평, 박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치장해도 여전히 ‘행복’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복’이라는 것인지를 고민할 수록 답답하기만 합니다. 실재로 원문은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다음에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접속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주님의 말씀은, 이런 것들도 ‘복’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으면 좋습니다. ‘왜냐하면’이라고 하는 덧붙인 말이 모든 것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거가 됩니다. 그것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가난’은 누구에게나 저주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가난’도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을 차별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며,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실재로 ‘가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눈에 들어와도 붙잡으려 들지 않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부유함’에 만족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 간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나라’, ‘구원’이나 ‘생명’외에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는 해도, 오늘 우리 삶에는 이런 신앙의 핵심에 집중하며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가로막는 것들이 많습니다. ‘부유함’이라던가, 현재의 삶의 ‘만족’이나 ‘인정’ 같은 것들이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것도 ‘차별’이 아닌가라고 했던 우리의 물음은 틀렸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는 식의 팔복의 말씀은, 앞으로 ‘부자’가 될 것이라는 식의 종교적 덕담으로 듣거나, 반대로 ‘가난’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살라는 처세술처럼 여기면 곤란합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 간절함이야 말로 ‘팔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언급하셨던 것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어지는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하셨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 때문에 슬퍼하셨고, 불의 앞에서도 온유하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셨고, 죄인들에게도 자비로우셨고, 하늘에 닿을 만큼 마음이 깨끗하셨고, 다니시던 곳곳마다 평화를 이루셨고, 결국 의를 위하여 십자가의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길이 복임을 ‘부활’로 입증해내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 04

    ‘복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는 구약 시편 1편의 첫머리는 복음서 말씀과 닮아 있습니다. 팔복에 ‘복이 있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오스’라는 말이 있다면, 시편에서 ‘복이 있다’는 말은 히브리어 ‘아쉬레’입니다. 시편 1편은 ‘이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는 ‘아쉬레’로 시작해서, 150편의 끝을 ‘할렐루야’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로 끝을 맺습니다. 구약 전체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편 1편이 가르치고 있는 ‘복’은 결국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복’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집중합니다.

    마치 ‘복’ 아닌 것을 억지로 ‘복’처럼 받아들이라는 강요처럼 들리거나, 내심 그런 것도 ‘복’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대로 창조가 이루어졌듯,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지음 받은 본래의 의미와 목적안에 살아가는 인생은 평화를 누리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말고 다른 복이 있을까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시간에 휩쓸리고 익숙해지다보니, 그 동안 주님이 ‘복’이라 하신 것을 ‘저주’로 여기고 ‘저주’를 ‘복’처럼 구하는, ‘어둠’속에 허우적 거렸던 삶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을 ‘복’으로 누릴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시선이 바르고 옳게 교정되었을까요? ‘바울’이 전한 말씀에 응답해보십시오. 2독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길에 대한 바울의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가 되십니까?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요구하고, 헬라인들처럼 지식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요구했던 ‘기적’은 ‘표적’이나 ‘징표’, ‘증거’입니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야만 인정하려드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자기의나 업적, 공로를 강요하는 세상의 방식이고 가치관입니다. 헬라인들이 구하는 ‘지식’은 어떤 걸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예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라는 바울의 말처럼,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받고 패망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식, 참으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경험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송과 명성을 얻는 길이 지혜로운 겁니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우리도 그런 식의 삶을 얻으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외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일까요? 

     

    # 05

    바울의 외침안에는 다양한 조건들이 담겨있습니다. 첫번째는 이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이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숱하게 많은 이들이 로마에 의해 십자가 형을 받았고 그 중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진 십자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손해인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자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위기나 위협이 찾아온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포기할 수 없다고 결단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만 온전히 ‘하나님’께 일치되고 하나님이 받아주신 ‘죽음’입니다. 

     

    두번째, 십자가의 능력은 모든 이들이 아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만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배타성’을 가진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쉽게 돈 많고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진 탓입니다. 하지만 실재로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경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갑자기 병이 낫거나, 부자가 되거나 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낫기도 하고, 투자를 잘해서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이 전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방식, 실패라고 단정짓는 그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평안과 자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방식, 세상에서 작동하는 익숙한 방식으로는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럴 듯한 결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구하던 표적이나 헬라인들이 구하던 지혜에 목말라 하고, 그런 것들을 성공한 인생의 목표로 찾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는 기적같은 성공신화에 대한 간증들이 회자되고 있고, 목사들의 세계에서는 목회를 잘해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훌륭한 목회로 칭송과 부러움을 받습니다. 이런 길은 ‘십자가’의 길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예수는 이런 길을 걸어가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일치하는 길이 아니라 세상과 일치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십자가의 길’은 대체 어떤 걸까요? 예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 죽음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나 격려를 받을 수 없고 위로조차 얻을 수 없는 표적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신앙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게 조차 버림 받은 것 같은 절대 고독에 내몰린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곳에는 사람들로부터의 박수와 격려와 위로가 없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꺼리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잇대어 나아갈 때, 죽음에 사로잡힌 예수를 다시 살려내신 하나님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살려 낼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표적이나, 헬라인들의 지혜가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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