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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02 성령강림절 20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16. 10. 2. 23:28

    2016/ 10/ 2 성령강림절 20주 - 세계성찬주일


    본문 - 누가복음 17:5 ~ 10   https://youtu.be/jzff72dU3BU  - 클릭하시면 예배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 

    신앙생활을 지도하다보면 가끔씩 어떻게 하면 더 신실하고, 어떻게 하면 더 거룩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온 마음을 다해 풀어내려 애쓰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애를 쓴다는 것은 그 만큼 어렵다는 말이겠지요 ? 이 신앙적 열심과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룩이나 신앙적 성숙은 아무래도 관심없이 매주일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떠나서 사람살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이루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갈 것인가를 두고 몸부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는 대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의미없이 살아내도 괜찮은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결단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성숙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에,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예수를 닮는 신앙의 성숙은 반드시 걸어내야할 길입니다 


    2

    기독교의 초창기, 교회가 세워지던 그 때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를 닮아, 예수를 따른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


    용서하라고 하시고, 사랑하라고 하시고, 세상적 부유함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좇으라고, 명예와 탐욕을 좇지 말고, 권력을 좇지 말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돌보라는 말씀이나 정의롭고 지혜롭고 진실되게 산다는 것이 여간 쉽지가 않습니다


    처음 예수 믿고 난 이후, 여전히 삶에서 삐쭉 삐쭉 예수 닮지 못함이 드러날 때마다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그런 자신을 질책하며 슬퍼하기도 했건만,

    몇번이나 되풀이되는 모습속에서 그럴 수 밖에는 없다고 자위하곤 합니다 어쩌면 세상도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이제는 포기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땅하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낸 길과 전현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이제는 무뎌져 부끄러움이나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하는 불감의 사람들, 에스겔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굳은 마음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


    그러다보니 예수처럼, 또한 예수를 따르며 사는 삶, 그러니까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사랑하지 못할 때,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할 때, 기도생활이나 신앙생활을 지켜내지 못하고 세상의 쾌락에 무너질 때, 욕심을 버리고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길을 걷지 못할 때 마다 우리는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주여, 믿음을 주소서” 라는 무언가 허약한 고백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3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있으니 믿음을 더 부어 달라는 이 말이 얼핏 신심을 허락해달라는, 어떻게라도 좀 잘 해보고 싶은 순수함과 열정을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의 한편에는 예수의 생명과 예수의 정신이 나타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에, 탐욕에, 혹은 좌절감에 무너져버리고 마는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음’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책임전가만 남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믿음이 없음 탓이며, 믿음이 가득채워질 때까지는 책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가득한 분량의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 아니 그렇다면 온전한 제자로 살아내기 위해 부어지고, 채워져야만 하는 믿음의 분량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 또 언제쯤이면 예수님 처럼 우직하게 그 길을 따라 살 수 있을까요 ?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의 길이 우리와 똑같은 갈등과 두려움, 연약함을 안고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옮겨낸 걸음이 아니었던가요 ?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일 믿음의 채워져야할 적정선이 존재하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들의 오늘 미완의 부족하고 못난 삶, 거룩과는 거리가 먼 세속의 삶은 면죄부를 받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4

    본문 말씀에서 한 절로 만나게 되는 제자들의 간구속에서 이런 우리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15장부터 계속해서 진행되어지고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15장 1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 라고 밝히고 있고, 또한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라는 대목을 보면 17장은 이들을 면전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바리새인 모두 유대교 신앙의 틀안에 있던 이들입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고 있든, 유일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능통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 이들의 신앙은 늘 회칠한 무덤 같았고, 하나님앞에 거짓된 모습 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거룩함은, 늘 가난하고, 힘없는 일반 백성들을 기만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거짓된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자신들 조차 속이는 신앙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은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신앙적 기만으로 더 상처받고 좌절했겠지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차라리 이방인으로 살겠다고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으스대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들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셈입니다 믿지 못했으니 하나님이 살라하신 대로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있어 신앙의 길에 주체는 언제나 자신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남들보다 큰 믿음이 있는 자신을 뽐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크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크신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큰 믿음에 집착하게 되면 그 삶은 늘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며, 그리고 그 자랑의 끝은 그보다 못한 이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자리로 이끌고 사람에 대한 손가락질이나 차별, 정죄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5

    그러고 보니까, 오늘 우리네 교회 현실이 겹쳐집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이는 화가 있다고 하시면서 무시무시한 말씀을 쏟아내십니다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그러니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는 말씀이신 셈입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넘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 말한마디, 내 행동 하나 하나로 인하여 누군가 하나님이 과연 계시기는 한 것인가 ? 라고 말하게 하는 것, 하나님을 믿을 수 없도록 믿음에서 탈락시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누군가로 인해 받게 되는 나의 감정이나 상처는 스스로 극복하고 애써 외면할 수 있다지만, 나도 모르게, 또는 의미 없이, 아니면 그것이 옳기에 했던 말이나 행동, 살아냄과 가치관으로 인해 누군가의 마음과 믿음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 까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정재원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교회 가나안 성도의 수는 적어도 1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이들의 수입니다 이 기형적 신앙을 양산하고 초래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듯이, 그 시대의 죄인들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도대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자신의 이권을, 자신의 명예를,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며, 죄짓는 것에 양심의 꺼리낌 조차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살아감에 희망을 잃어버린 결과는 아니겠습니까 ? 믿지 않는 이들이 기독인들을 향해 하는 말이 ‘너희나 잘하라’는 말입니다 너희도 믿지 않는 예수를 왜 믿으라고 하느냐는 반문처럼 들립니다 


    각 교단의 총회장이나 감독회장같은 지위를 얻고자 금권선거를 행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횡령이나 스캔들,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남에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모습들, 아니 일반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의 한편으로 다른 이를 흉보고 헐 뜯고, 편을 만들고 벽을 세워가는 이런 총체적인 모습들이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짐짓 뒷짐을 지은채 자신은 믿음있는 구별된 사람인 것처럼 거룩한 모습을 보이며 침묵하는 죄는 또한 어떻습니까 ? 현실에 눈을 감고, 아픔에 눈을 감고, 이 모든 것이 세상일이니 상관하지 말자며 외면해서 바라보는 곳은 어디입니까 ? 결국 자신만을 위하며 살던 바리새인들의 삶이 그곳에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믿음이 적기 때문에 이런 신앙적 기만이 양산되고 있는 것일까요 ?


    6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연자맷돌을 짊어지고 바다에 들어가야할 운명에 놓인 우리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라고 , 7번 죄를 짓고 돌아와 7번 회개하면 용서하라시는 말씀이 우리 무거운 마음을 안심케 해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 않될 것, 끊임없는 용서이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이있다 그것은 죄를 지은 이를 경고하라는 말씀이며, 이 말은 엄하게 꾸짖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꾸짖는 것이야말로 용서의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냥 덮어놓는 것은 용서일 수 없으며 도리어 자신의 허물과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므로 사랑없음과 동의어일 뿐입니다 그냥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라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 귀찮게 하지 마라는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거짓되고 폭력적이며 기만적인 세상을 향해서, 꾸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꾸짖음은 세상을 향해 타인을 향해서만 머물어서는 않됩니다

    꾸짖음이 겨냥하는 목적지는 언제나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함으로 바로 나 자신의 허물과 가식과 죄를 주님의 심정으로 꾸짖어야만 돌이킬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가 그리스도, 즉 예수야 말로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택하시고 인정하신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더이상 그럴 수 있어, 어쩔 수 없어, 되는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않됩니다 그런 삶이 바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삶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걸고 바다에 들어가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7

    주님은 ‘믿음을 더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된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주님이 채워주셔야할 책임을 태만히 하셔서가 아니라, 애당초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 믿음은 채워져야하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주님을 믿는 존재,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분이 내 아버지시라고 말할 때,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말할 때, 80퍼센트 정도는 믿어지고, 20퍼센트 정도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믿음을 더 채우고, 믿음이 더 부어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 그래서 믿음의 주이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그분께 모든 책임을 전가시켜야하는 것일까요 ? 

    결코 아닙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 어떤 때에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 옳은지 자신이 없을 때도, 두려울 때도 있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기는 하지만, 그분을 믿기에, 그분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믿기에, 그분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믿기에, 이제 믿음을 씨앗 삼아 신앙의 길, 예수를 따르는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가셨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세상속에 실패하는 것처럼 초라한 자신이 보이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애당초 고린도전서 12:3 믿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시라 시인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하는 고백함이 바로 믿음의 정체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믿음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 채워져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는 바대로 살아내는 것 뿐입니다 !!!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세상속에서 믿는 이 답게 살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있는 자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의 길이며, 예수를 따르는 삶이며, 예수와 길벗으로 걸어가는 생명의 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이 그 길위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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