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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25 성령강림후 19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6. 9. 25. 14:28
2016/9/25 성령강림후 19주 / 청년주일
본문 - 누가복음 16:19 ~ 31 https://youtu.be/2XMP8hg2auc - 클릭 하시면 예배 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구렁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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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수해가 발생해서 138명이 죽음을 당하고 400여명이 실종되었으며 농경지 만오천 헥타르가 물에 잠겼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14만명의 이재민이나 홍역등 질병에 대한 대책이 없는 실정에서 많은 인민들이 사실상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도적 차원에서 수재민을 돕기 위해 북한에 원조를 해야한다는 입장과 핵폭탄을 만들고 군사적 위협이 되고 있는 그들의 모든 시도가 폐기되기 이전에는 절대로 도울 수 없다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으며, 이런 차에 정부는 민간부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측의 북한 돕기 모금운동이 부적절하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어떤 분들은 복한을 돕기 위한 모금은 모두 핵무기 만드는 비용으로 사용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핵폭탄을 만들고 경축행사를 벌이는 북한을 위해 밑빠진 독에 물을 부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개연성을 딱히 부정할 수 없는 설득력있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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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핵무기라고 하는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고 들이대는 그들은 실제적인 적이며, 위협적인 존재이고, 그 동안 평화적 지원과 식량 원조등 은혜를 원수로 갚는 못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입장에서 원수이겠지요?
저는 그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 목사로서 제 생각을 정하고 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조건적인 인도적 지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북한 정권이므로 더 도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독재와 정치적 욕망에 도취되어 인민들을 사선으로 몰아세우며 돌보지 못하는 파렴치한 정권의 손에서 동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가장 가까운 우리여야하지 않을까요 ?
핵무기를 만드는 그들이 어려움을 당했으니 국제사회의 제제와 더불어 더 제재를 강화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는 이미 인도적 차원에서 17만5천달러를 지원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인도적이란 말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인간으로서이 마땅한 본분인 셈이지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에는 종교나 국적 정치나 사상적 견해로 차별됨이 있어서는 않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만나는 주님의 명령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셨고,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사랑은 내게 잘해주는 사람, 내 눈에 좋은 사람이 아닌, 원수를 향해야하는 것이라는데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음에도,
오늘 우리는 강도만난 이웃이 내게 칼을 들이대던 나쁜 사람이었기에 도울 수 없다는 이유로 재해를 겪었던 바다 건너 일본을 향한 인도적 도움을 주던 손길을, 내 동포들에게는 거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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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바로는 인도적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이 55.8%, 찬성은 33.8%였으며, 가장 반대가 많았던 세대는 60대였고 그 다음이 20대로 56.5% 대 23.9%였습니다 마음이 우울해졌습니다
북한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너무나 큰 간극이 생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의 일이 아니니, 내 목숨이 아니니, 내게 유익함이 없으니 죽어갈 사람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렇게 주위를 둘러볼 여유 없이 한 없이 세상속에 자신을 고립시켜만 가는 청년이 더 많다는데 절망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읽은 오늘 본문 말씀속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다시금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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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유념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대목이라는 것입니다 비유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안에서 메시지를 제외한 다른 것들을 이해하려고 해서도 않되고, 메시지를 다르게 받아들여도 않됩니다
본문에는 죽음의 이야기가 나오며, 음부라는 곳에서 고통받는 장면과 아브라함의 품에 편히 안겨있는 장면이 겹쳐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천국과 불지옥에 대한 묘사를 해주려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예수 믿어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아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리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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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속에는 별다른 정보 없이 부자를 소개합니다 주로 왕족이 입던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냥 부자가 아니라 상당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에 대한 짧은 소개에 이어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시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둘은 결국 죽습니다. 부자는 장사 되었습니다. 아마 살아생전에 그랬듯이 호화롭고 화려한 장례가 치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도 그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 누워 병든 몸으로 음식을 구걸하던 한 거지의 죽음! 그 시신의 처리는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그의 시신은 거의 쓰레기 취급을 당했을 것입니다 살아서도 그 삶의 모습이 극과 극이더니 삶의 마지막 모습, 장례까지 극과 극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비유안에서는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라 하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부자가 예수를 믿지 않았거나 나쁜 사람이어서 지옥에 갔을까요 ? 아니면 반대로 나사로가 예수믿는 이로써 착하고 선하였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일까요 ? 본문을 자세히 읽어가면 갈수록 그들의 사후에 처한 상황이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난 부자는 그저 한 명의 부자였고 나사로 또한 그저 한 명의 거지였습니다 오히려 내용을 추측해 보면 도리어 부자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볼썽 사납게 남루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천해보이는 거지가 자신의 집에, 그것도 연회가 베풀어지는 기쁨의 자리에 찾아와 구걸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았습니다 허락은 아니었지만 그냥 묵인해준 셈입니다 그리고 죽음이후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보면 부자는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거지가 자기 집 대문에 진을 치고 누워 구걸해도 그냥 묵인해 주는 사람, 더 나아가 그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하철안에서, 혹인 집앞에, 교회에 찾아오는 거지들에게 눈쌀을 찌푸리고 마는 우리들과 비교해보면, 부자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죽어 가게 된 곳이 지옥이라니요? 좀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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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다 보면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지옥불의 고통속에 견디지 못하며 몸부림치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무엇을 간청했습니까 ? 천국으로 옮겨달라고 했었나요 ? 아니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나요 ? 아니면 지옥불의 갈증을 씻기 위해 물 한통 달라고 했었나요 ?
아닙니다 부자가 고통가운데에서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은 물 한방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자의 간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너무나 매몰차기만 합니다 그저 물만 조금, 그것도 손가락에 찍은 물 한방울만 달라는 것인데, 그조차도 안된다고 말머리를 잘라버립니다 대체 어떻게 이리 매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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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이렇게 매정하게 부자의 청을 거절하는 이유를 본문은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25절 부자가 이미 세상에 살면서 좋은 것들, 호사를 다 누렸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누릴 호사를 다 누렸기 때문에 더이상 누릴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26절 부자가 있는 지옥과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의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바라 볼 수도 있고,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도 있는 거리임에도 결코 서로에게 다가설 수 없는 큰 구렁텅이는 어떤 것일까요 ? 천길 낭떠러지일까요 ? 불교에서 말하던 끝이 없는 무간의 지옥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요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사로가 천사들에 의해 이끌려 갔던 그곳은 천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 비유로 천국을 묘사하시려던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상해 보십시오 지옥불속에서 죽음의 고통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의 모습이 보이고 그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우는 한편에서 나는 괜찮다고, 나는 아니니까 평안과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이곳이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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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는 죽음 이후의 모습이 아닌, 오늘의 삶의 자리를 비난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
서로 볼 수도 있고 말도 나눌 수 있는 거리이지만 서로의 고통에 대하여는 전혀 무감각한 거리, 오갈 수도 없고, 공감할 수도 없는,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일 수 밖에 없는 그 거리로서의 구렁텅이는 죽음 이전의 부자와 나사로의 삶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기며 살고 있던 부자의 잔칫상, 그런 부자의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허기를 채우려던, 그리고 헌데와 상처를 개들이 와서 핥아 냄에도 저항 할 수 조차 없이 기진하고 비참했던 나사로가 누워있던 부자의 집 대문앞까지의 거리가 바로 죽음 이후 지옥불속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는 나사로 사이에 놓여 있는 구렁텅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그렇다면 그 구렁텅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니요 아브라함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부자 본인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 지옥불속에서 그가 경험하는 나사로와의 거리는, 그 구렁텅이는 부자 그가 살아생전 나사로와의 사이에 만들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단지 지금은 서로의 서 있는 위치가 바뀐 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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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의 비유안에서 만난 그 부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살았을지 모릅니다 늘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하고 넉넉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주변에 사람들도 많이 몰려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요 좋은 남편, 좋은 친구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사로에게 있어서 부자는 자신과 나사로의 사이를 지옥의 구렁텅이를 만들어 놓은채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쫓아내지는 않고 나사로가 자신의 집앞에서 구걸하도록 방치는 해두었지만 부자에게 있어 나사로와의 사이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결코 그의 곁에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지였고, 자신은 부자입니다 그는 고통속에 신음하며 개들이 헌데를 핥고 있음에도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비루함속에 있을 때, 자신은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 정도 되니까 내 쫓지 않는 것이라면서 나사로와 자신이 처한 거리를 공감해보려 하지 않은 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될 것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면 살아생전 나사로와 부자의 사이에는, 죽음이후 그들이 마주한 구렁텅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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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내가 타인을 향해 가지고 있는 거리는 얼마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누군가를 대하면서, 그와의 관계속에 나사로와 부자가 직면하는 만큼의 구렁텅이가 존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그는 결코 용납될 수 없고, 나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그런 구렁텅이를 만들어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그 거리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여 자신들을 채우기에는 열심이면서도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고통당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이웃을 향한 그들의 거리야 말로, 하나님앞에 직면해야하는 자신들의 입장과 처지임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고발의 대상은 바로 본문앞에 서 있는 우리 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의 비유속에 등장하는 그 부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 준 바를 망각한다면 바로 우리가 그 부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와의 사이에 만든 구렁텅이가 있다면 그 구렁텅이를 메워야만 합니다 상대가 만들어 놓은 구렁텅이는 내가 어찌할 수 없겠지만 내가 만든 구렁텅이는 메워갈 수 있습니다 그 구렁텅이는 삽과 포크레인으로는 메울 수 없습니다 그릇된 자기 합리화를 버리고 그의 입장이 되어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을 때에만 그 구렁은 메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묵묵히 구렁을 메워가고 계십니다. 잔칫상의 부자가 대문 밖의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를 형제로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 흘릴 수 있도록 구렁을 메워가고 계십니다 또한 언젠가 아브라함 품의 나사로가 지옥의 부자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미소 지으며 ‘이제 그만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나오라’ 손 내밀 수 있도록 구렁을 메워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가슴 벅찬 하나님의 사역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수해를 당한 북한 동포들이나, 지진의 공포속에 떨고 있는 이웃들이나, 전쟁과 기근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이웃들과 우리들 사이에 놓여있는 구렁텅이가 메워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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