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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사람이 적으니이까 ?성서의 거울 앞에 2016. 10. 7. 23:46
누가복음 13:23 ~ 24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1
종교로서 기독교가 추구하고 있는 요체는 '구원'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배제시킨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는 셈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구원'의 원어적 성격, 특별히 신약시대 예수님이 사용하신 주된 용례들은 이 구원이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언어로 사용하는 개념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말 그대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처해있는 상황과 상태로부터 건져내어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건짐을 받아야만 하는 처해있는 상황이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먼저 이해하여야 하고,
두번째로는 구원이라는 것은 건짐을 받는다는 수동적 개념, 즉 쉽게 설명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신 용례는 거의 대부분, 병자를 낳게 하여주시거나, 귀신을 내어 좇아 내실 때였습니다
사람이 병에 걸려있는 것이나 귀신이 들려있는 것이 어떻길래, 그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일까요 ?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목적을 이사야를 인용해서 밝히신 바 있습니다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구원자로서 예수는 바로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포로 된 자를 자유케, 눈 먼 자를 보게,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바로 포로인 자나 눌린 자가 자유를 얻고, 눈 못보는 자가 다시 보게 되는 일과 동의어인 셈이지요
2
예수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구속되고 눌려있는 인생을 자유로 건져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자유'란 나의 뜻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당초 이 힘이 내게 있다면 자유 없는 상태에 놓여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진 힘이 자유를 박탈할 힘보다 적을 때 우리는 포로가 되거나 눌리게 됩니다
쉽게 '돈'을 예로 들어볼까요 ? 우리는 내가 번 돈을 내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돈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돈이 요구하는 것을 거부할 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돈의 지배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병에 걸려있는 상태도 역시 자유를 빼앗긴 힘의 박탈 상태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내 의지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불편한 다리가, 자유롭지 못한 몸이 내 의지를 제한하게 됩니다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불치병에 걸려있는 중환자가 푸르른 들판을 마음껏 내어달릴 수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자유를 빼앗겨 버린 구원받아야할 자리는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의 박탈과 소외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박탈과 소외의 대부분은 나와의 다름, 차별의 언어로 경험되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자유를 빼앗겨 버린 이 땅의 사람들 (*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 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로 하여금 내 목숨은 빼앗아갈 수 있어도 내 의지는 빼앗기지 않을 자유를 회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통치안에 들어갈 때 다른 무엇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도 눌리지 않고, 건강이 좋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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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정의에 대하여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조금 다른 내용이 눈에 거슬립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곁에 제자들 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붙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구원이 담겨있었고,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순간 사람들은 오늘의 삶의 자리 ( 로마의 식민 치하, 수탈되어지는 살림 살이, 박탈과 빈곤, 병듦과 고통과 같은 ) 로부터 빼앗겼던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를 회복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 적어도 예수님의 곁을 따르던 제자 그룹의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 ) '구원을 받을 자가 적으니이까 ?' 라고 묻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참으로 맥락이 없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13장 전체는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정죄가 아닌 자신의 회개와 돌이킴에 대한 말씀이 계속됩니다 '구원 받을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물음에는 '나는 구원을 받았지요?'라고 하는 확인과 함께,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옹졸하고 속좁은 마음이 베어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되었지만, 저들은 아니라고 하는 차별의 마음에 질문자는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의 구원을 전적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의 구원은 내가 아닌, '타인'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에게 자유할 수 있는 손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맥락없는 질문에는 여전히 구원받아야할 피해자를 양산해 내는 차별의 언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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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옹졸한 구원 경험입니다 세상을,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독점하려는 못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경험한 구원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미완의 경험입니다 예수를 만났으나 그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내지 못했던, 그래서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이고 만 당시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질문이 오늘 익숙한 말로 들립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으나, 저들은 구원을 못받았다'라고 하는 속내가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고 이중적인 삶안에서 자주 발견되지 않던가요 ? 그리고 그 차별과 마치 구원을 독점한 듯한 오만함은 교회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사람을 판단하고 구원을 판단합니다 이쯤되면 누가 구원자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저 구원, 즉 건짐을 받아야만 하는 군상들일 뿐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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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언제나 우리 밖에서 옵니다 우리 안에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아니 애당초 구원이라는 말이 필요없는 상태나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Extra Nos ! 라고 고백해왔습니다 '구원은 우리 밖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자유를 유지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 In Christus '구원은 그리스도안에' 서 발견되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결론적인 답변은 30절입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누군가를 나와 다름의 자리로 소외시키거나 차별함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주님의 뜻과 어긋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구원을 자랑하고 뽐내려는 자리는 도리어 그보다 못함의 자리로 소외될 형편에 처해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구원받았지요? '라든가, '저들은 구원받지 못했지요?' 라는 질문에 있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진정한 구원이 되도록, 세상에 구원이 임하도록, 이웃에 구원이 임하도록 차별의 벽을 허무는 것이 먼저 된 자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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