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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1/07 주현후 1주 (신년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 2. 23:4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1:1 ~ 5

      응송 | 시편 29

    2독서 | 사도행전 19:1 ~ 7

    3독서 | 마가복음 1:4 ~ 11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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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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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르 데 그레버, 그리스도의 세례(성 요한 세례자) _ Pieter de Grebber, Baptism of Christ, 1625, Oil on canvas, 235x155cm, St Stephanus Church, Beckum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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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한해를 여는 신년주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숫자 하나 바뀐 것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이 설레이는 것은 누구도 가보지 못했고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미지의 시간 앞에 서 있기 때문일 겁니다. 성서일과 1독서 구약본문은 그에 걸맞는 본문으로, ‘한 처음’에 관한 창세기 1장의 첫단락이 주어졌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분들은 ‘빅뱅’이라던가 우주의 기원에 대한 흔적을 얻으려고 할른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성서기자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던 것인지를 경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고백으로 창세기 1장을 읽게 되면 놀랍기만 합니다. ‘모든 것이 그리고 한결같이 좋았다’는 그들의 고백은 얼핏 부족함도 없고 아쉬움도 없는 평안한 삶을 살았던 어떤 사람들의 느긋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삶의 터가 온통 폐허로 무너져버린 운명에 짓눌렸던 이들의 고백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고백안에는 삶의 경이로움과 기쁨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그런 절망스러운 현실이 ‘좋은 것’일리가 없었겠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공동체의 기억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여셨을 때의 ‘본래’의 모습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니, 본래의 세상은 이처럼 잔혹하고 비참한 것일 수 없고, 하나님이 선하시니 이런 서러운 운명으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지으셨을리도 없습니다. 세상 모두가 ‘너희는 망했다’고 말해도, 자신들을 향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던 하나님 말씀만 붙들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역사의 한 복판을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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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응송 찬양인 시편의 기자는 자신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으로 찬양해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29:2) 적어도 시편기자의 눈에 비친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게 하나님으로서 해야 할 일에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 이름에 걸맞게 위엄이 있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언제나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생명을 살리는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시편기자가 말한 하나님 이름에 걸맞는 이 일이야 말로, ‘창세기’를 기록했던 성서기자가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기쁨으로 용납해야한다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영광이신 하나님은, 창조의 처음에 사람에게도 두개의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라는 ‘이름’과 ‘보시기에 좋았다’는 이름입니다. 그 안에는 지금의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빚으시고 지어주신 이름에 얼마나 걸맞는 모습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빚으신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은 둘째치고, ‘나’ 자신에게서도 좋은 것을 발견하는 것에 서툴기만 합니다. 세상이 무시하고 업신여긴다고 절망하고 서러워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도 열등감이나 패배감에 떨어져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그러니 인생이 행복할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스스로를 이렇게 바라보게 된 걸까요? 그리고 이런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대체 우리 안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좋았다’는 말씀을 들려주시는 걸까요?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이미 왜곡되고 병들어 있습니다. 병든 자아는 세상 뿐만 아니라 자신을 건강하고 바르게 들여다 볼 수가 없으니, 늘 그릇된 방향으로 치우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본성은 이런 기울어진 생각을 포기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불안해서 일까요? 답을 알지 못하면 답을 찾아야 하는데, 자신이 그려내고 세상이 이야기해주는 헛된 ‘자아’를 이루어보려고 이렇게 해야겠다거나 저렇게 해야겠다는 허무한 결심과 노력만 늘어갑니다. 원하는 모습으로 스스로를 빚어내어 자기 자신의 창조주가 되려는 악한 모습이 그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인생이 행복해지려면 하나님이 빚으셨던 ‘본래’의 모습을 발견하고 직면하면 되는데, ‘너는 이러니까’라고 하는 정죄나 비난, ‘너는 망했어’라고 하는 가시돋힌 저주를 떨쳐내는 것에만 허덕이다보니 자꾸만 삶이 무겁고 슬퍼질 뿐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의 하루 하루가 눈물이 날만큼 애처롭기만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것이 있다면, 우선 우리 생각안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나’는 이렇다고 하는 열등감과 그런 생각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던 이야기들부터 던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 본래의 우리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북돋우는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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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독서 본문인 사도행전과 복음서 말씀은 ‘세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언뜻 구약 본문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세례의 의미와 복음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성령의 계심’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바울에게도 낯선 응답이었을 겁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요한이 전하던 물 세례의 전통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라는 것이 유대교의 전통인 ‘율법’을 뜻하는 겁니다. 반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복음’을 말합니다.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의 반응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복음’으로 시작된 교회 공동체 안에 여전히 자신의 종교적 업적과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유대교적 전통인 율법주의가 남아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즉시로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건 에베소 제자들이 받았던 요한이 전한 물세례나 그것이 표상하는 ‘율법’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오늘 교회에서 집례되는 세례 예식은 사라졌어야 합니다. 율법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율법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던 겁니다. 율법의 한계가 뭘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 겁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주신 징표로서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이걸 자꾸만 거꾸로 뒤집으려고만 합니다. 우리 힘으로, 이것을 잘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는 일을 하려고 하니, 율법은 자꾸만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율법을 지켜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잘 지켜내려하면 할 수록 결국은 지켜내지 못했다고 하는 ‘정죄감’에 떨어지게 되거나, 그런 모습을 감추려고 ‘가식’에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잘 지켜내었다, 잘 해냈다는 결과를 통해 ‘나’ 자신의 됨됨이나 정도를 확인해 보려는 이런 조급함을 성경은 ‘자기의’라고 정의합니다. ‘자기의’에 집중하면 할 수록,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질 않으니 영혼의 자유와 안식이 경험될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그 즉시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일 뿐입니다.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여전히 요한의 세례, 즉 ‘자기의’로 구원을 이루려는 신앙안에 머물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제야 비로서 ‘복음’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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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무엇일까요? 이 세례의 기원은 복음서가 소개하고 있는 ‘주 예수께서 경험하셨던 세례’로부터 시작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걸음,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곧장 성령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주님의 머리 위로 비둘기 처럼 임하였습니다. 훗날 에베소의 제자들에도 성령이 임하셨던 것은, 교회야 말로 예수님의 경험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한 몸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인 셈입니다.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요한은 물로 예수님을 덮었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령으로 예수님을 덮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요한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던 겁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는, 임박한 하나님의 징계와 환란 앞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의 동기는 ‘두려움’입니다. 율법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두렵고 무서운 분입니다. 그분 앞에서는 우리 자신이 용납받을 수 없다는 것만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요한 앞에 서시기 전까지 세례는 그런 하나님을 마주하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세례는 하나님과의 전혀 다른 관계를 여는 문이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1:8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셨던 것처럼, ‘세례’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없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 바로 ‘세례’의 근원적인 의미인 겁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머문다면, 세례받은 자처럼 살아가야하는 율법의 의무가 남습니다. 스스로 세례에 합당한 삶을 증명해야하는 겁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 세례는 무효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앞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받으신 새로운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확증하시고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길이 열린 겁니다. 누구도 그분의 증언을 부당하다고 할 수 없고, 그 무엇도 그분의 확증을 무효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없음을 있음으로 만드신 창조주의 의지이고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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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단한 일을 해드려서 일까요? 이제야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도 아닙니다. 이유는 ‘아들’이라는 것 한가지 뿐입니다. 아들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은 사랑하셨을 뿐입니다. 이 사실은 곧장 하나님의 모든 용납하심의 근거는 ‘사랑’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고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해주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일을 많이하고, 능력을 얻고, 명성을 얻고, 거룩해진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이 일을 이룰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신앙은 증거를 가지고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열어 놓으신 그 길을 따라 가다보니 하늘로부터 그 음성을 듣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고해야 하는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았다’고 하셨던 소중한 존재였음을 보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감난다면, 우리 영혼이 먼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겁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는 주변의 형편이나 상황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쳐갔던 작은 것들 마져도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해 주셨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순간부터는 소중히 보일 겁니다. 깨어지고 상한 인생, 비참한 삶과 세상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읽고 예배하는 모든 일들이, 그리고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 조차도, ‘한결같이 좋았다’는 하나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겁니다.

     

    2024년 새로운 한해의 시간이 열렸습니다. 자칫, 무엇을 해야하나, 또 어떻게 살아야하나, 두려움과 염려에 내몰리게 되면 영혼이 답답해지고 삶은 속절없이 짜부라지고 말게 될 겁니다.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 조바심에 내몰리고,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요한의 세례에서 벗어나, 성령의 세례를 받은 성도답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며 살아가십시오.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 떨어진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 존재 전체를 용납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십시오.

    말 없이 바라보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향해 ‘참 좋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우리는 비로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겁니다. 잘 해 낼 수 있을지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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