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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1/14 주현후 둘째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 10. 12:2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상 3:1~10, (11~20)

      응송 | 시편 139:1~6, 13~18

    2독서 | 고린도전서 6:12~20

    3독서 | 요한복음 1:43~51

     

    # 설교음원

    http://naver.me/G0lQKxX1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3KiyV-P5AbA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예수 ⓒGetty Image

    '한 말씀'만, 하옵소서

    #01

    대림절과 성탄절을 지난 교회력은 구정인 2월 둘째주까지 ‘주현절’로 지키게 됩니다. ‘주현절’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빛’입니다. ‘빛’이 그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둠’안에 있을 때입니다. 아무리 작은 한줌의 빛이라도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 수록, 찬란하게 빛나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빛이냐가 아니라, ‘빛’만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빛’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빛을 들춰내려고 해도 우리 안에 없으니, ‘어둠’에 사로잡혀 있게되면 낭패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사사’시대의 끝자락을 지나던 1독서 사무엘서가 처해있던 상황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 사사기 17:6

     

    사람들이 모두가 자기 뜻대로 하였다는 말은 ‘자아’를 실현했다거나 ‘자존감’이 높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한 뜻으로 붙잡을 만한 기준이 없었다는 뜻일 겁니다. 무엇을 어떻게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천지였던 겁니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어둠이 이스라엘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 답답한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사장 ‘엘리’였습니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있을 때라고 본문을 시작하던 성서기자가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무릇 제사장은 길을 잃어버린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잘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제사장인 그가 볼 수 없을 만큼 눈이 어두웠다고 하니 다른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02

    이미 본문의 시작인 1절은 그 시대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져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 사무엘상 3:1

     

    ‘주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일이 드물었다’는 말을 개역개정 성경은 ‘말씀이 희귀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자칫 하나님이 입을 다무신 것처럼 읽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질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제 생각대로 사는 것을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늘상 사람들은 제 생각대로만 할 뿐, 들으려고하질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목사들도, 교회도 모두 제 생각대로 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왔고, 저렇게 해왔다는 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뿐, 도무지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말이구나는 식으로 들으시면 않됩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이라면, ‘엘리’의 두 아들은 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로부터 제사장직을 물려받아야했으니 그들도 양피지에 기록된 말씀은 읽었을 겁니다. ‘엘리’는 또 어떻습니까? 심지어 그는 제사장이었으니, 말씀을 얼마나 많이 읽었겠습니까? 말씀은 많이 읽고 설교는 많이 들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듣는다는 마음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성경을 그렇게 가까이하고 읽고는 있지만, 지금 여기에서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빛’을 잃고 어둠 가운데 사로잡히고 나면 누구라도 별 수 없는 겁니다.

     

    #03

    사람들 마음이 어둠에 잠식당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 소망, 신뢰, 믿음, 그리고 경외감이 모두 사라지고, ‘타성’과 ‘습관’에 떨어지고 만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돌려지고, 더 이상 그분께 묻지 않고, 구하지 않고, 듣지 않게 됩니다. 혼자서 좋아하고, 혼자서 계획하고, 혼자서 괴로워하고, 혼자서 절망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말을 걸어오시는데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조상들의 이야기속에, 민족의 전설속에 계실 뿐, 적어도 지금은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되고 만 겁니다. 그러니까 따지고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못하게 했고, 시대가 하나님을 침묵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이구나 싶던 바로 그 때, 제사장 엘리도 듣지 못했던 하나님 말씀을 들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어린 ‘사무엘’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싶었던 그 였는데, 마침 본문도 ‘제사장 엘리가 처소에 누워있을 때 사무엘은 성전에 있었다’고 거들고 나섭니다. 이쯤되고보니 ‘역시 신앙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하는구나’ 조급한 마음이 듭니다. 정말 그럴까요? 본문은 사무엘이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서기자는 우뢰 같이 울리고 천둥처럼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찼던 시대라고 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제사장도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들으려 하지 않았으면, 어린 사무엘에게라도 말씀하시기 위해 찾아오셨을까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하시지 않으면 이 관계가 끊어질 것 같아서 애닳았던 것은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건으로 읽지 못하겠습니다. 그날 말씀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찾아 내셨던 겁니다.

     

    #04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서가 소개하는 주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찾아가시는 분입니다. ‘사사’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찾아내셨던 것처럼, 주님은 오늘 베드로도, 빌립도, 그리고 나다나엘도 찾아내셨습니다. 모두들 예수님을 통해 ‘빛’을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먼저는 이 빛을 발견했던 것은 제자 ‘빌립’입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들었기에 응답했습니다. 그 다음은 그의 벗 ‘나다나엘’입니다. 빌립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곧장 친구를 찾았지만, ‘나다나엘’은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사렛’같은 촌동네에서 ‘메시아’같은 위대한 분이 나올리가 없다는, 그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그의 믿음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사실 빌립의 이야기나,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주님은 메시아이십니다’라고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복음’을 전해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아멘’하며 응답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히려 시대의 가르침이나 우리의 기준이나 생각, 경험이나 합리성에 비추어보면 말씀은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의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틀렸고, 친구 빌립의 말은 옳았습니다. 이전까지는 몰랐는데, 믿을 수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 그는 주님을 믿게 되었고, 주님은 그 자신에게 너무나 특별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를 변화로 이끌었던 말씀은 이것입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 요한복음 1:48b

     

    이 말씀은 주님께서 천리안 같은 신통력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유대 땅에 있던 이들이나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에 모일 수가 없었습니다. 구심점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그곳이 어디이든 성인 남자 열명만 모이면, ‘회당’이라고 하는 ‘시나고그’에 모여 말씀을 강론하고 토론했다고 합니다. 때로 회당에 사람이 모이지 않게 되면 무화과나무 아래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조용하 말씀을 묵상하곤 했다고 합니다. 아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던 ‘나다나엘’도 분명히 말씀 묵상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 사실은 그가 성탄후 1주 말씀에서 만났던 ‘시므온’처럼, 이스라엘의 위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가득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그저 말씀만 읽고 있는 무력한 모습일 뿐입니다. 하지만 꼭꼭 감추고 있던 그의 애타는 목마름을 들여다 보고 계셨던 분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그를 찾아내셨고, 그 동안 풀어내지 못한 채 쌓아와야만 했던 답답하게 굳어진 마음의 물꼬를 터트리시고 서럽게 흐느끼는 그의 마음을 다독여주신 겁니다.

     

    #05

    그렇게 사람을 찾아오셔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늘 한결 같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어부’였던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도, ‘요한’이나 ‘빌립’도 어둠에 쌓인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베드로’안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했던 사람은 주님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저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이라는 체념과 절망으로 마음이 온통 굳은 살처럼 딱딱해질 때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당신과 함께 하는 삶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먼저 이런 일을 맡기려고, 저런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우겠다는 목적도 우선이 아닙니다. 당신의 곁을 그들에게 내어주실 때, 주님께서 그들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 ‘빌립’ 처럼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셨던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던 사람, 천하보다 귀하게 빚으신 하나님 자녀답게 세우는 일이 먼저였던 겁니다. 주님은 사람들 안에 담겨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시는 분이셨기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곧장 하나님 사랑에 감동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부르심에서 인생의 위로를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답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세상을 바라보던 바울의 눈은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 6:12

     

    그 동안 자기 자신을 무엇을 해내고, 이루어야만 하는 도구처럼 생각해 왔던 바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조차 이 만큼 업적을 쌓고, 저만큼 인정받아야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달려왔지만, 혼자 있을 때면 늘상 허기지고, 지치고, 무거운 정죄감이 짓눌러왔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는 비로서 해도 될 것이나 해야할 것, 또는 하지 말아야할 것이라는 율법의 담장이 모두 허물어지는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한 사람’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처럼 살아갈 능력이 되었던 겁니다.

     

    #0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요한복음 1:51b

     

    주님의 말씀은 마치 제자들만이 경험하게 되는 ‘빛된 삶’이란 이런 것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시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꿈에 본 하늘로 이어진 ‘사다리’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을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에서도 목격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인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마주하는 자녀된 삶이 이와 같은 겁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사람을 찾아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나시는 사람들 중에는 왕이나 제사장, 귀족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만 찾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목동이나 기생, 이방여인 뿐만 아니라, 첩의 자식들이나 가족들에 의해 인신매매로 팔려간 이들도, 그리고 심지어는 살인자도 하나님이 만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을 가르지 않고 누구든지 찾아가시는 분이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과의 만남이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과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볼 수 없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오히려 그분의 말씀에 실족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07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을까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날마다 생명을 위협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파괴하고 갉아먹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은 메말라 버렸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 것인지 의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에 나갈 여유도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또 이유없이 바쁘기만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고, 질문할 여유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장 눈앞에 답이 필요하고, 손에 잡히는 결론이나 결실에 급급해있을 뿐, 강요와 구속에서 벗어난 하나님 자녀로서의 느긋함과 여유와 품위는 보이질 않습니다. ‘생명의 충만’,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어둡던 시대중의 하나로 꼽히는 ‘사사’ 시대였지만 그곳에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나갈 길을 밝혀주어야 할 종교지도자들 조차 타락해 버린 유대 땅, 로마의 폭정 밑에 신음하던 그 곳에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하늘의 위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자 하는 이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듣고자 하는 이들, 그분의 부르심 앞에서 ‘아멘’으로 응답하려는 한 사람만 있다면,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찾아오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짓눌린 시대를 가로질러 언제라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시기 위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과연, 여러분께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한 말씀’,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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