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4/01/21 주현후 셋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 17. 18:0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요나 3:1~5, 10

      응송 | 시편 62:5~12

    2독서 | 고린도전서 7:29~31

    3독서 | 마가복음 1:14~20

     

    # 설교음원

    http://naver.me/5zlw7P65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MTj4XZWqxM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Matthäus Merian, 「Jona unter dem Kürbisbaum」 ⓒGetty Images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 1

    오늘 성서 일과 말씀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돌이킴’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한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저는 예수님을 믿는 방식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정의합니다. 돌이켜야 할 곳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과연 '어디로'부터 돌이키는 걸까요? 

    1독서 본문으로 주어진 말씀은,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활동한 선지자로,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이민족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서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성서학적으로는 이 예언서가 ‘요나’가 아닌 후대의 저술로 보고 있지만, 이건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예언서는, ‘요나’고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선민의식으로 뭉쳐있던 당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관을 송두리째 흔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안에는 극명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인물들이 눈에 띕니다. 먼저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선지자 ‘요나’와, 그가 말씀을 전했던 ‘니느웨’ 성읍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요나’로부터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왕으로부터 시작한 성읍안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가축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굵은 베옷을 걸치고 한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니 제 뜻외에는 들으려고도 선택하려고도 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걸음을 돌이킨 또 한 사람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와있는 선지자 ‘요나’ 입니다. 본래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그의 걸음을 돌이키게 했던 분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정작 본문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돌이킨 이가 또 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 요나 3:10

     

    돌이킨 니느웨 사람들을 보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려 심판하시겠다던 자신의 뜻을 돌이키신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자칫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성’(全知)에 의심을 던지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하신 말씀을 돌이키신다면, 하나님은 이해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는 분이 되고 말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식의 일방적인 용서는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로 인해 해악을 당하고 고통에 내몰린 이들의 눈에, 조건없는 하나님의 용서는 ‘정의’가 실종된 '억울함'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했던 선지자 ‘요나’의 불평은 이런 면에서 타당합니다.

     

    # 2

    ‘니느웨’에 도착한 그는 지체하지 않고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외쳤습니다.(3절) 만일 그들이 망하게 된다면 돌이키지 않았던 그들 자신의 책임일테고, 그들이 돌이키기만 한다면 ‘요나’ 자신은 성공한 선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선지자로서 ‘요나'의 사역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메시지안에는 일방적인 심판과 재앙의 경고만 있을 뿐, 정작 중요한 '회개하면'이라는 대목이 빠져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 처음 그를 '니느웨'로 보내실 때 그에게 전하라던 메시지는 '그들이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였지만 정작 '요나'가 전한 메시지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4b) 였습니다.

    제 동포를 잔혹하게 파괴한 이런 악한 이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보복'이 있으려면 그런 이들이 ‘회개’할리도 없거니와, 회개해서도 않됩니다.  그 만큼 원수 같은 ‘니느웨’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기대는 컸고, 그 기대 만큼 ‘요나’의 마음은 더 불편할 수 밖에 없던 겁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했을 뿐입니다. 비록 몸은 '다시스'에서 ‘니느웨’로 돌이켜왔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갈 때와 전혀 바뀐 것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생각에 도망쳤는데, 지금도 그는 ‘절대로' 그들의 구원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니느웨’도 돌이켰고 심지어 하나님도 돌이키셨는데, '요나' 한 사람만 ‘돌이킴’에 실패한 겁니다. ‘요나’에게는 그것이 참 어려웠을 겁니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4장 8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욥기 7:15

     

    그의 외침을 그저 철없는 투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살아있음이 죽음만도 못한 상황에 떨어져 있던 ‘욥의 울부짖음처럼, ‘차라리 죽고 싶다’는 ‘요나’의 외침도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야 말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철회하셨다는 것은 ‘요나'의 입장에서 곧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포기하신 것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겁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는 하나님을 향한 배신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릅니다. ‘요나’에게 ‘니느웨의 구원’ 만큼은 다른 사람은 다 구원받을 수 있어도, 눈에 흙이 들어와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뿐입니다. 

     

    # 3

    안타깝지만 ‘요나’의 이런 모습과 처지는 오늘 우리들과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결코 ‘너’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나’와 ‘너’, ‘너’와 ‘나’는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제 마음 밖으로 내몰아 버린 사람들입니다. ‘함께’있으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평화’가 깨어진 상태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차별'과 '소외'의 담장은, 쌓으면 쌓을 수록 오히려 '너'가 아닌 '자기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은 좋다고 하시는데도 나는 보기가 싫고,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못들은 체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아멘'하고, 그분의 뜻에 제 걸음을 맞춰가는 것이어야 하는데, 제 자신의 마음과 생각만 '절대적'인 것이 되버린 겁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믿는 일에 서툰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내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가진다는 말은, ‘나’를 향하고 고집하려는 마음에서 떠나 ‘나는 끊임없이 돌이키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야 하고, 돌이킴은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 ‘다른 환경’이 아니라, 언제나 ‘나’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도무지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로부터 돌이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걸까요?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으로 돌이키는 복음서의 제자들의 모습안에서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주님의 초대에 제자들이 어떻게 응답했는지 살펴봅시다.

     

    # 4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 마가복음 1:18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 20b

     

    18절은 시몬과 안드레, 20절은 야고보와 요한의 주님 말씀을 향한 응답의 내용입니다. 핵심은 ‘버림’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를 버린다고 하면, 그저 나쁜 습관이나 해로운 것 아니면 쓸모 없는 태도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것,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지금의 ‘나’를 조금 더 개선하고 개량하여, 세련되고 좋은 사람 만드는 것 정도로 생각하곤 합니다. 마치 올해는 미뤄둔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학생이나, 올해는 술, 담배를 끊어보겠다는 직장인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버림’안에는 오히려 우리가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들 뿐만 아니라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도 포함됩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렸던 ‘그물'이나, ‘배', 그리고 가족을 뜻하는 ‘아버지’가 그런 부류입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우리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며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할 만큼 중요한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일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 마가복음 1:17b

     

    한국 교회에서는 대체로 주님이 말씀하신 ‘사람 낚는 어부’를, 어떻게 해서든 전도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람들’의 정체성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오해한 탓입니다. 하지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자기 자신’과 먼저 결별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람들이 먼저 건져 올려야 할 ‘사람’은 맨처음도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인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증거는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안에 담겨있습니다.  

     

    # 5

    그렇다면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안에 담긴 것은 무엇입니까?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 마가복음 1:15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즈음,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이 복음을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대목이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주님을 따랐다는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전하신 복음을 향해 돌이키고 응답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인 셈입니다. 무엇을 담고 있는 ‘복음’이기에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응답했을까요? 주님이 전하신 위의 말씀안에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일까요? 아니면, 앞 단락인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일까요? 어떤 부분이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는 들으려 하지 않는 견고한 ‘자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제 아무리 결심을 하고, 뜻을 세워도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때가 차고, 주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정은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여 있음을 실감하는데도 돌이키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주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마치 사람들을 유혹하여 교회로 전도하라는 식의 선정적인 말씀으로 읽곤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하겠다는 주님의 말씀, 그 말씀을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돌이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때가 이르러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주님께로 돌이키고,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 6

    말씀을 읽고보니 우리 안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높이 쌓아올린 담장은 없었는지, ‘당신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너와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고 차별과 배제로 내몰았던 사람은 없었는지, 또 ‘이렇게 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기준을 포기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향해 ‘틀렸다’거나 ‘망했다’는 파괴적인 말을서슴지 않았던 적은 없었는지,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나’로부터 ‘주님’을 향해 돌이켜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써보낸 짦은 세절의 서신서 말씀안에서 다섯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첫번째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것처럼, 무엇을 사고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은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라는 다섯가지 입니다. 공동번역은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을 ‘세상과 거래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합니다. 세상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해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31절 후반절에 있습니다.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오늘 우리가 ‘이것 있어야만 살겠다’거나, ‘이것 때문에 못 살겠다’고 사로잡혀 있는 것들입니다.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절대적인 것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결국 지나가고 말 것들일 뿐입니다. 지나갈 것에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삶은 자꾸만 황폐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만 남게 될 겁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또한 여러분은 이 사실만을 기억하십시오. 삶을 우겨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다 지나갈 겁니다. 우리 자신이 세운 기준도, 결코 그리할 수 없다 높이 세우기만 했던 담장들도 속절없이 무너질 겁니다. 그리고 오직 말씀하시는 주님만 우리에게 남을 겁니다.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셨고, 그 분의 돌이킴이 우리 자신을 구원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신다면, 속절없이 지나갈 것들에 꽁꽁 묶여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힘껏 돌이켜 주님을 향하십시오. 그분의 나라를 향해 돌이키시고, 그분의 뜻안에 살아가십시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실 때까지, 주님께 듣고 배움으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닮아가십시오. 그일을 위해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아멘.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02/04 주현절 다섯번째 주일  (0) 2024.02.01
    24/01/28 주현후 넷째주  (1) 2024.01.24
    24/01/14 주현후 둘째주일  (0) 2024.01.10
    24/01/07 주현후 1주 (신년주일)  (1) 2024.01.02
    23/12/31 성탄후 1주  (1) 2023.12.28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