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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1/28 주현후 넷째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 24. 18:0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신명기 18:15 ~ 20

      응송 | 시편 111

    2독서 | 고린도전서 8:1 ~ 13

    3독서 | 마가복음 1:21 ~ 28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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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심,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1860년.

    '말씀' '권위' 문제

     

    # 01

    오늘 1독서 구약 본문은 ‘신명기’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안에서 ‘신명기’가 가지는 비중은 대단합니다. 유대교 신앙의 정수인 ‘율법’이 ‘신명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는 이 말씀을 자신들의 신앙관 역사관으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신명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은 ‘신명기’의 제목을 ‘두번째 율법’이라는 뜻의 ‘듀테로노미온’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히브리어 이름인 ‘엘레 하드바림’이 ‘이것은 말씀들이다’는 뜻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신명기'의 ‘두번째’라는 것이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 말해야하는 말씀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께 배웠던 ‘말씀'들을 이제부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말씀을 거듭 기억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신명기’가 가르치고 있는 명령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우상숭배하지 마라’, ‘하나님만을 믿으라’입니다. 

    아마도 ‘우상숭배’와 관련한 문제라면 한국교회 만큼 철저한 이들은 없을 겁니다. 자칫 우상숭배에 떨어지기라도 할까, 그러다 큰일이라도 날까 온통 ‘금기’(禁忌)천지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나, 대중가요, 영화도 불경하다고 호들갑을 떨고, 예전에는 교회안에서 오르간을 제외한 모든 악기도 일절 금하기도 했습니다. 관광지를 지나면서 사찰이라도 마주칠라면 멀찍이 돌아서 가야할 만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섬칫 섬칫 놀라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말씀 2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본질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또 내가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 신명기 18:20

     

    말씀대로라면 ‘우상’은 다른 종교, 불상같은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떻게 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 고린도전서 8:8

     

    음식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처럼, ‘말’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같은 ‘말’이라도, 우리가 어떻게 ‘말’ 하느냐에 따라 ‘우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고보면, 심지어는 ‘예배’, ‘찬양’, ‘설교’도 그것을 행하는 우리 자신으로 인해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도 있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우상’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제 마음대로’, 혹은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하는지, ‘말씀’대로 말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 02

    결국 ‘우상’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여 주시며, 무서운 큰 불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 신명기 18:16b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말이 사실이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 그분께 직접 듣는 것이 두렵다는 이스라엘의 아우성은 허투루 하는 엄살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언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대신 백성에게 전해주는 메신저로서, ‘모세’는 첫번째 예언자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앞일을 내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인 겁니다. 하지만 예언자가 세워진다고 해서 우리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가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고 분별해야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당연히 참 예언자라고 받아들이는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도,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거짓 예언자로 외면당하고 박해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참과 거짓을 무척 잘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얼마든지 심각한 착각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합니다. 기독교 역사안에는 그런 오만함이 초래했던 끔찍한 역사들이 수두룩 합니다. 물론 지금 이 시간에도 이단에 떨어지는 사람들도 비일비재합니다.

    실제로 당장 오늘만 해도 여러분은 목사의 ‘설교’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인지, 목사인 저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인지를 구별해내셔야 합니다. 어떻게 ‘설교’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들을 수 있을까요? 은혜 받았다고 하는 ‘설교’중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형교회 목사, 언변이 좋고, 그럴 듯한 인간 성공학이나 심리학에 물든 것은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애당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는 개념은 있는 걸까요? 이게 그렇게 쉽게 구별되지 않는 겁니다. 내면을 꿰뚫어볼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보였는데 어느 순간 이기적이고 철없이 행동하기도 하고, 자유와 평화를 말하면서 탐욕적인 사람도 있고,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목사이지만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진리와 비진리라는 것을 마치 두부 자르듯 손쉽게 구별되는 것처럼 큰 소리치거나, 자신들만 그리 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천만한 모습입니다.

     

    # 03

    과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었느냐는 물음입니다. 오늘 모세가 전했던 말씀 대로라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근거는 비교적 명백하고 쉬워보입니다. 그가 거짓 예언자라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그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실제의 삶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정직한 이들을 몰라보고, 파렴치한 이들에게 꼼짝 없이 속아왔던 기억이 훨씬 많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이런 말씀이 무색할 만큼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염려에 떨어진채, 그저 자신의 욕망을 마치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떠벌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아득하고 멀게만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이 다 그러니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하거나 ‘그러려니’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방관자가 되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내내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이런 의심과 갈등에 내몰리셨습니다. 모함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언제나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들은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을 세우신 이후 주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여전히 주님은 그곳에서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만약에 지금의 우리였다면 오히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릅니다. ‘서기관’들은 오늘로 치면 신학교수나 저명한 설교자들일 겁니다. 그들의 말은 세련되고 박식합니다. 그에 비해 주님은 갈릴리 촌동네 출신의 ‘목수'였을 뿐입니다. 무능과 한계, 죄를 들춰내는 주님의 말씀은 투박하고 매우 듣기 거북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놀라워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 요한복음 8:38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뻐꾸기처럼 그럴 듯한 말로 반복할 뿐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 나라’는 당신께서 생생하게 살아내고 경험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경험하는것' 그리고 '살아가는 것'은 ‘듣는 것’이나 ‘보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 04

    그리고 본문은 곧장 ‘귀신 들린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면, 우리는 벌겋게 충혈된 눈, 광기에 서린 행동이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가 거룩한 말씀이 있는 곳, 말씀을 나누는 회당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그것이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귀신의 정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헬라어 원어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을 '토 퓨뉴마 토 아카다르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퓨뉴마’라는 단어가 익숙하시지요? ‘공기', ‘호흡’, ‘정신’, ‘영’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성령’을 지칭할 때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귀신’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가 우리가 생각한 ‘귀신’과는 다른 의미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귀신’은 본문 뒤에 이어지는 32절에 등장합니다.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 32

     

    여기에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원어는 ‘다이몬’(δαιμων)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회당에서 주님을 만났던 이 사람은 흉측한 ‘귀신’이 들렸거나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도 이런 식의 ‘귀신 들린 자’는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시대가 추구하는 것들, 제 자신이 바라는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입니까? 돈에 취하고, 명예에 취하고, 성공에 취하고, 명성에 몰두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르고 마땅한 길, 생명을 지키고 풍성히 길어올리는 길에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귀신들린 그 사람은 안식일을 지켜내기 위해 회당에 찾아와 거룩한 척 말씀을 읊조리고는 있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채 시대정신에 사로잡힌, 건강하지 못한 ‘영’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탐욕과 욕망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겁니다.  이제야 앞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있는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들어올 수 있었는지 납득이 됩니다. 복음서 기자는 지금 허투루 말씀을 운운하고, 제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려던 이들 모두를 ‘악한 귀신들린 자’들, 신명기에서 언급한 ‘우상숭배’하는 자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 05

    이제 우리들 이야기를 해야할 차례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더러운 귀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다시 귀신들린 사람과 주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읽어 보십시오. 우선 귀신들린 자가 먼저 말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 24

     

    병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면 치료 받을 수 없듯, 귀신에 들렸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그의 말을 읽어보면 그는 자신이 주님에 의해 다루어지고 없앰을 받아야 하는 더러운 것에 의해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고민도 없이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깨닫게 된 겁니다. 예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을 만나면 모든 어둠이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 앞에 설 때만 자신안에 들어와있는 더러운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주님의 꾸짖음이 이어졌습니다. ‘입을 다물라’는 헬라어 단어  ‘피모데티’의 뜻은 ‘잠잠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흉포하게 날뛰며 사람들을 삼키려던 바람을 주님께서 꾸짖으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꾸짖음'이란 더러워지지 않은 맑은 영혼을 가진 이만이 할수 있는 일입니다. 거짓되고 더러운 이들이 꾸짖음은 공허할 뿐입니다. 귀신들의 놀림거리로 전락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며 하신 것은 말씀 한마디 뿐입니다. 그 말씀에 귀신은 무너졌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바로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비교와 경쟁에 내몰고, 염려와 근심과 좌절과 정죄로 떨어트리는 세속의 시대정신을 거스르려면 그보다 큰 권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더 중요하고 더 좋은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런 권위, 시대 정신을 아득히 뛰어넘는 가르침, 부산하게 삶을 뒤흔들고 영혼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힘을 잠잠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

     

    # 06

    오늘 본문의 사건이 제자들을 세우신 이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모든 일은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앞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당하고 살아내야 할 사명입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들을 고쳐내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권위’, 사람의 영혼을 깨트리고 파괴하는 더러운 영을 벗겨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권위’,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만 가질 수 있는 ‘권위’는 바로 ‘하나님 나라 복음’이신 주님의 말씀 뿐입니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 마가복음 1:27

     

    과연 오늘 교회안에 악한 영을 굴복시킬 권위가 있을까요?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시대 정신을 꾸짖을 권위, 그런 악하고 패역한 시대가 듣고 순복할 권위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교회가 외쳐도 세상이 꿈쩍도 하지 않는 오늘의 현실을 예사롭게 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코 교회의 ‘권위’가 아닙니다. 교회가 전하는 말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잇대어져 있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막 1:15절

     

    예수님이 전하신 모든 말씀은 순박하게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그분을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겁니다. 주님은 아주 작은 어둠이라도, 그리고 반대로 세상 모두를 덮고도 남을 만큼의 어둠일지라도 서슴지않고 꾸짖을 수 있을 만큼 맑고 투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안에서 하늘의 때가 찼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맑은 영혼’을 가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회개하고 복음이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자기 맘대로 하는 말, 다른 신의 이름으로 내뱉는 말에 속거나 휘둘리지 말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 마땅히 하나님께서 전하라 하셨던 온전한 말씀이 되신 그리스도만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어 주실 겁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 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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