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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2/18 사순절 첫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2. 14. 12:3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창세기 9:8 ~ 17

       응송 | 시편 25:1 ~ 10

    2독서 | 베드로전서 3:18 ~ 22

    3독서 | 마가복음 1:9 ~ 15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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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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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mptation of Christ(Philips Augustijn Immenraet, 1663)

    홍수,  세례  그리고 '십자가'

     

    1

    올해 '사순절'은 지난 14일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해마다 ‘사순절’ 시즌에 이르면, 교회나 신앙인들의 삶은 갑작스레 회개, 금식, 절제, 묵상에 전념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무언가 억지스럽기도 하고, 부러 침울해 보이려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본래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의 전통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며 ‘공생애’를 준비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에 닿아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안에 있는 여섯 번의 ‘주일’은 자칫 엄숙하고 무거워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부활의 기대와 소망으로 예배하는 ‘작은 부활절’로 지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이 ‘십자가’와 ‘고난’, ‘엄숙’과 ‘절제’의 외형을 입고 있지만, ‘사순절’기간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은 ‘부활’에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간 예수님의 ‘수난’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뒤따름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더 깊이 천착해야만 하는 겁니다. 

     

    2

    1독서 ‘창세기’말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들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홍수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노아’의 가족들과 선택된 짐승들을 제외한 호흡하는 모든 것들이 ‘홍수’ 심판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침내 ‘홍수’가 물러가고 ‘노아’ 가족이 뭍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이미 천지의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된 참혹한 현실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런 처지에 떨어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창 9:1

     

    처음 창조의 때, 인간을 빚으신 이후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노아 가족들에게 복을 내려주신 겁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그들의 삶을 지켜줄 겁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송두리째 파멸하는 재앙을 두눈으로 목격한 ‘노아’ 가족들은 좀처럼 섬칫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들려주신 약속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 창세기 9:16

     

    너를 구해내겠다'는 약속을 목숨 걸고 지켜내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3

    사람들은 보통 ‘노아’의 이 이야기를 ‘홍수 이야기’ 또는 ‘홍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면 이 이야기의 본질은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건의 내막을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야기의 시작인 6장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 창 6:5 - 6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홍수’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홍수’라고 하는 결과만 보고 있을 뿐, ‘왜’?라는 원인을 쉽게 간과하고 맙니다. 성서기자는 ‘홍수’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찼다 온통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기만 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는 대목을 ‘결과’로 읽다보니, ‘하나님’이 후회하셨기 때문에 ‘홍수’로 세상을 생명을 쓸어버리셨다고 단정짓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순서를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실 만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다’로 읽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읽게 되면, ‘홍수’를 초래한 책임은 고스란히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 되고맙니다. 

    오늘도 세상은 온통 제 욕심만 채우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생명’조차도 값싼 ‘도구’나 ‘수단’처럼 여기도록 조장하게 됩니다. 결국은 곳곳에서 갈등이나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줄기차게 ‘평화’를 말하지만 이미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강대국들은 감축이 아닌,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탄소배출량은 극심하고 오존은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구에게 주어진 운명을 24시간이라고 할 때, 인류 파멸의 날이 23시간 58분 40초, 그러니까 100초 남았다는 핵과학자 협회의 경고는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 언젠가 창세기가 언급하는 홍수의 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전지구적 종말을 맞을 것은 불보듯 뻔합니다. 이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파멸’하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자초한 선택이고 결과일 뿐인 겁니다. 악을 뿌리는데 생명이 피어날 수는 없는 겁니다. 뿌린대로의 결과를 거두게 되는 것, 이것이 성서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4

    성서기자는 급기야 형제가 형제를 살해하는 참담한 모습을 보면서(창세기 4장), 인간이 이렇게 참담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죄’ 때문이라는 것과 이렇게 가다보면 결국 인류는 파멸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닿은 마지막이 바로 ‘홍수’였던 겁니다. 스스로 자초한 셈이니, 당해도 싸다고 말해도 할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몰살의 위협에 떨어져있을 때 ‘노아’를 찾아내셨던 것도, ‘방주’를 통해 노아의 가족들 (사람) 뿐만 아니라, 정한 것이나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고 암수 한쌍 씩의 생명을 모두 살려내셨던 것도 차별이 없이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비록 생명을 주셨음에도 어리석음과 죄로 떨어지고 마는 인간들이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포기하시지 않고, 인류의 역사를 마지막 그 날까지 지켜가고 계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가 바로 다함없는 ‘긍휼’과 ‘사랑’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시편 25:6) ‘긍휼’은 히브리어로 어미의 '자궁'을 뜻하는 ‘라캄’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망해가는 불효하는 자식이라도 두고 볼 수 없는 어미의 마음, 히브리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이해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구원’해내는 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창 9:11

     

    ‘하늘’에 ‘무지개’를 걸어두어 모든 생명이 파괴되는 일 만큼은 반드시 막아내겠다는 의지와 약속을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무지개’를 하늘에 걸어둠으로 '언약'의 책임을 강요받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약속하셨고, 일방적으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무제한의 희생을 택하셨습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강요하려고만 했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결국은 언젠가 인류는 또다시 하나님을 배신하는 죄로 인해 스스로의 운명을 파국으로 몰아넣게 될 겁니다. 그때에도, 일방적으로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운명은 달려 있습니다.

     

    5

    앞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도 인류는 ‘홍수’와 같은 파멸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멈추려들지 않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른지 명쾌한 답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고,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세상, 누군가의 무책임한 선택에 의해 우리 모두의 생명이 파괴될 수도 있는 날들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재앙과 파멸을 초래할 ‘홍수’앞에 있는 겁니다. '베드로'사도는 2독서 서신서에서 이런 우리의 실존과 처지를 직면하는 것이 바로 ‘세례’라고 말합니다.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 베드로전서 3:21

     

    ‘물’을 통해 ‘세례’를 받는 것은 ‘홍수’에 잠기는 것과 똑같은 상징입니다. 내 힘으로 숨쉬고 내 맘대로 살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인간은 모두 ‘죽음’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실감하고 깨닫는 것이 '세례'가 가지는 첫번째 의미입니다. ‘사순절’의 첫주 ‘세례’에 관한 본문이 주어진 것은 ‘사순절’을 새 신자들의 세례를 위한 금식과 교육의 기간으로 삼았던 교회 전통과 이어져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지 않으면 깨끗해 질 수 없는 죄와 여전히 영원한 것과 썩어 없어질 것들, 영적인 것들과 육체적인 것들, 옳은 것과 그른 것, 생명과 죽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내몰린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탐욕이나 연약함이 또다시 어떤 결과를 초래할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신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는 영원한 표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끗해진 양심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6

    이제 복음서 말씀입니다. 짧은 7절의 복음서 말씀안에는 세 단락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첫번째는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장면입니다. 이제 주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류 전체를 향한 영원한 하나님 구원의 약속의 증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두번째 단락으로 장면이 급하게 전환됩니다. 이 걸음을 주도하는 분은 다름 아닌 ‘성령’입니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 마가복음 1:12

     

    ‘성령’이 이끄셨던 곳은 다름 아닌 ‘광야’였습니다. 사순절 첫번째 주일 복음서의 배경으로 ‘광야’가 제시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사역지인 ‘십자가’가,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광야’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동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우리가 뒤 따르며 걸어가야 할 '광야'는 어떤 곳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광야’ 앞에 서계십니까? 전도나 선교의 자리에서 박해를 당하거나, 핍박을 받는 걸까요? 아니면, 금욕하고 절제하는 삶을 말하는 걸까요?

    ‘광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미드바르’는 ‘말씀’이라는 뜻의 ‘다바르’앞에 ‘~로부터’를 뜻하는 전치사 ‘미’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과 더불어 ‘말씀’으로만 사는 곳인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예수께서 사십일간 ‘광야’에서 치루셨던 시험들은 ‘말씀’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마귀가 주님께 던졌던 세가지 시험은, 하나같이 우리가 누려왔던 것들 그리고 우리가 바래왔던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끊어지고, 그것들을 얻을 가능성 마져도 끊어진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가르쳐주는 방식대로 보면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광야'는 오직 한 가지만 있는 곳임을 배우게 됩니다.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만 오롯이 보이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약속이 있는 말씀에 제 운명을 걸고 살아간다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로 우리의 시선을 가져갑니다. ‘십자가’도 ‘광야’와 마찬가지로 구원이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하나의 사실을 가르쳐주는 곳, 죽음에 삼켜진 예수의 ‘부활’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인 겁니다.

     

    복음서 말씀은 마지막 세 번째 단락 14절과 15절로 끝맺음 합니다. 그 핵심은 15절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 마가복음 1:15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때가 차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 ‘주’입니다. 여기에서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순절 첫번째 주일, 복음서의 세 단락의 이야기들, 그리고 성서일과로 주어진 전례독서 본문들 전체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7

    우리는 늘상 ‘사순절’이라고 하면, 금식, 절제, 고행 같은 이미지만을 떠올려 왔습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모든 즐거움, 복된 일을 포기한 채,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사순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금하고 절제하고 이겨낼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당신의 아들을 일으켜 세우신 ‘부활’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실감하고 오직 그분의 말씀안에 있음을 실감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라고 하는 파멸로 치닿게 된 인간을 일방적으로 구원해 내셨고, 다시는 멸절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유기하심으로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이 패망하는 땅 가운데 당신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가져다 주실 분도 또한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영원한 약속과 표징이 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차별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긍휼을 베푸시며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긍휼과 자비, 사랑과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일에 부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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