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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5/19 성령강림절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5. 17. 20:2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2:1~21 혹은 에스겔 37:1~14

      응송 | 시편 104:24~34, 35b 

    2독서 | 로마서 8:22~27 혹은 사도행전 2:1~21

    3독서 | 요한복음 15:26~27; 16:4b~15

     

    # 설교음원

    http://naver.me/5IT37Syq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LqFsQjYmTU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엘 그레코 (El Greco, 1541-1614), Pentacostes. 오순절. 1600. P1

    ‘성령’,  그가 오시는 에는

     

    1.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저마다 하나님에 대한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강한 팔로 보호하시는 보호자처럼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어머니처럼 따듯하고 살가운 사랑을 가진 분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한치의 불법도 용납하시지 않는 정의의 수호자처럼 하나님을 믿는 분도 계시지만, 비록 깨지고 상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받아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믿는 분도 있습니다. 서로가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보니, 한편으로는 같은 하나님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오해’로부터 비롯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치 늦은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태양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로 교회 밖에 계신 분들이 가지는 오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오해는 교회안에서도 발견됩니다. 저는 이것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직면하게 되더라도 좀처럼 제 생각을 바꾸거나 포기하려들지 않을 만큼, 한번 왜곡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시선은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마치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셔야만 한다는 ‘오만’을 ‘나 자신은 하나님의 뜻안에 살고 있다’는 믿음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것이 교회 안이든 밖이든 어느편이 되었든, 결국 ‘하나님을 모른다’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2. 

    ‘하나님’을 향한 무지와 오해는 성경의 첫번째 책에 소개되고 있을 만큼 무척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세상이 빚어진 그 때, ‘에덴’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작은 오해’때문에 실족했습니다. 그들의 첫번째 그리고 치명적인 오해는 하나님이 그들 자신이 더 지혜로워지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금하시기 위해, 그 길을 감추고 ‘선악과’를 금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뱀은 그 사실을 부추겼을 뿐입니다. ‘그것도 못먹게 하셨다’는 섭섭함이 치밀어 오르니, 동산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잊어버렸습니다. 한번 삐뚫어진 생각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니,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거스를 만큼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후로도 계속된 인간의 역사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했을 뿐인데, 오해의 결과는 언제나 ‘쓸모 없는 인생, 망한 인생, 태어나기를 잘못된 것 같은 인생’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상처’를 낳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오해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은 때로는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또 이스라엘이 처했던 정치, 외교적 상황이나 여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의 급박했던 역사안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늘상 실패를 반복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형편없는 민족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늘 하나님 아는 일에 실패했다는 뜻인 겁니다. 여하튼 이제 우리 편에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보여주어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없이 살아야 하니 결국 삶은 온통 죽음에 의해 뒤덮인 암울함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편에서의 가능성이 모두 깨어진 그 때, 하나님은 선지자 ‘요엘’을 통해 인류 모두를 위한 한가지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을 통해 이스라엘의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당신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미 ‘사람’을 통한 모든 길은 깨어졌고 실패했으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길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이루것은 전적으로 ‘성령’께 달려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3. 

    ‘요엘’은 유다왕 ‘요아스’ 왕 재위 시절의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로서 그가 전한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드리워졌던 재난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읽어내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참된 ‘회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요엘’이 말했던, 성령이 임하시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날이 올까요? 또 그 날이 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걸까요? 그의 메시지를 조금 더 꼼꼼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첫번째 눈여겨 볼 대목은 ‘성령’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질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성령이 부어진다‘는 식의 표현은, ‘어떤 신비롭고 초인적인 능력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고 세운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이들일까요? 당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으로 불리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같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 왔고, 또 누구든지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영’이 ‘남종’들과 ‘여종’들에게 부어진다는 ‘요엘’의 외침은 경천동지 할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의 대단했던 그 사람들이 얼마나 제 몫을 못하고, 얼마나 엉터리 같았으면, 심지어 종들에게 ‘성령’을 부어 세상을 바꾸시겠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걸까요.

    두번째 표현은, ‘천재지변’ 급의 변화들입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그날이 오기전에 하늘과 땅 모든 곳에 징조들이 일어날 겁니다. 해가 변해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해 피가 되는 일도 일어난답니다. 이런 말씀을 문자적으로 ‘자연재해’의 한장면처럼 읽으시면 곤란합니다. 당시에 고대인들이 바라보던 해와 달의 의미와 표상을 가늠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동서를 무론하고 고대의 종교와 숭배의 대상들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짓누르던 것들, 영원히 변치 않을 것처럼 군림하던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권세가 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거룩한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는 ‘사람’이 바뀌게 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바뀐 ‘사람’에 의해, 세상은 거짓된 모든 권세가 무너진 땅으로 변화되어질 겁니다. ‘요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런 날을 엿보았던 걸까요?

     

    4.

    ‘요엘’ 선지자의 예언 이후로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름만 남아 있을 뿐 ‘하나님 백성’이라 불리우던 사람들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또한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각박하고 살기 어려워졌다고 해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불신과 체념속에서 어느새 ‘요엘’을 통해 주신 꿈만 같던 예언은 잊혀져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요엘’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눈은 여전히 가리워져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놀라운 소식에도 불구하고, 업적과 권위, 명예와 힘처럼 허울 좋은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이건 우리라고 다르지 않는 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금은 보화가 넘쳐나고, 아름다운 집이 있고, 신앙의 업적을 보상으로 받는 등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지금 살아가는 이런 세상을 조금 더 개선하고, 확장하는 수준을 넘어서질 못하는 겁니다. 마치 ‘천국’을 이 땅에서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상을 받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을 보고 왔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다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혹세무민’에 휘둘립니다.

    ‘신앙’이 이렇게 부박해진 까닭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그분의 통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주님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해 무관심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분께만 인정받으면 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세상에서 외면당하기 보다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을 원합니다. 죽어 ‘천국’을 말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때 경험하게 될 꿈만 같은 보상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나만 바보같이 살아가는 것은 무언가 희생하는 것같고, 억울하고, 섭섭합니다. 말씀, 규례, 명령을 따르며 사는 것은 마치 무언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 맞다면, 이처럼 우리 마음이 짜부러져있을리가 없습니다. 세상 보다 크신 분을 만났는데 사람들 때문에 주눅이 들고, 세상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을 믿으면서도 가난 때문에 비굴해 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시는 분의 위로를 받고 있으면서도, 감격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말씀을 위로와 능력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살아낼 수 있다는 말씀인 겁니다.

     

    5.

    이 길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예수의 제자들이나 초기의 교회 공동체, 그리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문제는 증인이라면 이렇게 살아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우리 생각대로 잘 않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믿어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감이 나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약속은 너무 멀게만 느껴질 만큼 세상이 너무 매력적이고 커보이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져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세상을 거스를 만큼 놀라움과 기쁨과 경이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높고, 전능하며, 또한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이신지를 깨닫고 실감하는 것, 그것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 삶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감하는 겁니다.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세상을 거스르신 당신처럼 자신의 뒤를 따라야만하는 남겨진 제자들의 마음을 바른 지향으로 이끌어주시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어떤 비법이나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까? 아니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특별한 길을 가르쳐주셨습니까? 주님께서 당부하신 것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셨던(행 1:8) 그날처럼 오직 한가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 사도행전 1:8

     

    바로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 비로서 ‘요엘’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었던 그 날이 제자들에게 시작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제 제자들은 변화된 증인이 될 것이고, 이들을 통해 세상도 바뀌게 될 겁니다. 그래서 ‘능력을 받고’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얻게 될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다시 말해 ‘성령’께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이들에게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6.

    주님께서 복음서 말씀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령’은 무언가 신비롭고, 은사적인 체험이나 현상을 초래하시는 분이 아니라, 증언’하시고(15장26절), 깨우침’을 주시며(16장8절), 또한 ‘인도’(16장13절)하실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시는 걸까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오직 ‘주님의 말씀’을 고스란히 깨닫고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16장 8절입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 16장8절

     

    개역개정 성경에는 이 대목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렇게 읽으면 무언가 우리가 할 것을 않하고, 위반하고, 어겨서 꾸짖음을 받게 되는 것처럼 읽게 됩니다. 하지만 오히려 헬라어 단어인 ‘엘렝코’ (έλέγχω’)는 ‘밝히 드러내고, 폭로하고, 드러내고, 바로잡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새번역 성경처럼 ‘깨우치게 하신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떨어져있다는 것을, ‘의’를 깨닫는 것은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용납과 구원을 얻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렇게 읽게 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해집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 뿐만 아니라(요14:26),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와 부활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에 ‘아멘’으로 응답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가 되고, 주님의 말씀이 ‘아멘’이 되는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요란스럽고 대단해 보인다고 해도 결코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7.

    하지만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이 무능하시다는 뜻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뜻하심과 결단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지금 믿을 수 있게 하시고,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믿도록 해주시지 않는 것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물음은 틀렸습니다. ‘오직’ 그분께서만 하실 수 있고, 또한 ‘오직’ 그분께만 달려 있는 일이라면, 우리로서는 애당초 ‘왜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 단지, 간절히 바라고 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어 믿음 없던 우리에게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결코 사람을 높음이나 낮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와 같은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찾아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앞에서는 당신도 낮지 않고, 나라고 우쭐 댈 수 없습니다. 그분의 선택앞에서 소외되는 이가 없듯, 우리 중에 누구라도 망하거나, 버려지질 만큼 천한 인생은 없는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거룩하신 그분의 능력에 사로잡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들어오고 열리게 되니, 해가 변하고 달이 변하는 것처럼 이전에 나의 삶을 우겨싸고, 불안과 염려로 인생을 송두리째 몰아넣던 모든 가치관들이 무너지게 될 겁니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참된 구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대로 도구화 할 수 없는 분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온전히 ‘성령’에 사로잡혀 완전한 구원을 누리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는, 우리는 여전히 ‘영’을 따르는 거룩한 삶과 ‘육’을 따르는 곤고한 삶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갈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어떤 때는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다가도, 속절없이 상투적인 삶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망하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 우리가 거룩하신 ‘성령’에 잇대어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내가 어떤 것을 듣고 싶어하고, 어떤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세상의 것을 다 가진 것 같아도 알 수 없는 허기짐에 떨어져있다면, 혹은 그런 것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헛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래서 억만금을 얻고, 사람들의 인정과 명성을 누려도 여전히 배고프시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받은 가난한 사람들’, 영혼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을 겁니다. 오직 힘을 다해 주님의 말씀안에서 마음과 영혼안에서 울러펴지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런 삶이야 말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삶,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삶인 겁니다. 언제쯤이면 그런 날이 올까요?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큼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매일을 하루같이, 하루를 매일같이 그렇게만 살아가신다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던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복된 날이 열리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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