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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2 성령강림후 둘째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5. 30. 12:0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상 3:1~10, (11~20) 혹은 신명기 5:12~15
응송 | 시편 139:1~6, 13~18 혹은 시편 81:1~10
2독서 | 고린도후서 4:5~12
3독서 | 마가복음 2:23~3:6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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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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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참된 '쉼'의 공동체
1
우리는 스스로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닙니다. 내 속에 들어와본 사람이 없으니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실은 나 자신도 내면안의 나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정작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일이고, 또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살아왔을 뿐입니다. 느닷없이 마주하게 되는 낯설은 제 모습에 당황하고, 자꾸만 마음과 달리 실망스런 선택만 하는 제 모습에 낙담하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른지, 인생의 중차대한 선택의 순간이 계속 오게 될 텐데 그때는 또 바른 선택을 할 수는 있을런지 도무지 확신이 서질 않고, 그러니 자꾸만 살아간다는 것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우리 자신이 보고, 듣고, 판단한 것들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시는 겁니까?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입니까? 그도 아니면, 이미 얻은 무엇 때문에 예배의 자리를 기억하신 겁니까? 이 시간,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이나 믿는 것이 과연 스스로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고 있는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그리고 천천히 오늘의 말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2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게 되었습니다. 밀이삭을 잘라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을 만큼 기진할 만큼, 제자들은 ‘가버나움 지방’을 돌며 귀신들린 사람들, 병자들을 고치던 여정으로 잔뜩 지쳐있었습니다. 제 때 끼니 조차 챙겨먹지 못하며 자신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셔야 했던 주님 마음은 얼마나 안쓰러웠을까요. 하지만 이 장면을 가만히 엿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않될 일'을 하고 있는 이 불온한 무리들이 못마땅했던 이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깨트린 유대인의 금기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뻔히 주목하여 보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아무 연고도 없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손 마른 병’이란 아마도 근육이나 신경에 문제가 생겨 제대로 손을 쓸 수 없게된 질병일 겁니다. 그러니까 당장 큰 일이 생기거나 할 만큼 위중한 상황은 아닌 겁니다. 그렇다면 내일이어도 괜찮고, 그 다음날이어도 괜찮을 텐데, 일부러 보란듯이 안식일에 해서는 않될 일을 또 하고 마셨던 겁니다.
예수님 일행을 향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난은 옳습니다. ‘안식일’과 관련된 규정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일행이 이 금지규정, 즉 말씀을 어겼다는 것 만큼은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주님을 옹호하거나 변론하려면, 주님께서 하신 이 일이 ‘책임을 묻거나, 비난할 만한 일인가?’라는 것을 따져보는 것 뿐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왜, 하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일까라고 하는 본질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사역이 힘에 겨워 쉬셔야만 했고, 그 때부터 ‘안식일’을 쉬는 날로 정하셨던 걸까요? 아니면 이 날은 창조의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 경배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일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왜, 안식일인가?’라는 이런 식의 물음에 대한 이유나 설명 따위는 불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계명’과 ‘율법'이 그렇게 정하고 있다는 ‘사실'만 있으면 충분했기 때문이죠.
3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는 그들에게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안식일의 근본 의미를 구체적으로 일깨워주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 호세아 6:6
바리새파 사람들이라면 이 성경의 구절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회당’이나 ‘사람들 앞에서’는 줄줄 외우고 있으면서도 / 정작 인애와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외면하는 그들과 달리, 똑같이 이 말씀을 전하신 주님은 오늘도 스스로 율법의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연약한 이들의 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이로써 ‘사랑’을 입에 걸고 다니면서도 차별과 소외를 넘어서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처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외식하는 자들인지 만천하에 폭로되고 만 셈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 한마디가 결국 이들이 붙들고 있는 신앙을 송두리째 뒤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 마가복음 2:27-28
개역개정 성경이 한자어인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탓에, 예수님이야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인자’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의 아들, 즉 일반적인 ‘사람’을 칭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야 말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뜻인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 불경한 죄를 짓는 것처럼 불편하게 들립니다. 지금껏 우리는 ‘안식일’같은 규례와 법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요?
4
구약의 ‘안식일’ 규정은 두가지 전승에 기인합니다. 첫번째는 창조사건이고, 두번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어느 편이되었든, 이 규정의 핵심은 ‘쉼’입니다. ‘쉼’이라고 하니까 단순히 여흥을 즐기거나 오락을 얻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성경이 지향하는 ‘쉼’은 구원론적 사건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니까 뭔가 또 어려운 이야기인가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쉼’이 필요한 상황을 전제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누구라도 이 땅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온갖 시련을 겪게 됩니다. 큰지 작은지, 드러나는 것인지 아닌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련 자체 뿐만 아니라, 그런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는 수고에 내몰려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철없는 아이때와 달리, 인생을 살다보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피곤하고 곤고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다 이때문입니다.
이런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곤고한 짐을 짊어진 채 수고해야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이들도 저마다의 수고와 아픔이 있습니다. 반대로 태어나면서부터 뼈빠지게 일을 해야만 하는 내몰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종이나 하층민들의 경우는 자기 소유가 하나도 없이 평생 을 남을 위해 수고해야만 했고, 주인은 그들의 노동력으로 평생 동안 편안히 먹고 살았습니다. 종들은 일년 열 두달 단 하루도 쉴 날 없이 일하면서도, 늘 주인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어야 했고 제것을 빼앗긴다고 해도 불평 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불리우는 이름만 다를 뿐, 여전히 가진 자와 없는 자로 나뉘어 수고합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까지 우리도 한주간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주말까지 쉼없이 수고하고 일해야만 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우리의 ‘노동’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과정이 아닌, 사람 자신이 도구나 수단으로 떨어지도록 부추기는 떨쳐낼 수 없는 무거운 ‘저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쉼’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도 괜찮은, ‘쉼’이야 말로 과잉에 내몰린 인류를 위한 최소한의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구원’의 마지노선인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몸와 영혼의 ‘쉼’을 누가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기업이 그럴 수 있을까요? 아니면 ‘나라’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구약의 신앙 공동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것을 보장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 뿐임을 믿었던 겁니다.
5
창조주이시며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해 안식일 규정은 세우셨습니다. 누구도 생명을 살리는 ‘쉼’의 자유를 빼앗거나 박탈할 수 없는 영원한 규례의 지위를 부여해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해주셨습니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 출애굽기 20:11
하나님도 스스로를 이 규정과 약속에 구속시키셨으니, 누구도 ‘쉼’에 관한 권리를 독점하거나 이 규정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왕이라 하더라도 이 명령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어긴 위반의 결과는 ‘죽음’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 명령으로 인해 귀족이나 왕족 같은 가진 자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나그네, 심지어는 가축이나 짐승에 이르기까지 ‘쉼’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이 왕노릇하고 있는 세상에서 ‘노동’의 저주로부터 내몰린 모든 인간해방의 길을 여시기 위해, ‘안식일’의 규정을 세우셨던 겁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런 자유와 해방의 법을 전해 받았으면서도, ‘율법’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전히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들 자신이 어둠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식일’ 규정은 대계명인 십계명의 두번째 명령일 만큼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부터 시작하는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는 음식도 만들 수 없고, 이동이나 여행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신 이 명령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도 외면하는 외식함으로 떨어졌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법’ 때문에, 오히려 신앙이 온통 삶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 겁니다. 무엇을 위해 주어진 말씀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깊은 어둠에 사로잡힌 탓에, 모두가 서로를 망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빛’이 있으라던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지는 순간, 천지를 덮고 있던 ‘어둠’은 사라지고 처음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진리의 빛이 비추어질 수 있다면 한다면 가리워져있던 ‘율법’의 의미는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복’으로 드러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빛이 임하지 않는 한, 우리중에 누구라도 말씀안에 담긴 자유와 구원, 생명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복음서 말씀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멀어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억눌린 삶에서 자유를 얻는 길을 보게 하는 ‘빛’이 임했습니다.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그린 성화(렘브란트). 6
교회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안식일’의 ‘쉼’과 ‘해방’, 그리고 ‘자유’가 선언되었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교회 안에 참된 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모일 때, 또 교회안에서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지치고 상한 영혼이 참된 쉼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교회는 너무나 바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방식에 길들여진 탓에, 설교를 준비하고 예배를 준비하는 목사로부터, 온갖 사역으로 내몰리는 교역자들, 그리고 이런 모임 저런 모임, 교육, 봉사와 섬김, 행사와 세미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두 쉴새 없이 바쁩니다. 무언가 쉼없이 일을 해야 성도로서의 ‘의무’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오해한 탓입니다.
저희 동녘교회는 특별한 활동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주변에서 우려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교회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는 일에 천착하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말고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 행사가 많아질 수록, 일상이 과잉으로 내몰릴 수록 그렇게 하는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될 뿐, 정작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하늘의 평강을 누리는 일에 서툴러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생활 마져도 쫓기듯 살아내야하는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이보다 불행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정신없이 내몰린 한주간의 삶, 바라는 것들도 후회하는 일들도 감당해야하고 해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찬 ‘과잉’에서 벗어나, 평화와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안식일이 가져다 주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향이 교회 공동체의 외면적 확장에 두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주님을 믿는 교회, 주님이 세우신 이 교회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을 통해, 참된 ‘쉼’과 자유를 경험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로 회복되게 되는 날, ‘쉼’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수고하고 노동함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쌓아야 한다는 거짓된 신화와 강요로부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참된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노동이 강요가 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우리 모두가 발견하게 될 때만 가능해질 겁니다. 이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요?
7
사실 그 동안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일 뿐만 아니라, 배고픈 이들이나 손 마른 자를 대하면서도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따져묻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그들에게 손내밀지 않을 구실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우리가 아프고 상한 상처를 더불어 보듬어 주고, 서로를 향하여 하나님의 ‘쉼’을 얻는 품이 되어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라는 식의 막연함은 곤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중에 누구라도 포기하시거나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을 뿐만 아니라, 만민을 차별하지 않고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업적이 없어서 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다멕섹 도상을 헤매이던 ‘사울’에게 생명의 빛이 임했던 것처럼, 어린 사무엘에게 세상이 듣지 못하던 주님의 음성이 들렸던 것처럼, 어둠 가운데 닫혀 있던 눈을 뜨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날까지 ‘진리의 빛’으로 조명을 받게 될 것에만 마음을 담으십시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 한구절 한구절, 세상이 꺼리고 조롱하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롯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이는 깨달음이 열리게 되는 날까지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만 잇대어 살아가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쪼록 이제부터 세상의 소음을 따라 부질없이 소란스럽고 거추장스럽게 내몰리던 모든 움직임을 멈추십시오. 필요한 만큼 들이마시고 내쉬며 자연스레 호흡하듯, ‘성령’의 이끄시는 대로 자유롭게 걸어가십시오. 성령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됩니다. 주님을 믿으며 선택하고, 걸어가는 우리들이라면, 걷는 모든 걸음마다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고 이끄시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며 자유롭게 걸어가시면 됩니다. 이것이 자녀된 이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복’입니다.
혹여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부산해지려고 한다면 언제나 주님께 잇대고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십시오. ‘너희는 하늘 백성’이라고 외치시는 하늘의 음성에 응답하며 늠름하게 살아가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의 삶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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