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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6 성령강림후 첫주 * 삼위일체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5. 22. 17:2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6:1 ~ 8
응송 | 시편 29
2독서 | 로마서 8:12 ~ 17
3독서 | 요한복음 3:1 ~ 17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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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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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시원케, '성령'으로 자유케
1.
주변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식의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불치병을 치유하는 은사와 앞날을 내다보는 은사자들을 향한 열광도 좀처럼 식질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전해듣게 되면 대체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 것인지 난처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듯 이런식으로 ‘희화화’(戲畫化)하게 되면, 오히려 우리 신앙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며 은사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오해로 떨어지게 될겁니다. 대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해보셔야 합니다. 이 물음에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오늘 우리가 만나고 또한 믿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성서가 증언하고 있고 기독교 신앙이 함께 바라보는 하나님인지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1독서 구약본문은 대예언자로 불리우는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로서 부름을 받는 유명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이상을 듣고 있었고, 보고 있었으며,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선지자로서 활동하고 있던 겁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 이사야 1:1
그런데도 마치 하나님을 처음 뵙게 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니, 매우 어색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 1절의 첫단락부터 주의해서 읽어보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 이사야 6:1a
간절한 탄원 끝에 마주하게 되었던 ‘욥’이 하나님을 향해 드렸던 고백을 떠올리실 수 있다면, 이사야의 이 부분 고백이 좀더 맛깔나게 읽게 될겁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 욥기 42:5
‘욥’이 이전에 하나님을 몰랐거나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때에 이르러 비로서 귀로 전해 듣는 간접적인 경험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된 특별한 사건을 체험했을 뿐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도 이런 ‘회심’의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회 사제였으며,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믿고 있었고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738년 5월 24일 ‘성령’의 감동을 통해 비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회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사야의 경험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말씀을 알았으며, 심지어 시대를 꿰뚫어보며 ‘예언’을 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그때, 비로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왜, 이전에는 아니고, 하필이면 그때였을까요? 남유다의 왕으로 재위하면서 52년간 유다를 부강하고 강력한 나라로 이끌었던 ‘웃시야’가 죽었던 그때는, 주변 지역을 초토화하면서 제국을 이루었던 제국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즉위하게 되었던 즈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웃시야가 죽던 그때’는 ‘이사야’가 아무리 외치고 또 외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민족이 망할 것은 분명해 보이는 절망의 때였던 겁니다. 선지자로서 사명에 절망할 수 밖에 없던 바로 그때, 오히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고, 사는 것이 기적일 수 밖에는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바로 그 절망의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찾아오신 겁니다.
3.
그래도 이제 그가 하나님을 만났으니, 두려움으로 움츠려든 상황에서 벗어나 봄날 햇볕같은 화창한 날들이 펼쳐질 것이라 안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반응은 우리를 당혹스런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 이사야 6:5b
그가 뵈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었길래 ‘죽게 생겼다’는 절망스러운 외침을 쏟아 놓고 있는 걸까요? 사실 성경안에는 하나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발의 신을 벗고 두려움에 얼굴을 가리워야만 했던 (출 3:6) 모세의 이야기나, ‘나는 죄인이니 내게서 떠나달라’던 예수님과 만나게 된 제자들, 특히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도(눅5:8) 오늘 이사야의 이야기가 무척 닮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세 등등하던 ‘사울’도, 다멕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행22:7) 적어도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똑같았습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태산보다 높고, 세상보다 크신 창조주 앞에 섰다는 것은 곧장 한없이 작은 자신의 존재를 직면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 존재의 덧없음을 감당할 수가 없던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압도적인 하나님 경험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경험, ‘내가 죽는 경험’이라고 설명합니다. ‘자기의’에 천착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없이’ 살아가던 삶에, 위대하신 창조주를 대하며 살아가는 전혀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는, 지금까지 삶의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회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만난다거나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4.
그러니 누구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전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 것인지 선택의 자리에 서야만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우리는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해내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런 선택으로서의 삶을 ‘사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것,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인 ‘사명’의 전부일 뿐, 성경은 ‘무엇’을 위한 ‘부름’이었는지 혹은 어떤 결실을 거두게 되었는지에 무관심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고 하셨던 부르심도 뭔가 대단한 과제를 떠넘기시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보면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그를 초대하신 셈인 겁니다. 오히려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은 놀라운 환희와 압도적인 생명 사건,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염려나 걱정, 부담을 초월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사야가 보았던 ‘환상’과, 응송인 시편 29편에 담겨 있는 ‘송영’(頌榮)입니다. 천상에서도 땅에서도, 과거에도 오늘도 그리고 종말의 그날에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분의 영광과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상투스’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다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사명을 받은 당시, ‘웃시야 왕이 죽던 때’를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예언’을 포함한 그 동안 ‘자신’이 짊어져야만 했던 사역들 조차 무익하고 쓸모 없는 것, 애당초 없던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때, 그래서 얼마든지 훌훌 벗어낼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던 그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붙잡은 모든 가능성이 무너진 그 때를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복음서 말씀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도 예수님 앞에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파’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사람이라는 말 자체로부터 우리는, 그가 붙잡고 있던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만 천착했던 외식한 종교인들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앙적인 모습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이들은 대단히 거룩하고 신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율법을 따르며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늘 스스로를 절제했습니다. 말씀도 잘알고 율법도 잘 지키며, 늘 ‘하나님께 영광,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만큼 훌륭한 종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은 착한 행실이나 업적, 능력이나 자질, 종교적 업적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신실하고 거룩한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자기 위로만 있으면 족할 뿐,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에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5.
그래도 두가지 면에서 ‘니고데모’는 다른 이들과 달라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만 나타나는 ‘영광’을 엿보는 통찰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주님 곁에 있던 이들이 주님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와 비교해 보면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록 사람들의 눈을 피한 밤 시간이었다고는 하지만, 주님을 찾아올 만큼 ‘진리’에 대한 ‘갈급함’과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가 만일 스스로 ‘배울 것이 없다’는 오만한 생각에 떨어져있었다면 그는 절대로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도 ‘자기의’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던 그가 기특해 보이셨던가 봅니다. 주님은, ‘징표’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사실을 보며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길로 그를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음에도, 늘상 무언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율법주의’에 길들여져 살아온 탓에 그는 주님이 전해주신 ‘복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요한복음 3:4
오죽했으면 ‘어미의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하느냐?’고 물었을까요? 그는 여전히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처럼 자신이 무언가 해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뿐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는 결코 어미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선택을 하진 못했을 겁니다. 마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실족했던 부자청년처럼, 버리고 포기해야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도 ‘니고데모’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열심히’ 해야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 조차도 ‘열심히’해야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질 못한 채, 신앙하는 삶을 자꾸만 ‘해야하는 어떤 것’들로 채우고만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마주하기 위해 버려야 하고 포기해야할 것이 많습니다.
6.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고 인식하게 된다, 즉 믿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란, '성령'을 '호흡'삼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는 걸까요? ‘성령'은 바람처럼 그 무엇에도 거스름이 없고,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또한 자랑할 수 없는 이사야를 망하게 했던 바로 그 ‘하나님’ 입니다. ‘성령’은 마치 어머니 뱃속 처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셨던 ‘생명의 영’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는 태줄을 통해 주어지는 사랑과 생명을 공급받을 뿐, 태안에 있는 아이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도 없고, 쥘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어미의 뱃속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놓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믿음으로 쥔 손을 펼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성령’을 닮아 소유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가볍게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거나 혹은 보내실 때, 더 내려놓을 것도 더 버릴 것도 더 비울 것도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돈이나 물질만 아니라, 명예나 사람들의 인정, 그리고 모든 ‘자기의’와 ‘자기 만족’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어디에서 비롯한 말인지 정확히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감리교 목사님들은 늘상 '언제나 설교할 준비를 하라,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라,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하라’는 세가지 준비를 해왔다고 합니다. 이런 목회자가 되려면, 놓을 것이 없고,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람처럼 왔다가 시나브로 또한 떠나라고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이런 사람들은 억지로 힘을 내지 않아도, 성령이 능력이 되어 이끄시는 평안한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곁에는 무더운 여름 한철 불어오는 바람처럼 막힘이 없이 시원한 소통이 있습니다. 그런 삶은 늘상 여유가 있고, 용납함이 있고, 그래서 사랑이 움트기 마련입니다.
짊어진 것들이 많으면 오랜 여행을 할 수 없고, 몸이 무거우면 오래 걸을 수가 없으며, 마음이 무거우면 쉼을 누릴 수 없고, 영혼이 무거우면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붙들고 움츠려 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언제라도 훌훌 털어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는 말씀앞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수가 있고, ‘땅끝까지’ 보내시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바람처럼 자유케 하시는 성령께서 보이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날까지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성령의 감동을 통해 세상보다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심을 깨닫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넘치는 경이로움으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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