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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9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6. 5. 10:5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상 8:4 ~ 11 , 16 ~ 20 ( 혹은 창세기 3:8 ~ 15 )
응송 | 시편 138편
2독서 | 고린도후서 4:13 ~ 5:1
3독서 | 마가복음 3:20 ~ 35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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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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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성령을 모독하는 '죄'
1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들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체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함’이 혼란을 가져오고 사회와 국가를 위험에 떨어트릴 수도 있다고 우려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들 중에는 ‘나라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으로 판단하고, ‘반공’을 국시나 복음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런식의 ‘국가주의’나 ‘전체주의’ 적인 사고에 치우치다보면 다수를 위해 소수의 인권은 얼마든지 희생해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서 ‘나라’ 살려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들을 마주할 때 무척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양한 나라, 다양한 민족, 다양한 성별 출신들이 모인 ‘우리’를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나는 너희와 다르다’거나 ‘나는 너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늘상 말로는 ‘하나’를 강조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하나’는 자신을 중심으로 정복하고 흡수하고 군림하는 명목상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분들이 ‘복음’을 운운하고 ‘성경’은 인용하는 모습은 매우 불편합니다. 이분들의 진짜 문제점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고, 서로를 속이며, 또한 그렇게 세상도 속이려 든다는 겁니다. 과연, 이런 분들의 생각처럼 ‘국가’는 영원할까요? 그리고 정말 그들이 지켜내려는 ‘국가’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입니다.
2
오늘 1독서 구약 본문은 사무엘상 8장입니다. 12지파 동맹체제로 구성된 신앙공동체 이스라엘이 ‘왕정시대’, ‘국가'로 넘어가는 장면이기 때문에, 성서안에서도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유는 한가지, 사무엘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갑자기 왕이 필요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와 정복전쟁을 치루며 지냈던 치열한 시간을 통해 도달했던 결론이 그것일 뿐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우셨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은 채, 자신들을 괴롭혀왔던 그들처럼 ‘강성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만 떨어진 겁니다. 지금 그들은 ‘왕’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 ‘비교’로 떨어져버린 겁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지만,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자신들의 욕망을 붙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우리의 모습이 꼭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간절함이나 열심과는 전혀 다르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 사무엘상 8:7c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고 ‘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사실 그들이 비교로 떨어진 것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고 있는 ‘나라’들과 비교해보니,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구심으로 12지파가 동맹하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는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보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나팔이 불리면, 지파들이 자기 일처럼 협조하고 나서야 합니다. 각 지파에 연락을 하고 불러모으는 것도 일입니다. 게다가 이미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이들은 각 지파가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오해가 생길 수 있고, 그 결과는 곧장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일순간에 12지파중에 ‘베냐민’ 지파가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던 겁니다. 그러니 가뜩이나 강력한 외세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에서 더 이상 이런 식의 체제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겁니다. 대단히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아마 우리라도 같은 처지라면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요?
3
그러니까 결국 ‘왕’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안’ 때문에, ‘하나님만으로는 않된다’는 불신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신앙에서 무너지게 된 걸까요? 하나님은 먼저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왕’의 권한이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말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들의 삶이 파괴될 것이 걱정되셨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거나 아니면 자신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천벌’을 내려도 이상할 것이 없을 텐데, 이내 자신을 불신하는 이들의 청을 받아주시고 맙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혹시 지나온 걸음, 내가 잘못했을 때, 내가 그릇된 길로 행할 때,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지난 시간, 억지로라도 끌고 가시지 않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선택을 통해 깨닫고 배우고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묵묵히 바라만 보십니다. 그러고보면 하나님은 늘상 이런 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왜? 가르쳐주지 않고, 왜 가로막지 않으셨는지 불만스러우신가요? 하지만 하나님은 늘상 설교를 통해, 말씀을 통해, 사람을 통해, 그리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셨고, 가로막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않았고, 무시했고,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내 생각에는’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내 생각에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한 처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실패했던 것도 따지고보면 ‘내생각에는’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필경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내 생각에는’을 선택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늘상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 있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늘 그래왔습니다. 마땅하고 당연한 길이 있지만, 늘상 내 판단, 내 생각 뿐입니다. ‘정의’나 ‘평등’, ‘자비’나 ‘사랑’도 내게 이익이 되어야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이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채, 언제나 잘난 척하고 다 아는 척합니다. 하지만 일의 결국을 지나고 보면 내 선택의 길은 깨어지고, 상처입고, 아프고, 여전히 절망스럽고, 우울한 것들로 삶을 채워갈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던 겁니다. 그리고 무지했던 우리의 곁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셨을 뿐입니다. 그때 에덴에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던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꾸짖기 위해 그들을 찾아 다니셨을리 없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는 말씀이 자신을 꽁꽁 감추고 있던 아담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으니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이제는 너 있을 곳에 있으라’는 회복을 위한 초대의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4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듣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자신을 과신하는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느 편에 계신가요?
복음서 이야기는 결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시고,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는 ‘죄’라면 대체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 일까요? 용서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의 말씀을 꼼꼼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우선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보셔야 합니다. 그들이 한 것은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 마가복음 3:22
이들의 말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이들은 지금 예수님을 비방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율법학자인 자신들의 권위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사실을 파악하고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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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귀신의 일’이라며 거짓말한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에, 주님의 말씀이 있고, 주님이 일하시는 그곳에는 언제나 ’성령’이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성령은 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삼위’가 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지금 거짓된 말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모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 또는 훼방하는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이라거나 ‘제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불신이야 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않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은 다 용납되지만 이것 만큼은 용서될 수 없다’고 읽을 수 있지만, 반대로 ‘주님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다’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두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번째, 과연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을까요? 두번째, 과연 우리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 또한 그것을 기꺼이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 마가복음 3:35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비록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고 희망은 모두 무너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그분의 뜻이 옳다고, 그러므로 기꺼이 주님을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인 겁니다. 하지만 이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거짓된 말과 생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경계하고 무엇을 멀리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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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선택본문인 창세기 3장 말씀에서 거짓된 말을 했던 것은 뱀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아담’, ‘하와’는 1차적으로는 ‘뱀’에게 속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스스로의 말에 속아넘어졌던 겁니다. ‘하나님처럼’되고 싶고, 지혜롭고 싶던 자기 자신의 탐욕, 자기 생각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 준 겁니다. 그러니 그들 또한 ‘거짓’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거짓으로 주님을 공격한 것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안에도 주님이 걸어가신 길, ‘십자가’를 택하신 주님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일리 없다’고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유대 종교기득권자들이나, 로마의 영광같은 것을 하나님의 일처럼 믿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혹시 우리도 여전히 ‘내 생각에는’이라는 마음의 소리를 떨쳐내지 못한 채, 겉으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쉴새 없이 몰아닥치는 거짓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왜, 제자들과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던 ‘부활’하신 예수께서 왜, 내게는 나타나지 않으시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물리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이것은,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나, 증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사람이나, 성경의 말씀을 읽은 사람이나 그가 누구라도 그렇게 만난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참된 생명, 구원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경험했다는 것, 다시 말해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으며, 그러므로 말합니다.’ | 고린도후서 4:13
서로 다른 상황 뿐만 아니라, 너무도 다른 우리이지만 같은 ‘주님’을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제 오직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두 그 무엇이나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건져내야만 한다는 강요로 내몰리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께서 길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며, 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께서 하나님만을 믿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수 있도록 도우셨으며, 비겁한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나선 이들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시는 분도 같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언영색’(巧言令色), 그럴듯한 말로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특한 소리에 귀를 닫고, 오늘도 구원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북돋우어 주실 ‘성령’을 신뢰하십시오. 참된 길로 이끄시는 그분의 음성 드는 일에 예민할 수 있도록, 불안으로 이끌어가는 거짓된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거짓된 마음안에 성령은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시는 ‘성령’께서 모든 거짓을 들춰내고, 맑아진 우리 마음과 영혼안에 충만한 생명과 기쁨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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