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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성령강림후 여섯 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6. 26. 08:5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1:1, 17 ~ 27
응송 | 시편 130, 30, 또는 예레미야애가 3:22 ~ 33
2독서 | 고린도후서 8:7 ~ 15
3독서 | 마가복음 5:21 ~ 43
# 설교음원
http://naver.me/xUwzcoO7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kUzcPstPePg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Ilya Lepin (일리야 레핀), 1871,. <야이로 딸의 부활>., Saint Petersburg '슬픔의 노래', 를 부르는 이들에게 !
# 01
예전에는 어느 집에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손을 걷어부치고 함께 했습니다. 좋은 일은 함께 축하해주었고, 힘든일은 함께 도왔고, 슬픈일은 함께 슬퍼할 줄 알았습니다. 잔치가 되었든 초상이 되었든 그것은 언제나 ‘우리 마을’의 일일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살기 좋아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세련되어진 요즘 ‘우리’라는 단어는 이제는 너무나 어색해졌습니다. 이익이나 도움이 되는 특별한 관계나 조건이 없다면 언제라도 뒤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너무 이기적이고 메마른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우리’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고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갑자기 터져나오는 함진아비와 가마꾼들의 소란에 골목길에 어느덧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되는 이들을 축하해주던 ‘우리’는 이제 보이질 않습니다. 새벽송을 돌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던 그때의 ‘우리’는, 피리부는 사내와 함께 사라져버린 아이들처럼 어딘가로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곳에는 ‘함께’ 축하해주지 못하고, 함께 웃지도 못하고, 함께 울어주지도 못하는 돌처럼 마음이 굳어져버린 기형적이고 이상한 ‘우리’만 남아 버렸습니다.
오늘 1독서 구약본문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누렸지만, 사랑하던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그는 급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비교가 되었던 ‘다윗’ 때문 일까요? ‘사울’은 악하고 나쁜 왕의 대명사로 읽혀집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너무나 덤덤하고 무심히 그의 죽음을 지나칩니다. 마치 당연한 죽음인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죽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모두가 함께 ‘애가’를 지어 부름으로 이 아픔에 동참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화성시에 있는 베터리 공장의 화재로 스물 세명의 안타까운 생명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비가, 누군가의 어미가, 그리고 또 누군가의 아들 딸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라도 그분들의 슬픔을 서둘러 덮으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 밖에 없게 된 어떤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비록 처절한 아픔속에서도 그들이 피어나는 희망을 스스로 길어올릴 수 있을 때까지, ‘애가’를 부르며 기다려 주어야만 합니다. 그 누구에게라도 서럽지 않은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 02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 로마서 12:15
바울은 ‘교회’야 말로 바로 이런 이들의 곁에서 희망을 일구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온 사람입니다. ‘함께’ 하는 삶이야 말로 ‘교회’ 다움의 정체성임을 그는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유대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으며 신앙을 지켜가던 ‘예루살렘’교회는 재정적으로도 늘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고린도교회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바울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형편에 맞게 돕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12) 하지만 이건 ‘예루살렘’교회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작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일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진실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8)
가난한 이들, 아픔당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며 내미는 손길은 언제나 더 없이 귀합니다. 하지만 값싼 구제활동이나 적선에 그칠 때, 한끼의 식사를 제공하면서 도움받은 이가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비굴함’을 깊이 배려하지 못할 때, 그 안에는 ‘구제하는 이’와 ‘도움을 받는 이들’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구렁이 자리하게 됩니다.
‘당신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손을 내밀면서도, 정작 우리를 붙들어매는 것들 대부분은 내 배를 채우고, 내가 잘 사는 것들에 관한 관심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된 우리의 섬김이나 구제는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힘없는 이가 힘을 가지기를, 가난한 이들이 잘 살기를 요구하는 방식의 평등이 아니라, 언제나 반대로 힘 있는 자가 연약함으로, 부유한 자가 제 것을 포기함으로 이루어지는 평등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교회’의 정체성이며, 그 나라를 가져다 주시기 위해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께 배운 ‘복음’이었습니다.
# 03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고 계시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행정관할에 있던 ‘거라사’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다가 막 호수 이편으로 건너 오셨던 때였습니다. 회당장이었던 ‘야이로’라는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금 이유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함 때문에 자기 무능의 절망에 떨어져있었습니다. 본래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하던 회당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거나 강해할 자를 택하는 것도 ‘회당장’의 권한에 속할 만큼 이스라엘안에서는 꽤나 명망있는 편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이라는 간판도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 함께 가주시겠다고 했으니 이제라도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회당장의 딸을 고치러 가야하는 바쁜 길에, 불쑥 열두 해 동안을 혈루증으로 고생해온 이름 모를 여인의 이야기가 끼어들어옵니다.
재미난 것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 이름이 드러난 것은 회당장 ‘야이로’ 한명 뿐이고, 정작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그의 딸이나 혈루증 앓던 여인은 이름이 드러나 있질 않다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일까? ‘질병’이나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 명망있는 자나 이름 없는 자를 차별하지 않고 만민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이처럼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이 언제나, 누구의 인생에라도 찾아올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 두 사건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 저자인 ‘마가’의 눈에게는 ‘예수’께서 그곳에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 똑같았습니다.
# 04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 38절
제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죽음’이라는 현실 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봅니다. 주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회당장의 집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딸을 잃고 슬픔에 떨어진 ‘야이로’를 위로해주지만 따지고보면 그것은 모두 그의 아비 ‘야이로’를 위한 것일 뿐, ‘죽음’이라는 운명에 삼켜진 그의 딸은 그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오직 ‘죽은 야이로의 딸’만 덩그러니 어둠 가운데 던져지고 만겁니다.
어쩌면 혈루증 앓던 여인이나, 회당장의 딸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잊혀진 사람들, 소외된 똑같은 운명에 떨어진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처한 형편을 안스러워하고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정작 절망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 몫일 뿐입니다. 초상집에 모였던 그 사람들도 적당히 안타까워하다가 결국은 하나 둘 살아있는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그렇게 슬픈 죽음은 잊혀지고 말 겁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렇게 보니 혈루증 앓던 여인은 더 불행해 보입니다. 회당장의 딸은 슬퍼해줄 사람들이라도 있었지만, 그녀는 돌아보고 관심가져주는 사람도 하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시대상을 감안해 보면, ‘혈루증 앓던 여인’은 불행한 운명의 ‘대명사'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단순히 질병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여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차별’로 내몰리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앓고 있는 그 질병도 상황을 악화시킬 수 밖에는 없습니다. ‘혈루증’이란 출혈이 계속되는 부인병의 한 종류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구약 레위기 15:25 - 30이 ‘혈루증’을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는 탓에, 그녀는 단박에 공동체안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힐 수 밖에는 없습니다. 원치 않은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말씀 때문에 오히려 멀찌감치 밀쳐내고 소외되야만 하는 어떤 이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이런 시선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 마가복음 5:31
그들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저 수 많은 인파 속에 있었을 법한 어떤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무관심한 세상에서 그녀의 아픔은 드러나질 않고, 발견되지 않고, 치유받을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 05
오늘도 ‘함께’ 살아간다고 말하는 세상이 오히려, ‘누군가’라는 두루뭉실한 이름을 씌운채 아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곳으로 내몰아 버린 이웃들이 많습니다. 한번 이렇게 내몰린 이들에게, 사람들은 좀처럼 ‘함께’ 살아가야 할 틈을 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번쯤은 뉴스를 통해 ‘장앤인차별철폐연대’에 속한 분들이 지하철 출퇴근 시간에, ‘포체투지’(匍體投地) 시위를 하는 기사를 접해 보셨을 겁니다. 당신들 때문에 귀찮고, 불편하다는 부끄러운 말은 쏙 감춘채, 이건 옳지 않고, 이건 불법이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맙니다. 그들을 똑같은 ‘우리’가 아닌, ‘불편’을 끼치는 ‘무언가’로 취급하는 우리 때문에, 그들은 오늘도 자신의 ‘의지’로 전철을 타고 내리는 ‘자유’조차 허락받질 못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애처로운 그들만의 투쟁을 전하는 기사의 댓글마다 형편없는 인격을 꺼리김 없이 드러내는 욕설과 모욕이 가득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고통으로 떨어진 이들은 언제나 그리고 얼마든지 무시하고 눈을 돌려버려도 그만인 ‘그저 그런 사람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될 뿐입니다.
그러고보니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었던 ‘누군가’를 찾으려고 하셨고, 이런 주님을 제자들은 무시하려 들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똑같았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라며 살아있는 이들의 품으로 불러내시려는 주님을 비웃습니다.
어쩌면 그곳에 있었다면 우리도 지금은 적절하고 부드럽고 점잖은 ‘위로’가 필요할 뿐, 이런 식의 희망고문은 오히려 상처를 헤집고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애둘러 주님을 타박했을지도 모릅니다. 절망에 떨어진 이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죽음 가운데 홀로 내동댕이 쳐진 소녀에게, 혹은 아무리 외쳐도 이 사회에서는 이름 모를 ‘누군가’로 밖에는 불리울 수 없는 이들에게 ‘교회’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신이 가득한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주님이 찾아오셨던 그때를 복음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 마가복음 5:42
‘버려진 사람들’ 곁으로 주님이 찾아가시자 일어난 일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마가’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여기에서 유념하며 읽어야 할 대목은 ‘놀라운 어떤 일’이 아닌, 주님으로 인해 ‘사람들이!’ 놀라워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나신 여러분은, 놀라만한 일을 찾아 두리번 거리지마시고, 언제나 놀라워하는 사람이 되셔야만 합니다.
복음서 전체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걸음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그분을 만나고나면 고통에 버려졌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제 아무리 돌덩이처럼 냉랭하게 굳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리고 이 ‘놀라움’은 마침내 ‘이미 틀렸다고 체념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슬그머니 담장을 치는 이들의 일그러진 생각마져도 고쳐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 06
‘죽음’이라는 것이 ‘야이로’의 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닐 텐데, 여전히 함께 망해가는 처지임에도 깊은 슬픔으로 떨어진 이웃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냉소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하지 않느냐’고 위하는 척 거짓된 행복을 강요하고 윽박지르지만, 실상은 이런 사람들은 죽음의 힘을 강화시키는 ‘어둠’의 부역자들일 뿐입니다.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는 ‘놀라움’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는 탓에, 그런 사람들은 늘상 비웃음과 조롱으로 그분의 말씀을 불신하고 사람들을 윽박지르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하지 않은 낯설은 사건앞에서 힘없이 깨어져버린 이들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숫자’로 혹은 익명의 ‘누군가’로 부르고 소외시켰던 이들을 반드시 찾아내시고, 나의! ‘딸아’, ‘소녀야’라고 그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이것은 ‘힘을 내보라’ 선동도,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는 책망도, ‘내 딸 답게 살아내라’는 조급한 채근도 아닙니다. 기꺼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내가 너에게 특별한 한 사람이 되어주시겠다’는 주님의 위로이고, 결단입니다. ‘한 사람’으로 불러주시는 그분으로 인해 비로서 이제는 누구라도 버려지는 사람은 없게 됩니다. 질병도, 사회적인 차별도, 어떤 형편이나 처지도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 조차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위로와 평안안에 거하시길 빕니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보면, 우리 곁에는 말못할 아픔때문에 삶의 벼랑끝에 내몰려 있는 이들의 끊이지 않는 통곡과 한숨, 슬픈 노랫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그들을 ‘누군가’라고 이름을 붙이고, 우리의 경계 밖으로, 또 우리의 기억 너머로 사람들을 밀어내려고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슬픈 노래는 멈추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안에는 가장 경이롭고 놀라운 소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내는 사람, 주님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교회 공동체’의 삶이 그러했으며,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똑같은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저 또한 여러분의 일상이 주님이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움’으로 가득찬 날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일과 무관한 것처럼 제 할일에만 내몰려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불안한 오늘, 황폐한 땅, 눈물로 얼룩진 인생 때문에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곁을 무심히 지나치지않고, 기꺼이 그들에게 특별한 한사람이 되어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날의 십자가처럼 극심한 슬픔과 참혹한 두려움에 내몰린 ‘어떤’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이들에게 특별한 한 사람이 되어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또한 오늘의 저와 여러분 안에서, 주님은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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