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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6/23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6. 19. 11:3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상 17:(1 ,4~11,19~23) 32~49 혹은 사무엘상 17:57 ~ 18:5, 10 ~ 16 혹은 욥기 38:1  ~ 11

      응송 | 시편 9:9~20 혹은 133 혹은 107:1 ~ 3, 23 ~ 32

    2독서 | 고린도후서 6:1 ~ 13

    3독서 | 마가복음 4:35 ~ 41

     

    # 설교음원

    http://naver.me/x67XTq3i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ttrBSL82QyU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램브란트, <갈릴리 바다의 폭풍>, 1633. Isabella Stewart Gardner ( - 1924)

    '그' '누구'이기에 ?

     

    1

    오늘 선택본문으로 주어진 1독서 말씀은 ‘욥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욥’을 읽은 것을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합니다. 인간의 ‘고통’의 문제, ‘신정론’ 같은 어려운 신학적 논쟁을 떠올린 탓일 겁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불편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려는 마음으로 큰 맘 먹고 ‘욥기’를 펼쳐들지만, 여지 없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는 고난과 역경들,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인지 몸부림쳐왔던 ‘나’ 자신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던 아직도 찾지 못했던 문제들이 떠오르고, 여전히 지금도 구하고 있는 물음들이 자꾸만 시선을 끌고 갑니다. ‘욥기’는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을 무척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욥’이 겪는 비참한 일들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욥기’안에는 현실의 부조리, 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해내지 못하는 삶의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신학 논쟁이 가득합니다. 3장부터 41장까지 ‘왜, 고난이 찾아오는가?’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논쟁이 이어집니다. 

     

    2.

    논쟁의 한편을 맡고 있는 것은 욥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매우 간단합니다. ‘이유 없는 재앙’이란 없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고난을 가져다 주시는데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익숙한 말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인생’이란, 모두에게 통용되는 명쾌한 가르침이나, 한줄의 교리로 정리될 수 없을 만큼 매끈하지 않고 투박하기만 합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납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운 일 투성이입니다. 이제 갓태어난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임을 당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져야하는지, 왜 불편한 장애를 입고 태어났어야 했는지, 왜 치료약도 없는 불치병에 걸리게 되는 것인지 누구도 답해줄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이제야 행복해질 수 있게 되었다 싶은 이들에게 찾아오는 재난도,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찾아오는 아픔도, 전쟁이나 내전, 천재지변 같은 일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조금만 정직하게 돌아본다면, 이게 결코 남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런 일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욥을 향해 ‘너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던 친구들의 얄팍한 논리가 대단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참혹한 현실앞에서 아무것도 답할 수 없다는 절망과 두려움을 회피하고 자신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오늘 본문인 38장 이후로 급격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친구들의 정죄에 치열하게 저항하던 ‘욥’이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등장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맙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 욥기 42:5-6

     

    하지만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묻던 ‘욥’의 물음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신 답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해결된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욥’은 비로서 모든 고통으로부터 놓임을 얻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욥’의 이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갖게 되는 겁니다. 과연 ‘욥’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3.

    까닭없는 고난에 내몰렸던 ‘욥’의 물음에 답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오히려 ‘욥’에게 답변을 요구하십니다. 그 물음은 네가지입니다. 첫째 이 땅을 지은 것이 누구인지, 두번째 그 땅의 측량줄을 대었는지, 세번째 땅을 버티게 하는 주춧돌을 놓은 것은 누구인지, 네번째 바닷물을 가두신 분이 누구인지 답해보라는 물음입니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요? ‘과학’이라면 이 모든 것을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과학은 이 세계를 이루는 비밀들을 발견해 가고,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발견하고, 아는 것이 많아질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알아야 할 것도, 모르는 것도 많아질 뿐입니다. 그런면에서 과학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대체 하나님께서 하셨던 이런 물음이 먹고 사는 문제에 무슨 도움이 되고, 이토록 치열한 고난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불만스러워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핵심은, 왜, ‘욥’이 고난을 겪게 되었는가라던가 어떻게 해야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고난 속에 내동댕이 쳐진 ‘욥’을 통해 성서기자가 이야기하려는 ’욥기’의 핵심은 ‘하나님 경험’ 그것 뿐입니다. 

    ‘욥’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뵙게 되었다고 고백한 ‘하나님’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평상시 ‘창조주’라는 말을 대단히 상투적으로 듣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창조’라든가 ‘영원’이라든가 하는 말은, 당장 내일의 일도 헤아릴 수 없는 우리에게 ‘인생’을 한눈에 본다는 말보다 아득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역사 전체를 한눈에 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욥’처럼 아득한 하나님을 경험했던 신약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거센 바람이 일어나 파도가 넘치고 배가 침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난리가 났는데 주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제자들의 성화가 주님을 깨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고쳐주고 구원하시면서, 정작 우리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으시냐는 타박입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십니다. ‘고요하고, 잠잠하라’ 바람을 꾸짖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잠잠하라’는 이 명령은 앞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마주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실 때 하셨던 명령과 동일합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마가복음 1:24

     

    그때 악한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는 떠나갔습니다. 

     

    4.

    귀신을 내쫓는 사건과 바람과 풍랑을 꾸짖는 사건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꾸짖음을 받는 대상만 다를 뿐 ‘꾸짖음’ 자체는 똑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면에서 이 두가지 사건이 같을까요? 성경의 이야기를 읽으실 때 제일 먼저 고려해야할 것은 모든 성경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대상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들리는 일이나,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것이 모두 ‘악한 영’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사람이 아프면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 눈에는 대부분의 질병은 귀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미숙하고 어리석다고 우습게 여기시면 않됩니다. 과학이나 의학의 ‘눈’이 없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그렇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물음 앞에서는, 그들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전혀 없이 무능하기만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성서기자가 던지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은 마지막 42절입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 마가복음 4:42b

     

    제자들이 던진 이 물음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해주시겠습니까? 성서기자는 앞서 주님께서 귀신을 내어쫓을 때, 그 귀신의 입을 빌어 이미 그 답을 제시해주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 마가복음 1:24

     

    귀신은 주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지금 그 아들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다시 ‘이 분이 누구이시냐?’던 제자들의 물음으로 돌아가보아도, 답변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 ‘잠잠하라’ 꾸짖으시니 ‘귀신’도 떠나가고, 바람도 파도도 잠잠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창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씀인가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땅의 모든 것이 다 그분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드려보겠습니다. 과연 오늘 그것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문제이든, 여러분이 직면하고 계신 삶에서도 그분의 말씀앞에 모든 것은 ‘잠잠’해질 수 있음을 믿으시나요?

     

    5.

    세상 가운데 던져진 오늘의 교회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 풍랑속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배위에 있던 제자들의 형편 만큼이나 위태롭게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에 하루에도 몇번씩 포기를 강요받기도 합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답이 없고,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누구라도 두렵습니다. 어쩌면 1독서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다윗’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앞에 나타나 승리했던 그를 떠올리면 역시 ‘믿음’의 사람은 남다르다거나, ‘믿음’만 있으면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언제나 이런식으로 신앙을 지켜내는 것이 당연하고 가능할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일은 우리의 현실이 아닌, 남의 일로 그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식의 승리, 그런식의 놀라운 이적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갈되어가고 자꾸만 무력해지기만 합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없다고 체념하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돌아서는 것도, 하지만 무턱대고 믿겠노라 삶을 학대해서도 않됩니다. 

    우리는 삶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지’로부터, ‘왜, 내게’라고 묻는 대부분의 물음에 대한 시원한 답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지나보아야 알 수 있고, 지나고나면 주어집니다. 우리는 가보지 않은 것을 알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 신통한 능력은 미신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걸음이 선하신 주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음을 믿으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주님께 맡기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비록 오늘이라도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보며 아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욥’처럼 삶에 대한 억울함이 턱까지 차오를 때, 폭풍속에 던져진 삶이 무너질까 두려움에 내몰릴 때, 적어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다시금 제자들처럼 ‘그가 누구이시기에’ 라고 하는 이 질문 앞에 서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바로 그 때! ‘욥’은 아득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을,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 안에서 귀신을 내어쫓고 바람도 꾸짖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6.

    아무리 작고 지나칠 것이라도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우리가 헤쳐가기에는 너무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제한이 있고,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현실은 극히 일부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귀신’도 꾸짖고, ‘폭풍’도 잠잠케 하시던 ‘주님’의 한 말씀 뿐입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사람의 인생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나 비루하고 안쓰럽고 불쌍합니다. 더욱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더욱 치명적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환란과 궁핍, 곤경, 매맞음, 옥에 갇힘,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할 일들, 굶주림에 내몰리는 삶 속에서, 그럼에도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속이는 것 같고 죽는 것 같고 징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4b - 9)

    그러나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여전히 근심해야 할 일이 있고 가난도 해결되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다른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주님이 아니라, 이런 것까지 포함한 모든 삶이 하나님안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을 향해 오고 있는 ‘내일’을 보고, 나의 인식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눈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 신앙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분과의 만남을 길어 올리는 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욥의 친구들이나 자기 중심에 떨어진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인생에 찾아온 고난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섣불리 재단하는 교만에 떨어지거나, 반대로 잘난 척하며 남을 가르치려드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비교로 떨어져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 우리의 인생 전체가 세상의 운명 전체를 쥐고 계신 그분안에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말했던 그 고백이 터져나오는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겁니다. 성령은 오직 그 일을 위해 모든 믿는 자안에 찾아와 계십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 고린도후서 6:8b -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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