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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7/07 성령강림후 일곱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7. 3. 17:5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5:1 ~ 5, 9~10 혹은 에스겔 2:1 ~ 5

      응송 | 시편 48 혹은 123

    2독서 | 고린도후서 12:2 ~ 10

    3독서 | 마가복음 6:1 ~ 13

     

    # 설교음원

    http://naver.me/IFgztGcp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bFmyrmgeXt4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01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마도 가슴이 뛰고 벅차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 같이 그리고 그토록 우리가 믿음으로, 신앙의 힘으로 얻고 싶어하는 것들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는 어떤 이들, 다윗,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놀라운 신비 체험을 했던 바울까지 놀랍고 부러운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도 이런 결실이 맺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진 이들이 둘씩 전도여행을 떠나는 대목입니다. 본문은 주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대로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고쳐주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13절) 그리고 29절부터 세례자였던 요한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하지만 급하게 덧붙인 것처럼 이어진 30절이 오늘 전도여행을 떠났던 사도들의 보고로 끝나는 것을 보면 오늘 이야기의 마무리 결론은 30절이고,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중간에 끼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 30

     

    궁금합니다. 대체 과연 그들이 돌아와서 주님께 어떤 보고를 했을까? 얼마나 대단한 결실을 거두고,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돌아왔을까요? 기대가 됩니다. 

     

    #02

    바울이 전하고 있는 서신서의 말씀은 눈을 번쩍 뜨게 만들 놀랄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었던 신비한 종교체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과학과 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합리성의 시대라고는 해도, 여전히 인식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것같은 이런식의 신비체험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대체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든 걸까요? 혹시 사도로서의 권위를 위협받던 자신이 사실은 얼마나 신령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며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을 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이런 것이 하나도 대단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일, 더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니, 여기까지는 그의 말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가 ‘자랑한다’고 내놓은 것은 ‘육체의 가시’라고 불리울 만큼 고통스러웠던 ‘약점’이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는 사도가 정작 자신의 병도 고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기기 십상입니다. 오히려 ‘자랑거리’라고 내세우려면, 구약 본문에서 읽은 대로, 모든 어려움을 끝내고 ‘왕’이 된 다윗의 이야기 정도는 되야만 합니다. ‘고통’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고통은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순처럼 들리는 이야기들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어가야만 한다고 재촉합니다. 자,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보겠습니다.

     

    #03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고 전도를 보내실 때, 악한 귀신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돌아와 어떤 보고를 했는지, 그리고 주님은 무어라 평가하셨는지에 대해 ‘마가’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누가복음 10:20

     

    하지만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10장을 읽어보면 자신들의 전도 결과에 흥분한 제자들의 보고에 주님께서 매우 시큰둥해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주님이 기대하고 계신 것,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과 제자들이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그리고 복음서 기자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와 우리가 읽고 생각한 것이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게 됩니다. 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했을까요? 과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04

    ‘바울’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지를 초월해서 어떤 식으로 찾아오시고 말씀하실지를 결정할 권한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은, 그가 경험하고 해석한 것이 이미 복음안에서 깨닫고, 알고, 또한 믿고 있던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임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가시’라고 할 만큼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질병을 ‘바울’ 자신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 고린도후서 12:9b

     

    바울의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의 고백은 두가지 입니다. 첫번째, 비록 육신의 질병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어도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은혜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스럽고 삶이 피폐해질 수 도 있지만, 오히려 이 질병이 자신에게 주어진 ‘저주’가 아니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던 근거는, 적어도 자신이 믿고있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가져다 주실리가 없다는 신뢰였습니다. 바울은 전적으로 그 사실을 믿었고, 그래서 그런 처지와 상황일지라도 주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었던 겁니다. 

     

    #05

    바울이 오늘 편지에서 전하고 싶어하는 핵심은,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겠다는 겁입니다. 그 자신이 다른 이들의 병도 고치고, 심지어 놀라운 체험을 했지만, 여전히 그건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능력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자신을 통해 ‘능력’이 아닌, 능력주신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바라고, 능력이 아닌 주님만을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이라면, ‘바울’처럼 육체의 가시가 나가지 않아도 괜찮고 귀신이 떠나가지 않아도 괜찮고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역사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니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이 낫기를 세번 구했습니다. 그리곤 돌아섰습니다. 포기한 것도, 믿음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질병이 낫기를 바라지만 본질은 아니고, 이것은 없으나 더 귀하고 더 간절한 것이 있으니 괜찮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안에 거하고 계신 그분의 임재가 영원하기를, 언제나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수 있기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마음은 그를 닮지않습니다. 여전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않되고, 저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울이 보았던 구원하시는 주님, 바울이 주님안에서 누렸던 평화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자가 되야 한다거나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또는 몸이 아프지 않아야 하고 질병이 나아야 한다거나, 곤고함에 떨어지면 않되고 형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했습니다. 이런 상황, 이런 형편, 이런 처지일지라도, 여전히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내 모든 삶이 그분안에 있다는 신뢰가 가져다 준 평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이 있으십니까?

     

    #06

    매일을 돌아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믿음에 파산한 이들인지 고스란히 드러날 뿐입니다.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또 기쁘고 행복하다 싶을 때, 그렇게 특별한 일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을 송두리째 잊어버린 채, 제 인생을 바쁘게만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주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텅빈 마음 안에 주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가득 채워질때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대부분, 가진 것이 없고, 해낼 수 있는 것이 없고, 외롭고, 힘겨울 때, 사방에 우겨쌈을 당한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리지만,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때, 그때 비로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간절함과 목마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연약함에 실망할 때 강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깨어진 삶에 불안할 때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풍랑과 바람이 덮쳐올 때는 이 모든 것들을 능히 잠잠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을, 폭력과 배신, 상처와 아픔으로 삶이 송두리째 어둠에 삼켜지는 것 같을 때에도, 말씀하시는 주님을 향해야만 합니다. ‘빛이 있으라’던 그분의 말씀 한마디만 있다면, 그곳에는 어떤 어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질병이 아닌, 그분을 향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온전하신 그분 안에만 거한다면, 나는 언제나 ‘온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오점이나 약점, 무언가 잘못된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 지워내고, 없애고, 떨쳐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우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목사이자 교수였던, 제럴드 싯처는 단 한번의 사고로 딸, 부인, 어머니까지 잃게 됩니다. 갑작스레 자신의 삶을 덮친 낯설은 날은 그를 온통 어둠으로 짓눌렀습니다. 해가 기울고 저녁이 밀려올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과 절망에 삼키우지 않기 위해 그는 차를 몰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리기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쫓아도 지는 해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해가 지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몰려오는 어둠을 향해 동쪽으로 계속 달렸고, 마침내 떠오르는 태양을 맞을 수 있었던 겁니다. ‘빛’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듯,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뿐입니다.

     

    #07

    이제 1독서 ‘다윗’의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된 것이 서른 즈음이었습니다. 이제 사십년 간, 명실상부한 통일 왕국의 왕으로 통치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 내용입니다. (5절)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다.’ | 삼하 5:10

     

    ‘다윗’이 겪어야만 했던 그 동안의 모든 고생이 끝나고 보상이 주어진 것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왕으로서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형편도 날로 강성해가는 모습이 부러워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이후의 다윗의 인생을 조명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들이 가볍게 보이질 않습니다. 40년 통치를 마무리하고 삶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과연 ‘다윗’은 왕으로 즉위하던 지금과 똑같은 마음이었을까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정말 ‘다윗’은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행복’할 일만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처럼, 그는 행복했을까요? 

    비록 지금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야 ‘고생 끝, 행복 시작’ 처럼 보이지만, 이제부터 ‘다윗’이 ‘왕’으로서 걸어가게 될 사십년 기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하고 혹독한 시간으로 다가오게 될 겁니다. ‘밧세바’를 범했던 치명적 범죄의 끝에 얻었던 자녀가 병들어 죽게 되었고, 어린 딸이 험한 꼴을 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자의 난으로 자식들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들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을 위기에 내몰려 도망치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기력조차 쇠하여 수넴 여인을 통해 온기를 겨우 유지해야만 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그는 죽어갔습니다. 그러니, 사무엘서를 기록했던 성서기자는 사실, ‘그가 점점 강대해졌다’가 아닌 ‘만군의 주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읽혀주고 싶던 것은 아니었을까요?아마도, 인생의 끝자락에서 ‘다윗’은 어린 시절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르며 들판을 달리던 ‘목동’시절을 참으로 그리워했을 것 같습니다. 실재로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시편’에서 그는 한결같이 ‘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노래했습니다. 제왕으로서 나라를 이끌고 가야하는 ‘목자’의 무거운 짐이 아닌,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며 찬양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던 삶을 사십년간 애타게 그리워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08

    어떠신지요? 신비로운 이적들과 경험, 놀라운 신앙적 업적들, 그리고 세속적 성공과 명성이 부러우신가요?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이들 때문에 주눅이 들지는 않으신가요? 그런 것들이 있어야 찬양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섭섭함은 없으신지요.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이야 말로 기뻐할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작 이 말씀을 하셨던 주님 조차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셨고, 세례자 요한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우리는 믿는데, 어떤 이들은 믿지 않았을까요? 왜 우리에게는 생명의 길인데, 저들은 박해하고 죽이려는 걸까요? 차이는 이것 뿐입니다. 그들은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고, 우리는 보았고 들었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풍성한 생명되시는 주님안에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실감하고, 누리며 사는 길이 ‘신앙’이며, 우리가 신앙인이 되고 ‘예수’를 믿으며 산다는 것도 다름아닌 바로 이 길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 생명을 길어올리며 살기 위해서 입니다. 이미 우리 앞서 걸어갔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그 가치를 발견했기에, 목숨을 위협하는 이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비록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이미 영원한 생명안으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로지 그 안에서 하늘의 영광과 영생의 기쁨을 길어올리는 일에만 마음을 쏟으십시오. 반대로, 오늘 평안하고 화평하고, 감사하고, 삶이 기쁘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젖줄되시는 주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름 가뭄에 내몰린 나무에게 반가운 것은 한그릇의 물이 아닙니다. 마르지 않는 샘 곁에 심기워지는 것만이 ‘복’입니다. ‘생존’을 위해 양에게 필요한 것은 풀이 떨어지고 물이 마를지라도, 언제라도 풍성한 곳으로 인도해줄 ‘목자’가 있는 것 보다 귀한 ‘복’은 없습니다.

    우리 삶에도 곧 영혼이 핍절되고 목마르게 될 그 날이 올 겁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안에 받아주셨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할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남은 하반기도, 이 기쁨이 삶을 건져올리는 능력으로 경험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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