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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8 성령강림후 열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7. 25. 16:43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11:1 ~ 15 혹은 열왕기하 4:42 ~ 44
응송 | 시편 14 혹은 145:10 ~ 18
2독서 | 에베소서 3:14 ~ 21
3독서 | 요한복음 6:1 ~ 21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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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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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틴토레토, <오병이어의 기적>,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나는 지금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1.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이천년이 지났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분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구원자로 믿고 있으며,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천년이나 지났음에도 곧 오시겠다던 그분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재로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다시는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던 그분의 약속과 달리, 여전히 세상에는 굶주림과 질병, 죽음의 고통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라고 뭔가 뾰족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림이 나아졌다거나, 건강이 좋아졌다거나,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들도 ‘기적’처럼 어떤 이들에게만 찾아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구원자’로서의 그분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합당한 결과는 눈에 보이질 않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 떨어져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이천년 동안, 그리고 오늘도 교회인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2.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오병이어’,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겼다고 하는 꿈만 같은 ‘이적’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약 선택본문인 열왕기하 4장도 백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보리 빵과 자루에 담은 햇곡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술처럼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먹거리가 자가증식이라도 한 것처럼, 계속해서 채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배불리 먹게되었다고 하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듣는 사람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성서기자가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면,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나눠줄 때, 광주리는 어떤 방식으로 채워졌을까요? 나눠주려는 동시에 분열이 된걸까요? 아니면 나눠주고 돌아보니 채워져 있던 걸까요?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현실의 괴리감은 믿음과 불신의 경계에 서 있는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눈 딱 감고 이런 기적을 믿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안타깝게도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은 마술사의 쇼에서 볼 수 있을 뿐,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엘리사’ 같은 능력있는 사람, ‘예수님’ 같은 놀라운 이들이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때의 사람들과 달리 이미 자연과학이라는 비밀을 엿보게 된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기 때문일까요? 이런 광주리 하나만 있다면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을 수 있지 텐데, 여간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와 달리,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은 담대하게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시는 분’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에베소서 3:20-21
우리가 믿음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바울’이 맹신적인 사람이었던 걸까요? 그도 아니면, 지금과 달리 정말 그 시절에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던 ‘기적의 시대’이라도 되었던 걸까요?
임선규, <오병이어2> (부제:빈 들에서), 2016 3.
이미 ‘요한’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으로 주셨다고 전했었습니다.(요6:48) 말씀대로라면 이제 우리는 배고픔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시다’라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늘상 실패하고 맙니다. 여전히 가지고 있는 돈도, 양식도 떨어져가고, 내일의 배고픔을 해결할 대안이 없기 눈에 보이질 않는 탓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멘’이라고 외치는 우리의 응답은 ‘그렇게 되었으면 좋으련만’이라고 하는 서글픈 바램에 그치고 맙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 이야기를 접하는 우리 마음은 불편합니다. 덮어놓고 믿지 못해서일까요? 하지만 우리같은 사람들의 삶이 처절할 만큼 간절하지 않았던 때가 있을리 없기에, 어떤 이들만 못했다고 하는 이런 식의 해석은 억울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가 정작 기독교 신앙이 전하는 무언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생각을 좀 달리해봐야겠습니다.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씀을 들을때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 ‘생명’을 떠올리고 이해하셨습니까?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저 이 육체가 모든 생리적 작용을 멈추지 않도록 해주는 어떤 것으로만 인식할 뿐, 대단히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맙니다. 하지만 실재로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안에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가 ‘프쉬케’(ψυχή), ‘비오스’(βίος), ‘조에’(ζωή) 세가지나 됩니다. 그 의미가 옳은지 아닌지를 떠나서 이렇게 ‘생명’의 미묘하고 찰나적인 차이를 세분화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저는 고대의 사람들의 통찰이 오늘 우리들에 비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생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은, 사실 ‘생명’에 대해 그만큼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이야기겠지요. 실제로 요즘의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을 거의 던지지 않습니다. 늘상 아침이면 저절로 깨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빵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탓입니다. 하지만, ‘생명’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여전히 신앙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애당초 기독교는 ‘생명’의 구원을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시라는 말씀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질문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나 자신이 무엇을 통해 죽지 않고, 혹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벗어나 여전히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까?
4.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은 두 세력,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이나 ‘로마’를 부러워했습니다. 오늘로 보면 전형적인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무엇으로 살았을까요? 유대 종교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과 의로움만 있다면, 망하거나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와 달리 이교도였던 ‘빌라도’에게는 ‘로마’제국의 힘, 제국안에서 인정받는 것만을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을 겁니다. 이게 이천년 전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그들의 믿음과 신념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없으면 가난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돈의 지배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돈이 없으면, 또 돈을 가져야만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굶주림이나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빵’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처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고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원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요한의 고백을 따라 갈 수가 없게 될 겁니다.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없던 빵이 생기거나, 비어있는 은행 계좌가 가득히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은 보편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도, 따지고보면 그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안스러운 바램일 뿐, 현실은 언제나 비어있는 것들 투성입니다. 과연 말씀이 제시하고 있는 놀라운 구원 이야기와 우리의 현실을 가로막고 있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갈 수 있을까요?
그 실마리를 얻기 위해 1독서 구약본문인 사무엘하 11장 말씀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사람,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유일 무이하게 선한 왕으로 불리웠던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인생에서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오점들이 여과없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 왕들이 출전해야하는 시기(1절)임에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했을까요? 태평스럽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잠들었다가 깨어 옥상을 거닐다가 우연히 목욕하던 여인을 엿보게 됩니다. 당장에 자리를 피했어야 하지만 그는 신하를 보내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고 과감하게도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맙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충직한 부하의 아내였던 여인을 기필코 궁으로 끌고와 범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쯤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과를 은닉하고 감추기 위해 또다시 끔찍한 죄를 짓고 맙니다.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합법적으로 그녀를 제 소유로 강탈해버렸습니다. 이런 인간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두둔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그를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니 오히려 배신감마져 듭니다. ‘다윗’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대체 ‘다윗’이 어쩌다가 일말의 주저함없이 천인공로할 짓을 저질렀던 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원인을, 믿었던 주군 ‘다윗’에 의해 살해된 ‘우리아’의 말에서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 사무엘하 11:11
성서기자는 ‘우리야’의 입을 통해 지금 ‘언약궤’가 전쟁터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듣고 계시지 않으니, 하나님이 부재해 버린 지금 이곳에서 다윗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자신이 이 땅의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언약궤에 갇혀있지 않고, 성전에 갇혀 있지 않고, 교회에 갇혀 있지 않고, 언제나, 그리고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믿었더라면, 애당초 이 사건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백주 대낮에 교인을 데리고 모텔에 들어가거나, 남의 설교를 표절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댈수 있리 만무합니다.
5.
자, 그렇다면, 오늘 ‘기적’사건을 이해하는데 ‘다윗’의 이 이야기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유심히 보십시오. ‘엘리사’는 분명히 ‘주님께서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것은 그가 아닙니다. 복음서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라는 11절에 핵심이 담겨있습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다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일하실 수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 이런 기적들이 일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기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어떻게 이런 기적을 경험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와 같은 비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텍스트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라고 하는 늘 똑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성경에서 읽고, 누군가의 경험에서 전해듣거나, 교리나 성경공부 교재를 통해 전해들은 지식과 정보안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없음을 있음으로, 죽은 자를 살아있는 자로 불러내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얼마나 실감하고 계십니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 살아있음을 확인받으려는 몸부림인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금더 풀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은 ‘죽음’의 반대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바로 ‘죄’의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생명’을 경험한다는 말은, ‘죽음’을 초래하는 모든 ‘죄’의 힘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자유를 실감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 ‘죄’의 힘이란 것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없이 살고 있다는 자기 만족으로 생각하시면 않됩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여도, 속마음까지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악화되고 극박한 여건에 떨어지고나면 누구나 도덕과 윤리에서 실패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율법의 의를 완성하지 못하는 자신의 민낯을 감출 수 없으니, ‘생명’이나 ‘구원’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건강한 세포를 파괴하는 암세포처럼, ‘생명’과 ‘살아있음’으로 누리게 되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힘을 깨트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만이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을 깨트리는 것은 오직 ‘생명’ 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만 있고,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고유한 통치영역인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오직 ‘하나님 경험’만을 말할 뿐입니다. ‘죽음’을 물리치고,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생명’의 힘이란 그분안에서만 경험하고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경험’이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꿈에서 만난 것처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말씀을 들었다는 식으로 희화화해서는 않됩니다. 성경에서 어떤 이들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건 전적으로 삶에 드리워진 염려와 두려움, 공포와 같은 ’죽음’의 힘을 깨트리고 몰아내는 ‘생명 경험’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외에 심지어는 우리의 예배나 다른 어떤 종교행위로도,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6.
과연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것이 예수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구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것이 궁금하시다면, 조용히 이 물음에 답해 보시면 됩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예수를 믿는 신앙의 삶을 선택한 이후로, 세상으로부터 외면받고, 소외되고, 뒤쳐지고, 실패하지 않을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 생명을 잃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염려나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혹은 날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고 강요하는 죽음의 힘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늠름해지셨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어떤 사람들처럼 염려와 근심, 불안에 내몰려있지는 않으십니까? 그것을 붙들고 기도의 자리에 계신 것은 아닙니까?
‘요한’은 오늘 복음서 말씀의 일을 기록하면서에서 ‘남자’만 오천명 넘게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분명 이 놀라운 사건의 출발점이 되었던 주님 손에 들리워졌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제공한 것은 어린 아이였는데, 본문의 평가안에 그 아이가 빠져있는 겁니다. 어린 아이는 그 시절 성서기자의 눈에도 허수에 불과한 보잘것 없는 존재였는가 봅니다. 마치 제국의 왕 ‘다윗’에 의해 속절없이 ‘죽음’에 내몰리고, 삶이 파괴될 수 밖에 없던 힘없는 ‘우리아’와 ‘밧세바’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낙담에 떨어지고 말겁니다. 아마도 그날 그곳에 모였던 오천명이나 되었던 어른들은 저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려고 싶었을 겁니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던 제자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빌립’이나 ‘안드레’ 뿐만 아니라 본문의 드러나지 않은 다른 제자들도 주님께서 이 상황을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 뒤로 한걸음 물러난 채, 슬쩍 도망칠 기회만 살피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날 그 광야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땅에서 누군가 해내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럴듯해 보이고 큰소리는 치지만 비굴한 어른들이 아니라 ‘한 아이’로부터 기적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아이와 주님을 제외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걸로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하던 작은 도시락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올려졌고, 하나님은 응답해주셨습니다.
설교의 첫머리에서, 왜 오늘날 굶주림과 배고픔으로 죽음에 내몰린 극빈국가에서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느냐? 질문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생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신 것 같아,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말씀대로 당신 자신의 몸을 세상 만민을 위한 ‘생명’의 떡을 내어주셨습니다. 배고픔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참된 양식입니다. 여전히 이런 말씀이 실감나지 않으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냐?’고 따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땅의 ‘떡’을 아무리 많이 획득하고 소유한다고 해도, 또다시 찾아오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떡을 가져도 배고프게 될 날이 오게 될 겁니다.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죽음’이 그 때입니다. 바로 그 때, 생명이 결핍되는 ‘배고픔’의 두려움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깨트릴 수 있는 참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은 ‘복음’이며, 주님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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