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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8/04 성령강림후 열한 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7. 31. 18:0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11:26 ~ 12:13a 혹은 출애굽기 16:2 ~ 4, 9~ 15

      | 시편 51:1~12 혹은 78:23 ~29

    2독서 | 에베소서 4:1 ~ 16

    3독서 | 요한복음 6:24 ~35

     

    # 설교음원

    http://naver.me/GYCpP2sI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AMejIWrSU2A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 ‘만나의 수확’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들

     

    1.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에게 써보낸 2독서 서신서 말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 에베소서 4:1

     

    그는 지금 감옥에 ‘갇힌 몸’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겪게 된 고초라고는 하지만, 그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각자의 삶은 부르심에 따른 것이라는 그의 말은 어색하게 들립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감옥’에 처한 상황 또한 바울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식의 우려를 염려했던 것인지, 그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 에베소서 4:7

     

    이제 우리들 차례입니다. 눈을 감고, 지금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떠올려보십시오. 주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선물의 분량을 은혜로 베풀어 주셨다는 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는 경우는 두가지입니다. 첫번째, 내가 받은 분량이 많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이때는 내 분량만큼 받았다고 고백하는 거시 어려울리 없습니다. 또 다른 두번째 경우는, 다른 사람보다 더 작은 분량을 받았음에도 동의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두번째의 경우에 대부분의 우리는 섭섭하고 속이 상합니다. ‘나는 이 만큼 뿐’이라는 생각에 설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내 몫이 불편한 걸까요? 그리고 이런 생각은 어디로부터 오게 된 걸까요? 

     

    2.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30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 여행을 떠나게 된 주인이 자신의 하인들에게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씩을 맡겼고, 그가 돌아온 이후에 셈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지금 시세로 한다면 한 ‘달란트’는 작게 잡아도 27억 정도는 할 겁니다. 세상에 하인들에게 그렇게 막대한 재산을 하인들에게 맡길 주인은 없습니다. 아마도 당장에 가지고 도망이라도 칠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자신의 하인들을 믿었고, 그것으로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은 너그럽고, ‘하나님의 나라’는 긍휼과 자비로 작동하는 나라라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듯 후하게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 받은 달란트는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라도 받고 누리고 용납되는 나라라는 말씀인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중에는 ‘왜 어떤 사람은 한 달란트만 받아야하는가?’ 라며 주인의 처우가 불평등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 한편이 무언가 불편한 까닭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나 밖에 받지 못했다는 서러움이 공감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이와의 ‘비교’에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누리게 될 수 있던 기쁨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오늘 오늘 1독서 본문입니다. 출애굽 이후 두번째 15일 즈음에, 오아시스 지역이었던 ‘엘림’을 떠났던 출애굽 공동체는 ‘신광야’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광야’입니다. 먹을 것이 보이지 않는 척박한 땅이다보니, 여기저기에서 군중들의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생각에 그치게 된다면, 나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오만함에 속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과 우리는 똑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자기 자신이나 타인들에게 찾아온 고난과 역경의 문제를 대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될리가 없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겠다는 식으로 ‘믿음’을 강화하다보면, 당장은 괜찮은 것 같아도 결국은 버티다 버티다 어느 한순간 탈진하고 쓰러지고 실족하게 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힘든 것은 힘든 것입니다. 이런 현실 자체를 외면하거나 부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습니다. 땅을 판다고 음식을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사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굶어죽게 되었다’(3절)는 출애굽 공동체의 항변은 틀린 말도, 비난받을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우리도 다 똑같습니다. 

     

    3.

    그렇다면 대체, 신앙을 가진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요? 현실에 낙망하고, 가난이나 고난으로 인해 절망에 떨어지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현실의 아픔이 깊어지고 오래 계속되게 되면,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이고 든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결국은 한없이 짜부러지고 맙니다. 다 똑같아 질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조건이나 자격처럼 여겨지는 모든 기준을 거부합니다. 본문을 지나치기 전에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어진 환경이나 타고난 상황은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에 내몰려 있고, 광야는 척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똑같은 상황, 동일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모세'와 같은 사람들은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며 살아냈습니다.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불행해 보이는 삶의 현장에서, 이들은 어떻게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걸까요? 반대로,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사십년을 지낼 수 밖에 없던 걸까요? 광야가 고통의 이유가 되었던 사람들은 지금 이 걸음이 하나님께서 제국 애굽의 폭정으로부터 ‘자유’와 ‘구원’의 삶을 허락해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광야’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던 것도 아닙니다. 오늘 베드윈 족들이 광야에서 생존하는 것처럼, 출애굽 공동체도 본문에 등장하는 ‘메추라기’나 ‘만나’를 먹을 수 있었고 ‘바위’로부터 흘러나오는 물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보이지만 그때마다 도우시는 은혜를 따라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게 놀라운 겁니다. 하지만, 이렇듯 생존 자체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곧장 애굽에서의 삶과 광야, ‘먹거리’와 ‘자유’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결국 생존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놀라운 은총앞에서, ‘왜, 나는 이런 것만 먹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떨어져버린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그들이 그들 자신들과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애굽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받은 자신을 애굽의 고기 가마터에 있던 ‘어떤 것’ 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트리고 있을 뿐입니다. 

     

    4.

    지난 주일, 우리는 ‘다윗’의 치명적 범죄를 함께 목격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 쥐도 새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르고 또 은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셨으니, 세상을 다 속이려는 모든 불법한 계획은 언제나 실패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셨다’는 말은 곧장 하나님께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시다는 뜻이 됩니다. 아니다 다를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나단이 그를 찾아옵니다. 왕의 목전에서 그의 죄를 폭로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나단은 이야기 한토막을 들려줍니다. 다윗은, 저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인줄 모르고 남 이야기하듯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며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만큼 ‘제정신’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선지자 ‘나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다윗의 허물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그의 허물은 ‘남의 이웃의 아내를 탐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증언하고, 살인’함으로 십계명을 어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죄가 있다는 겁니다. ‘다윗’을 지칭하는 나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는 제 소유의 양과 소를 잡기 아까워했기에, 남의 것을 탐했습니다. 자기 것만 생각하던 사람이었던 탓에, ‘남의 것’도 ‘제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 사무엘하 11:9a

     

    하나님은 지금, 제 것만 생각하는 이런 마음이야 말로 당신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 사무엘하 7:8

     

    성전을 짓고 싶어하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말씀 그대로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울’왕의 살해 위협을 피하며 도망자 신세였던 때에도, 그는 자신의 삶을 불평하거나 원망함 없이 하나님께서 허락신 것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 그는 온통 ‘자신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제국’도, ‘이 ‘왕국’도, ‘부하’도, 그리고 심지어는 부하의 ‘아내’도 모두 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질 않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 마져도 까마득히 잊고 만 겁니다.

     

    5.

    복음서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한 무리들을 향해, ‘빵’을 얻기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생’얻는 일이야 말로 주님께서 전해주려고 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무리가 다시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 요한복음 6:28b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그들의 물음은 우리 자신들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하면, 일단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집니다.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는 일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또는 자기 재산을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한다거나, 사회 사업을 하는 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참 중요한 일이고 소중한 일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것’의 수준을 떨쳐내지 못하는 한 결국 이런 귀중한 생각들은 결국 저 사람보다, 어떤 이들보다 더 잘 해내야하고, 심지어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야 한다는 비교로 떨어질 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쉽게 내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어리석음에 떨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대단한 일’들은 사실 모두 우리 자신의 생각과 기준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정의하시는 것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 요한복음 6:29b

     

    예, 이것이 전부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으면 족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실감하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대단한 일을 충족해야만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바심, 이렇게 못하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어떤 형태의 염려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6.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예수 믿으라’는 말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지나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는 천차만별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메시아로 믿는 이유는 본질적으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기 때문인 겁니다. ‘부활’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드러내는 사건인 겁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하나님께로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듯, 하나님을 우리 각자를 보내신 분으로 믿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과 한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은 없고, 우리 중의 어떤 분의 삶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이 말씀을 믿는다면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일’은 멀리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비록 지금 깨어져보이고, 상처나있고, 광야처럼 척박하고 곤고할지라도, 누군가 ‘그것이 뭐냐?’고 비난하고 조롱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나 처한 상황 그리고 각자가 짊어진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내게’라고 물을 수도, 이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투정부릴 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에게 주어진 현실과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삶을 선물로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현실을 나의 삶으로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해서든 인생과 삶을 자신의 뜻대로 제어해 보겠다는 오만한 마음입니다. 오히려 우리 생명이 그분에게 주어진 것이 분명하다면, 그분의 완벽하신 계획과 보살핌과 역사안에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순응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여전히 우리는 또다시 내일은 어찌될른지 한걸음 앞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내일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극심한 생존의 공포가 염려와 두려움으로 우리 마음을 쥐고, ‘하나님의 일’을 해내야만 한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우리를 모아세울 겁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의 어떤 것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전락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녀’임을 입증해 주시는 예수님만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각자에게 주신 분량대로의 삶을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용납하십시오.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 수만 있다면, 매일 아침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던 광야의 그들처럼, 비교에 내몰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잇댄 믿음안에서, 우리는 ‘충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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