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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8 성령강림후 열 세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8. 15. 14:0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열왕기상 2:10 ~ 12, 3:3~14 혹은 잠언 9:1 ~ 6
응송 | 시편 111 혹은 34:9 ~ 14
2독서 | 에베소서 5:15 ~ 20
3독서 | 요한복음 6:51 ~ 58
# 설교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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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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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논쟁 ('분별함'은 지혜일까?)
1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들어왔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인지 말해준 사람도 없고 배운 적도 없지만, 암암리에 우리는 모두 이런 말이 결국은 어느 편이든 치우치지 않고 적당히 제 인생 안전하게 건사하며 살아가는 요령 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마져도 바뀐지가 오래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란 그저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비법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과 너무 다른 ‘지혜’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의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참된 지혜’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너무 당연해보이겠지만, 실은 지금 우리는 이 두가지 서로 다른 지혜중에 무엇을 선택해야하는지, 기로에 위태롭게 놓여있습니다.
2
‘지혜’에 관해 언급하자면, 오늘 1독서에 등장하는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이름은 알고 있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그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태생부터가 ‘금수저’였습니다. 유대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지혜’와 더불어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셨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그냥 왕위에 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에서 제 자식도 ‘솔로몬’처럼 지혜를 달라는 기도가 끊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지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지혜를 달라는 겁니다. 정말,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을까? 이런 뚱딴지같은 의문을 가지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었다는 이 이야기는 실제가 아닌, 그의 ‘꿈’이야기일 뿐입니다.
‘그 날 밤에 기브온에서, 주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 | 열왕기상 2:5a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역사’는 늘상 왕조를 이룬 시조나 영웅들이 ‘하늘’이 낸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영웅화하거나 미화합니다. 침이 마르도록 ‘솔로몬’을 옾이고 있는 성서기자의 기록안에 이런 식의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두번째, 열왕기를 기록한 성서기자의 의도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실제로 10장까지 이어지는 성서기자의 기록만 본다면, ‘솔로몬’은 자기 백성을 살피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였고,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부와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재판도했고, 스바의 여왕까지 찾아올 만큼 국력을 신장키셨을 만큼 대단한 왕이 었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도 그런 솔로몬을 예찬하고 높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한 인물의 이야기는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줄곧 솔로몬의 위대함을 찬미하던 성서기자는 11장에 들어서면서 단 한줄로 그의 인생 전체를 평가해 버립니다.
‘솔로몬이 늙으니, 그 아내들이 솔로몬을 꾀어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 왕상 11:4
사실은 지금껏 아름답고 화려하게 묘사하던 모두 글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평가를 폭로하기 위해 깔아 놓았던 성서기자의 덫이었던 셈입니다. 어쩌면 성서기자는, 솔로몬을 부러워하면서 넋을 놓고 성경을 읽던 우리 모두에게 ‘너희도 똑같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3
세번째는, 사실은 앞선 ‘솔로몬’에 대한 이야기들도 칭찬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 열왕기상 3:9b
그의 소원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대단히 기특해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대단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는 대목입니다. 물론 실제로 재판은 사람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나 아니면 누가’라는 식으로 들릴 뿐입니다. 그는 지금 선악간에 살피고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염두하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가 하나님께 구했던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는 표현 또한 가벼이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 창세기 3:5
이것은 에덴에서 아담을 실족하게 만들었던 ‘뱀’이 했던 말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만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내질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선과 악’을 분별하고 싶은 ‘마음’을 결코 선하게 여기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나 사람을 ‘선’으로 분별하고 규정하는 순간, 곧장 다른 반대편은 ‘악’으로 규정될 수 밖에는 없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언제나 선하고 옳은 것은 ‘판단’하고 있는 ‘나 자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선’을 구분짓겠다’ 말하면서 ‘나 자신’이나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들 과 세상 모두를 ‘악마화’하거나 내몰고 싶은 유혹에 떨어지곤 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언어로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정말, ‘선’과 ‘악’을 분별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가 맞습니까? 참말로 그것 뿐입니까? ‘솔로몬’같은 ‘지혜’를 구한다는 것이 속으로는 ‘부’와 ‘명성’을 얻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처럼, 혹시 자기 세계를 강화하거나 ‘나’ 자신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본받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 뿐이었습니다. '선’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구분지었던 적이 없으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세리’나, ‘창녀’, 부정한 ‘병자’나 ‘귀신들린 사람들’, 심지어 사람들이 더럽다고 혐오하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고 주님안에서는 누구라도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하느냐’고 묻던 어떤 사람에게도 주님은,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마 19:17) 다시 말하면, ‘너는 계명만 지키면된다’는 겁니다.
네번째는 ‘솔로몬’에 대해 직접 언급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 마태복음 6:29
주님이 보실 때는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나, 심지어 그가 하나님께 받아 누렸던 그 어떤 것도 ‘하늘의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4
그러고보니 ‘분별’에 관해서 ‘바울’ 사도가 언급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 로마서 12:2b
거봐라, ‘분별’하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싶으시겠지만,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바울’은 ‘선함’이란 ‘하나님’께 귀속되는 성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빛’만이 ‘어둠’을 드러내고 몰아낼 수 있는 것처럼, ‘악’을 드러내고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의 가르침에 빚대어 보아도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이 ‘선한가’ 또는 누가 ‘악한가’를 규명하고 규정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자신이 모든 삶을 용납하고 모든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과 바로 그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고, 이것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표현대로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않되는 해괴한 일입니다. 대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 당신안에 거하고, 주님도 그들 안에 거한다’고 하셨으니, 우리로서는 이 말씀을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성찬례’를 거행하고 참여하라거나, 주님은 말씀이시니 ‘말씀’을 먹으라는 해석에 그치곤 합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기록되었던 당시 교회가 처했던 상황에서 본다면, 이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살’과 ‘피’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지니고 이 땅을 살아내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내신 시간은, 우리와 똑같이 배고프고, 지치고, 힘들고, 암울하고, 절망스러운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자연스레, 우리로 하여금 ‘그런데도 어떻게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혹독한 삶, ’십자가’까지 내몰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내실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 요한복음 6:57
이 한 말씀안에 ‘사람’으로 살아내셨던 주님의 길과,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던 말씀의 요체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5
‘하나님 때문에 살고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제게는 영웅들이나 할 법한 당당한 목소리로 들리지 않고, 험하고 퍽퍽했던 한 평생을 ‘너’ 하나 보고 버텨왔다던 어머니 말씀처럼 들립니다. 생의 의미나 기쁨 따위를 구하는 것조차 ‘사치’라 여겨질 만큼 헐벗고 힘겨웠던 날들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은 조건없는 희생적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뭔가 거창하게 드러내는 겉치레가 아니라, ‘너’있으니 내가 있고 ‘나’있으니 또한 ‘너’ 살아간다는 서로를 향한 ‘의지’이고, ‘의존’일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며 사셨던 것인지 조금은 실감이 되시는지요? 비록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사람들이 조롱하고, 당신께서 목숨을 걸고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또 그 일 때문에 박해와 비난에 내몰리게 되어도, 그래도 주님께는 늘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일치’란 이런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아,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던 백부장의 고백을 주님께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던 주님의 말씀은 명백해집니다. ‘먹고 마신다’는 행위는 한끼의 끼니를 때우는 수준보다 훨씬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먹는 것’은 내가 먹고 있는 ‘그것’이 된다는 말이고, 내가 먹는 그것이 ‘나’ 자신을 이룬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던 말씀은,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안에 거하는 ‘일치’를 이루는 경험으로의 초대가 아니고 무엇일까 싶습니다. 주님과 ‘한몸’이 되고 그분과의 ‘일치’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신비체험을 한다거나 거룩한 부담이나 영적훈련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이런 나와, 이런 내 인생과 ’한 몸’ 되어주셨음을 믿음으로 실감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서신서에서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우들에게 했던,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했던 말의 본질입니다. ‘바울’의 말을 ‘시간 관리를 잘하고, 세상과 구별되어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식으로 읽는다면, 곤란합니다. 성경은 자기 관리 비결을 전하는 지혜서가 아니라, 생명을 건지는 일에 관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고 그 만큼만 살수 있으니, ‘시간’이나 ‘세월’은 곧 ‘생명’이라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세월을 아끼라’고 했던 그의 말은 ‘생명을 아끼라’는 말이 됩니다. 게다가, 우리말로 번역된 ‘아끼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 ‘엑사고라조’는 ‘건져내다’, ‘구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바울’의 말은, 아무도 저항하지 못한 채 덧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안에서 생명을 소모되고 파괴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한 운명이 되어 ‘영생’안에서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아니겠습니까? ‘영생’하는 구원이 그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존에 배웠던 ‘모든 지식을 포기할지라도 이것 하나 만큼은 붙들겠다’ (빌 3:9)고 말했던 겁니다.
6
오늘 서신서 말씀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 에베소서 5:19 -20
이런 식의 설교투의 말씀을 세상과 현실을 너무 모르는 낭만적인 소리라고 볼멘 소리를 내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도 아니면, 상투적으로 듣고 지나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도무지 그리 할 수 없는 현실에 떨어져있는 우리에게 마치 자신을 ‘극복해 보라’는 투로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어떻게, 또 어떤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답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으며 믿음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바울이 말했던 노래와 찬송과 감사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결실 인 겁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구 물으셔도, 저는 이렇게 밖에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예수가 생명의 떡이심을 경험하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일,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지혜’라는 겁니다.
주님과 일치되어 살아간다면, 비록 내 운명이 비루하더라도 ‘십자가’에 떨어진 ‘예수’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앞날이 막연하고 내일은 불안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찬송하고, 답이 보이지 않을 때 기도하고, 절망할 때 감사하자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런 찬송과 기도와 감사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멋진 인생을 가져다 주시는 주님을, 여러분은 먹고 마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솔로몬’이 얻었다고 하는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산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를 얻으셨나요? 아니라면,
세상이 말하는 지혜와,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 그리고 오늘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지혜 중에 여러분은 무엇을 인생을 길어 올리는 지혜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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