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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3 성령강림후 스물네 번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0. 30. 17:55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룻기 1:1-18 혹은 신명기 6:1-9
응송 | 시편 146
2독서 | 히브리서 9:11-14
3독서 | 마가복음 12:28-34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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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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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인생을 걸고 따르는 '길'
01
지난 성령강림후 스물 세번째 주일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했습니다. 지방의 성경교사였던 마틴루터에 의해 촉발되었던 종교개혁의 불꽃이, 암흑같았던 중세교회에 눌려 잠자고있던 교회를 일깨워냈던 놀라운 사건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의문은 시작됩니다. 개혁의 대상이었던 당시의 교회나 개혁의 기치를 높였던 이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507년이나 지났지만, 지난 주일 한국교회의 강단도 이렇게 나뉘고 말았습니다. 200만이 함께 모여 악법을 저지하고 교회를 지켜내자는 구호를 걸고,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어진 예배의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로 말입니다.
그리고 507년 전과 동일하게, 모두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선택이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이고, 또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일까요?
오늘 함께 읽은 1독서 구약 계속본문은 ‘룻기’입니다. 구약 성경안에 여성의 이름이 제목이 된 책이 두권 있습니다. ‘룻기’와 ‘에스더’입니다. ‘룻기’를 떠올릴 때, 대부분은 기구한 운명에 떨어졌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마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 한편을 본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우리와 달리 유대인들에게 ‘룻기’가 구약 성경안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구약성경안에 흐르고 있는 굵직한 사상적 근거가 이 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다윗’왕의 증조할머니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이스라엘의 민족 정체성의 근거와 뿌리에 있는 인물이 ‘룻’인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룻’은 ‘유다’백성이 아닌, ‘모압’이라고 하는 이방출신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기’는 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유대교’의 폐쇄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룻기’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자신들의 야웨 신앙을 확인하고 다잡곤 했을 겁니다. ‘룻기’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신앙인 ‘야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02
‘나오미’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들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찾았던 그 땅에서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 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모압 땅에서 얻은 두 며느리 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중에 고향땅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극심한 기근이 끝이 나고, 오히려 고향이 베들레헴의 형편이 먹고 살만한해 졌다는 소식입니다. ‘나오미’입장에서는 더 이상 이방 땅인 이곳에 머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게 된 겁니다.
자신만 생각했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남아있는 며느리 둘이 문제입니다. 며느리들 입장에서 자신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오미’입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이방땅인 이곳 ‘모압’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을 겁니다. 홀로된 시어머니만 믿고 모든 것이 낯선 타국에 들어가 남편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결코 이방인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도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생각만으로도 답답한 일이었을 겁니다.
비록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비련의 주인공들 처럼 보이지만, 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자유롭게 놓아주려고 하는 ‘나오미’와 그런 시어머니를 홀로 떠나보낼 수 없어 함께 있겠다고 하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또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따듯하게 보입니다.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마져도 마치 원수가 된 것처럼 형편없이 깨어지고 등돌리는 오늘 우리 시대의 부박한 관계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여튼, ‘룻’은 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고 마음을 정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전부입니다. ‘룻’처럼 하나님만을 선택하라거나, ‘헌신’과 ‘결단’하라는 식으로 본문을 읽으며 곤란합니다. 물론 시집온 이후로 그 가정에서, 또한 ‘나오미’로부터 ‘하나님’에 관해 들어왔을테지만, 아직은 ‘룻’이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가련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의 떠남에서 아주 익숙한 구약의 한대목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 창세기 12: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응답하며 길을 나섰던 대목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인생앞에서, 자신의 운명 전체를 걸고 길을 나서는 이 둘의 모습이 무척 닮아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은 ‘룻기’가 무척 익숙하고 친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척박한 환경, 무너진 형편,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길 떠나는 믿음이 그들의 야웨 신앙의 핵심이었으니까요.
03
‘나오미’나 ‘룻’ 그리고 ‘아브라함’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나’도 또한 이라고 결단을 촉구할 만큼 무척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성경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안에 등장하는 이들의 하나님 경험은 무척 생생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애매하고, 모호하고,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은 너무 불확실해 보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다’는 것을 또한 그 약속이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저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것이 아니라 저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고 있는 형편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희미하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옳다’는 자기 확신 뿐입니다. 우리는 오늘 ‘나오미’나 ‘룻’처럼 숱한 선택앞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일까요? 이것을 선택해야만 하나님의 뜻일까요? 혹은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거나 못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걸까요? 애당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을 따르고 있다 여기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오늘 이 시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뜻대로, 계획대로, 혹은 예측했던 대로 된 일은 대체 얼마나 있었을까요? 언제나 ‘내일’은 예상 밖이었고, 새로웠고, 그래서 낯설었으니, ‘삶’은 늘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저런 인생은 망해야 마땅하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행복해야만 한다는 우리의 기대와 가치관도 무너진지 오래입니다. 역사도 그렇고, 개인의 삶도 또한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고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예측하고, 계획한대로, 흘러간다면, 이 만큼 삶이 불안하고 두렵지는 않을 겁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런 시간을 ‘우연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일어나는 ‘우연성’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던가, ‘섭리’와 같은 말은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보이지 않는 분이신 것처럼, 하시는 일도 또한 드러나기 전까지는 우리가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어느날 갑자기 그분이 하신 것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서 놀라고 감탄하고 당혹스러워하게 됩니다.
04
신앙의 자리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행하시며 보호하신다’는 고백은 너무나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각자가 살아가야만 하는 삶에서 그 말은 너무나 모호하고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시대 정신에 의해 떨어진 탓인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좀처럼 선명하게 보이질 않고, 먹고 사는 것이 급한 탐욕에 휘둘린 탓인지 ‘하나님 말씀’이 선명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늘상 ‘하나님의 뜻대로’를 외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곤 합니다. 대체, 이런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쫓는다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요?
율법, 즉 ‘하나님 말씀’에 능통했던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으뜸되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명이 으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의 물음이 상당히 불편합니다. 순전한 호기심이 아닌, 얄팍한 마음이 그 안에 숨겨져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 마가복음 12:29-30
아마도 이 율법학자는 ‘첫번째는’ 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요? 늘상 남들이 인정할 만큼 목숨걸고 거룩한 종교인으로 살았던 자신보다 ‘하나님 사랑’에 최선을 다한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없을테니 말입니다. 주님은 곧장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가복음 12:31
그는 이 답변을 듣자 마자,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고 추켜세웁니다. 주님이 말씀해주신 두가지 계명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낫다’고 동의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두번째 계명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첫번째 계명을 잘 지켜내고 있으니, 그보다 못한? 다른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게 됩니다.
05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답변을 얻고 싶었던 까닭은, 다른 611개의 계명을 지켜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큰 계명을 지켰으니 ‘괜찮다’는 자기 합리와의 ‘근거’와 ‘면죄부’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던 그들의 오만했던 행태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참 얄팍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 ‘제사장’같은 종교기득권자들은 늘상 자신들은 ‘하나님을 이만큼 사랑한다’고 사람들앞에 드러내길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님의 말씀 때문에 이들은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란 선택적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귀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손길로 지으신 세상 모두가 아름답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늘 첫번째, 두번째 순서와 차별을 찾습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모르고, 말씀은 지키지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나’는 이만큼 해냈고, ‘나’는 이 만큼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늘상 ‘너’의롭지 않고 ‘너’는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에 바쁩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의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 마가복음 12:34
하나님 사랑에 실패한 외식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를 책망하거나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오히려 그를 격려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언젠가, 또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보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 나라는 ‘침노’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나라입니다. (마 11:12) 우리가 그 나라를 향해 가야하고 참여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06
여전히, 우리에게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룻기’를 통해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기에는 우리 앞에 펼쳐져있는 삶이란 여전히 너무 막막하고 막연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남들의 삶을 볼 때마다 속절없이 마음이 흔들거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묶어두어야만 할까요? 어떤 증거가 있으면, 무엇이 보이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다시금 우리를 ‘룻’이나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응답했던 똑같은 곳으로 불러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명기 6:4-5
‘들으라 이스라엘!’, ‘쉐마 이스라엘’이라는 이 외침의 자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그에게 인생을 걸고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할 것은 ‘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매는 것 뿐입니다. 이 말씀을 외칠 때 이스라엘의 현실은 오히려, 전혀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고, 말씀을 믿고, 말씀에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절망스러웠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비틀거릴지라도 여전히 말씀을 향해 자신들의 운명을 내걸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내일’을 향해 길을 나섰던 ‘아브라함’이나 ‘룻’처럼 말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지치고 바쁜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을 말씀을 향한 이런 기대가 남아 있을까요?
현실에 바뀐 것은 하나도 없고 내일은 여전히 막막하고 막연할 뿐이라고,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그분의 말씀에 운명을 건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불안하신가요? 맞습니다.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라고 하는 처절한 운명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저 또한 사나운 파도처럼 삶이 흉포하게 몰아닥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 집니다. 그러나, 그에게 운명을 걸었으니 되돌릴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망하신다면 별 수 없습니다. ‘나’도, 내 인생도 망할 수 밖에요. 그러나, 하나님께 운명을 걸었던 주님을 하나님은 ‘부활’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인생에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저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는)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 히브리서 9:12b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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