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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성령강림후 스물 다섯번째 * 창조절 1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1. 8. 11:3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룻기 3:1-5, 4:13-17 혹은 열왕기상17:8 ~ 16
응송 | 시편 127
2독서 | 히브리서 9:24-28
3독서 | 마가복음 12:38-44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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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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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과부'를 서럽게 만드는가?
01.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읽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내용을 파악한다면, 성서일과 본문들 전체가담고 있는 공통된 주제를 파악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습니다.
1독서 계속본문은 ‘룻기’입니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가서 일하게 되었던 ‘룻’이 결국 그와 혼인을 하게 되고, 운명 전체가 뒤바뀌는 기적같은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결말입니다. 그런 결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 마지막 17절입니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 룻기 4:17b
남편을 잃고 홀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던 비참한 이방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보다 비참할 수 없어 보이던 운명이, ‘큰 복’을 받게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읽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선택본문인 열왕기상 17장 말씀은 우리에게 더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땅에 가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릿’ 시냇가의 냇물과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먹을 거리로 버텨왔지만, 극심한 가뭄앞에서는 위대한 선지자도 별 수 없습니다. 시냇물이 말라 버려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자 그는 시돈의 사르밧 지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이미 자신을 살려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생명을 의탁해야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저 남은 밀가루 한줌, 병에 담긴 기름 몇방울로 아들과 죽기 전에 마지막 빵을 해먹으려고 했던 ‘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염치 없는 선지자는 그것을 자신에게 내오라고 요구합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파렴치한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순종을 택하였고 그 뒤에 그녀의 집에 밀가루가 떨어지지도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아 가뭄의 때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복을 받게 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우연치 않게, 오늘 복음서 말씀에도 한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성전에서 두 렙돈을 예물로 바침으로 주님께 누구보다 많은 것을 바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게 됩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두 렙돈’은 ‘과부’라고 하는 그녀의 처지처럼, 가치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것, 그러니까 그녀가 몹시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 떨어져있음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것이 가난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남아 있는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쯤되면, 오늘 설교의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은 대단히 간단해 보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을 아까워하지 마라’, ‘그런 믿음위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02.
저는 도무지 그런 식으로 강단에서 외칠 만큼의 담력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능력이나 합리성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일하실 수 있겠으나, 그마져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일 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또는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공식처럼 타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 정말 우리가 ‘사르밧’의 ‘과부’나 두 렙돈을 드렸던 가난한 ‘과부’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결코 믿음이라는 수식어를 들면서 ‘말씀’을 ‘도구화’하는 오만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죽기 전에 아이와 먹으려던 과부의 마지막 한끼 식사를 빼앗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일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이야기도 다를 바 없습니다. 분명히 그녀가 드린 예물은 가난한 가운데 있던 그녀의 ‘모든 생활비’ 그것도 ‘전부’였습니다. ‘마가’는 두 렙돈을 봉헌한 여인을 ‘가난한 과부’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과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삶에 내몰린 이들의 대명사처럼 불리웠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두 렙돈’의 가치는 1/8 ‘앗사리온’에 해당하고, 한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 정도입니다. 노동자의 하루치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환산해 보면 한 ‘데나리온은 8 - 10만원 그리고 한 ’앗사리온’은 5 - 6천원 정도가 될 겁니다. 그렇다면, 1/8 ‘앗사리온’에 해당하는 두 렙돈, 그러니까 오늘 그녀가 드린 예물인 ‘생활비 전부’라는 것이 겨우 6 - 7백원 정도인 겁니다. ‘가난한’ 그리고 ‘과부’, ‘두 렙돈’ 이라는 단어 모두 사람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볼품없고, 불쌍한 형편과 처지에 놓인 형편을 설명하는 같은 말이었던 겁니다. 아마도 당시 유대 사람들 중에 이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자꾸만 눈을 부벼가며 읽곤 합니다. 이해를 못해서가 아닙니다. 제자들 앞에서 ‘가난한 과부가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칭찬만하고 예수님께서 제 갈길 가셨다고는 믿고 싶지않기 때문입니다. 미쳐 보지 못하고 지나친 본문 어디쯤, 제자들을 시켜 몰래 그녀의 집에 먹거리를 가져다 주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라던가, 아니면 적어도 그녀를 불러와 사람들 앞에서 칭찬도 해주시고 직접 복을 베풀어주셨다는 그런 이야기 하나쯤 덧붙여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아직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가’나 평행본문의 기자인 ‘누가’는 마치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해 일언반구없이 침묵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의 봉사나 섬김같은 이야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성서기자가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려고 했던 본말을 찾아나서야만 하겠습니다.
03.
우선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는 오늘 말씀이 당시 유대 종교기득권자들의 가식적인 신앙을 고발하고 있다는 겁입니다. 이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서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뉘어질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38 - 40절이고, 뒷부분은 41 - 44절 입니다. 앞 단락은 율법학자들이었던 ‘서기관들’을 향해 하신 주님의 말씀이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이야기는 율법학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뒷받침하고 드러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까 실은 이 본문이 ‘과부’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닌, ‘율법학자들’로 정의되던 당시의 종교기득권자들의 가식적인 신앙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예외없이, 가식과 허위로 덧칠해진 종교인들을 향한 분노로 치를 떨었을 겁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과부는 6백원, 7백원이 전 재산인 자신의 생활비 모두를 봉헌했습니다. 이쯤되면 보통의 사람들은 그녀의 내일을 염려하기 이전에, 대체 오늘은 어떻게 보냈을런지가 더 안타까워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의 거룩한 유대 종교인들은 그런 형편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과 같이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가르쳤을 그들이 또한 ‘하나님께 드림’이 으뜸되는 계명이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부추킴으로, 가난한 이웃들의 가산을 삼켰던 겁니다. 사람들 눈을 속일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 좋아하며(38),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합니다.(39) 남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즐겨하는 불한당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가식적인 종교인들일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곧장 이어지는 13장의 첫머리에는, ‘성전을 모두 다 무너트리겠다’는 주님의 분노가 이어집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존재해야하는 ‘성전’은 이미 강도의 굴혈로 전락해 그 의미를 상실해버렸고, 도움이 필요한 하나님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삯군들로 가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많은데,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보이질 않습니다. 최종 판결 선고 같은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 마가복음 12:40b
오늘 우리의 현실이 딱히 이와 달라보이질 않으니,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천둥소리 처럼 크게 들릴 수 있기를 빕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04.
두번째, 과부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든 것을 드린 것에 대한 주님은 평가가 매우 뜻밖의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 마가복음 12:43b
‘두 렙돈’이 그 어떤 것보다 ‘많은 것’이라는 말씀이지만, 이런 말씀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의미를 좋게 해석한다고 해도 ‘두 렙돈’은 크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에게 ‘더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과부’의 처지는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이에 비해 율법학자 같은 이들은 스스로 높임 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높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 본문의 ‘과부’와 같은 처지에 떨어지고 싶은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율법학자 같이 살고 싶어할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은 잘 와닿지 않을 수 밖에요.
적어도 ‘마가’나 ‘누가’가 전했던 말씀을 액면 그대로만 읽게 된다면, 마음이 너무 불편해집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정작 당사자인 그녀와 무관하게 제 삼자인 자신들끼리 주고받는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식의 평가는 아무런 위로나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이런 대화속에서, 그녀는 그저 멀찌감치 저 멀리 어디쯤 힘든 제 삶을 붙들고 살아가야하는 누군가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마져도 그렇게 방관하시는 것처럼만 보이니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고작 5-6백원이 그의 생활비 전부였답니다. 그러니 어제라고 제대로 끼니는 채웠을까요? 이런 상황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신앙’이라거나 ‘믿음’이라는 식의 말씀이라면, 이건 너무 한가한 소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이’라는 주님의 표현 방법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똑같습니다. ‘더’라는 표현은 여전히, 그리고 또 누군가의 형편과 삶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비교의 늪으로 빠드리고 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더’ 한 사람이, 그리고 반대로 또 다른 누군가는 ‘덜’ 한 자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말씀 때문에 온통 뒤죽박죽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기분이 불쾌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성서기자는 우리의 답답함을 해소해줄 만한 구체적인 답변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저 알바가 아니라는 걸까요?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궁극적인 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05.
그러나 분명히 성서기자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함께 읽었던 1세기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이라면, 우리와 달리 ‘두 렙돈’을 바쳤던 ‘과부’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을 겁니다. 당시의 교회는 ‘부활’의 증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고, 곧 오시겠다던 주님의 재림은 여전히 막연하던 처지였습니다. 더욱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던 과부의 형편이, 믿음만으로 달려가야 했던 박해받는 교회의 현실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부’를 칭찬하신 주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을 현실속에서도, 자신들을 향한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과부’처럼, 이땅에서는 늘 ‘오늘’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종말’이 가깝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부’의 처지가 더 낫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누구에게나 불편하고 서러운 일이니까요.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인생을 걸지 못한 채, 율법학자들처럼 오늘을 채우라는 강요와 억압을 비워내지 못하고 자신을 채우는 일에만 마음을 쏟으며 살게 된다면, 오히려 더 많이 가지고 채워야 한다는 조급함이나 반대로 지금의 누림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삼킴을 당할 것이 뻔합니다.
우리는 본문안에서 율법교사와 과부를 다르게 보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처지나 형편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억울함을 항변하고 싶겠지만, 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암시하는 말씀이 바로 40절에 언급된 ‘심판’입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에게만 심판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한 우리 모두가 ‘심판’앞에 서 있는 셈입니다. 다만,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태,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앞에 서야 한다는 현실에 이르게 되면 비로서, ‘죽음’으로 끝이 날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 드러나게 될 겁니다. ‘룻기’의 행복한 결말이나,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기적 이야기도, 그리고 복음서의 ‘율법학자’나 ‘과부’의 이야기도, 모두 ‘종말’과 ‘심판’이라고 하는 이런 시선으로 볼 때만, 납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올린다고 하고, 대단한 삶을 살아낸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또한 그 안에서, 누구라도 그때가 되어야 ‘살아야 한다’는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이미 우리는 죽음을 깨트리는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위에 삶을 세워가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으로 믿을 때, 더한 것도 덜 한 것도,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누가 더 귀한가’, 누구의 것이 얼마나 ‘더’라고 가늠하고 평가하는 억압과 서러움에서 벗어나, 믿음만으로 자유와 생명을 얻는 나라, 모두가 귀하고, 모두가 존귀한 존재로 주님께 영접받는 나라가 주어졌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우리 앞서 걸어간 신앙의 선배들은 그 말씀에, 과부가 드렸던 ‘두 렙돈’처럼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고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꺼이 한몸 공동체가 되어, 그들을 구원해 내셨으며, 우리도 또한 그렇게 지켜내실 겁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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