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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11/24 성령강림후 마지막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1. 20. 09:48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하 23:1-7 혹은 다니엘 7:9~10, 13~14

       응송 | 시편 132:1-12(13-18) 

    2독서 | 요한계시록 1:4b-8

    3독서 | 요한복음 18:33-37

     

    # 설교음원

    http://naver.me/F6lEE07K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UbbBXccSGRA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Christ before Pilate  from the series  The Life of Christ  by James Tissot, Brooklyn Museum - https://www.nytimes.com/slideshow/2009/12/18/arts/20091218-tissot_10.html

     

    '진리'에 잇댄 이들의 상상력

     

    1.

    오늘은 2024년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성령강림후 마지막주일이며, ‘왕국절’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왕국절’에 대해서 잘 모른 채 지나곤 합니다. 1992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국에서 발간했던 ‘기독교대한감리회 예배서’에는 왕국절기에 대해 ‘8월 마지막 주일에 시작하여 13-14주간이며 대강절 이전까지 계속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왕국절’은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또 그 사랑의 왕국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실 그분의 나라이며,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나라는 마땅히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왕국절’이 우리를 일깨우는 것은 ‘자유’와 ‘평화’ 처럼 영원한 생명과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인식입니다. 기독교장로회에서는 특별히 ‘왕국절’ 기간을 ‘창조절’이라는 절기로 구별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성자와 성령에 집중하던 우리의 시선을 ‘성부’이신 창조주 하나님 중심주의로 환기시키기 위한 이런 노력이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는 때로는 너무 뜬 구름같은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냥 그런 나라가 있는가 보다’라는 식으로 지나쳐버리거나, 아니면 세상의 패권을 쥔 ‘강대국’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식으로 상황이나 형편, 조건을 개선하고 우리의 기대나 바람을 확장하는 수준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이 말하는 ‘하늘’에 대해 이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거나, ‘하늘로부터’임하는 은혜라는 말도 익숙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늘로부터’오실 겁니다. 하지만, ‘과학’을 알지 못하던 성서기자들과 달리, 오늘 우리에게 ‘하늘’은 그저 공허하고 비어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기자들이나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이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쫓아가야만 합니다. ‘하늘’은 말 그대로 ‘땅’과는 다른 곳입니다. 어느 정도 다를 수 있다가 아니라, 전혀 같을 수 없는 이질적인 곳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이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셨다는 믿음과 신앙의 고백이 담긴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명백해집니다. ‘인간’의 어떤 나라와도 ‘전혀 다른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나은 ‘내일’, 더 살기 좋은 이상적인 ‘나라’를 꿈꿔왔습니다. 그런 갈망이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건 우리 개개인의 삶도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대단한 문명을 이루고, 그럴듯한 삶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 배고프고, 아직은 아프고, 아직은 불안하고, 아직은 두렵습니다. ‘내일’을 향한 우리의 기대와 꿈이 멈추어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이런 꿈을 꿔야한다는 것은, 어제까지 우리의 기대가 실패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합니다. 역사, 철학, 교육, 정치, 종교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런 연속된 실패에 익숙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사의 주권’ 그러니까 무엇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겁니다. ‘역사’라고 하면 나와는 너무 동떨어지고 뜬금없는 현실감없는 것처럼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역사’ 대신에 ‘인생’이라는 말로 바꾸어보아도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이나 ‘역사’가 무엇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씀에 동의하시나요? 

     

    3. 

    오늘 1독서 선택본문은 지난주에 이어 ‘다니엘’ 7장입니다. ‘다니엘’은 역사를 가늠하는 법정이 하나님 앞에 펼쳐지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조서’가 펼쳐집니다. (7:10) 조서가 펼쳐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법정의 재판관이시라는 것과 그러므로 세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제국들의 흥망성쇠 조차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겁니다. 

     

    주님, 강물이 소리를 지릅니다. 강물이 그 소리를 더욱 높이 지릅니다. 강물이 미친 듯이 날뛰며 소리를 높이 지릅니다.’ | 시편 93:3

     

    시편 기자의 말처럼 지금껏 세상은 ‘홍수’ (물결소리, 술렁대는 강물)와 ‘바다의 강한 파도’로 상징되는 ‘혼돈의 세력들’이(폭군과 독재자) 역사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큰 물 소리보다 더 크시고 미친 듯이 날뛰는 물결보다 더 엄위하신 주님, 높이 계신 주님은 더욱 엄위하십니다.’ | 시편 93:4

    하지만 말씀에 약속된 것처럼 창조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서시게 된다면 제 아무리 흉포한 혼돈의 세력들이라도 평정될 겁니다. 그러니 이 환상은, 놀랄만큼 장엄하고 불의한 제국에 의해 신음하던 성도들의 모든 눈물이 씻어질 만큼 통쾌합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 다니엘 7:13  

     

    이제야 말로 모든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의 통치로 전환될 것이라는 위대한 선언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권세를 주신 분이 오심으로 드러나고 성취될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곧장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런 놀라운 위엄과 영광과 권위를 가지셨으면서도, 주님은 왜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신음하게 만들던 인간의 지배를 단박에 무너트리지 않으시고 왜 그토록 오래 참으셔야만 했던 걸까요?  그리고 대체 인자 같은 이는 누구일까요?

     

    4.

    복음서 말씀은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감추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곳까지 나아가야만 합니다. 

    빌라도의 심문과 주님의 답변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라는 빌라도의 물음과 그에 대한 답변,

    두번째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답변입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은 예수님 당신의 정체성, 그러니까 ‘너는 누구인가’를 묻는 겁니다. 주님의 답변 이전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답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주님은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 겁니다. 이 물음은 ‘복음’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복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사람들이 반란을 주도하는 수괴이며, 하나님을 참칭한 신성모독자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한 예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심문관이 되어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수였던 '예수'를 향해 던졌던 그 물음은 사실 먼저 '빌라도' 자신을 향했어야 마땅했던 질문입니다. 왜 일까요? ‘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수는 전혀 다른 분으로 이해될 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볼품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십니다. ‘나’는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가난한 노숙자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결핍에 내몰린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하늘의 풍성한 은혜와 영생을 가져다 주실 구원자로 보일 겁니다. 다시한번 묻겠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리고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두번째 답변입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 요한복음 18:36

     

    주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우리는 그 동안 그 나라를 무척 오해해왔습니다. 늘 우리에게는 역사속에 패권을 장악해왔던 바벨론, 헬라, 로마 같은 나라, 그보다 더 강하고, 그보다 더 위대한 나라가 익숙합니다. 이런 기대는 아무리 오래, 깊이 해도 결국 세상에 속한 나라일 뿐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모든 나라, 이전까지 세워왔고 앞으로 세워가게 될 모든 우리의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5.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 요한복음 18:38c

     

    주님의 답변을 듣고난 이후,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에, 안도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헛된 망상’속에나 존재하는 나라라고 한다면, ‘로마’ 제국에 전혀 위협이 될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너그러움은 사실, 예수님이나, 그의 나라가 로마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는 깔보는 마음이 담겨 있던 겁니다. 

    아직 ‘빌라도’에게는 물어야하는 한가지 질문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왕이오?’ 이런 사람이 ‘왕’이라면 그의 나라는 별 볼일 없을 테고, 왕이 아니라고 한다면 애당초 그런 사람에 대해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도무지 ‘왕’이라든가 ‘나라’로는 보이질 않는다는 겁니다.

     

    진리에 선 사람들은 내 말을 듣는다.’ | 요한복음 18:37

     

    주님의 이 답변은, 답변인 동시에 ‘너는 진리 편에 서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빌라도'를 향하고 있는 이 말씀은, 최종적으로는 오늘 주님의 말씀앞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이 물음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답을 내놓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진리'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적어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늘 우리 귀에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리가 없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는 없을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 보냅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늘 먹고, 마시는 것,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이지와 같은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를 충족할 수 있는 것만이 우리 관심을 끌어당깁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여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할 뿐 아니라, 들여다 보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천체에 얼마나 많은 별들이 있는지의 정보는 알고 있지만 정작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릅니다. 가진 것이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 사람의 본심이나 인간성은 조금도 가늠하지 못합니다. 왜 이것 뿐이냐?고 불평은 잘하지만, 내 손에 들리워질 때가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수고와 헌신이 필요했는지, ‘대추한알’에서 세상 전부를 보아냈던 ‘장석주’시인과 달리 껍데기에 시선을 빼앗긴 우리는 그 안에 담겨있는 숱한 시간을 보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종말’과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계절이 바뀌고, 속절없이 지나쳐가는 시간속에서 ‘주님’이 오고 계시다는 것 조차 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말씀드린대로만 한다면, ‘진리’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만 믿으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고, 내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어진 모든 걸음마다 하나님에 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라면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반드시 주님이 가지고 오시는 나라를 엿볼 수 있게 될 겁니다.

    오늘도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는 마귀의 유혹은 우리를 실족하게 할 만큼 강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잇대어 살겠노라’는 한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과 세상의 겁박을 깨트리셨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애통하는 데서 비판은 시작된다. 애통은 자기 연민의 표현일 수도 있고, 탄원인 것은 확실하나 결코 체념은 아니다. 아픔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해체하는 비판의 중요한 첫걸음이 되고, 이러한 비판은 신학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새로운 현실을 연다. 역사의 문을 두드리는 이러한 울부짖음을 야웨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역사는 힘을 얻게 된다.’ _ 월터 부르그만, <예언자적상상력>, p 63

     

    신학자 월터 부르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참으로 ‘역사’가 그분안에 달려있다고 믿으신다면, 이제는 ’그런 나라가 오겠느냐?’ 막연함이 불러일으키는 회의와 불신에서 벗어나십시오. 내일, ‘그 나라’가 올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시련과 고통과 애통함과 아픔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분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상상력’만큼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꿈구는 우리의 ‘상상력’은 없는 것을 향한 허무맹랑한 신념이나 억지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내셨던 예수님의 죽음과 삶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와 그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음을, 그리고 다시 오실 그분의 날에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안에서 보았고 들었던 이 사실 너머를, 생각하는 것이 곧 상상력이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는 이 믿음안에서 주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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