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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8 대림절 제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2. 6. 16:3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말라기 3:1-4
응송 | 누가복음 1:68-79 (* 사가랴의 찬가 )
2독서 | 빌립보서 1:3-11
3독서 | 누가복음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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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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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카바넬, <세례자 요한> '어둠'을 맞서는 길, '회개'
1.
대림 2주가 밝았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주일아침입니다. 마치 지난 대림 첫주를 맞으며 우리가 밝혔던 희망의 촛불이 우리의 길을 밝히고 지켜준 것만 같아, 오늘 이 아침이 반갑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향한 우리의 기다림이 이처럼 깊었을까 싶을 만큼 절절했던 한주였습니다. 서슬퍼런 군부의 상징인 ‘계엄령’이 무려 45년만에 다시금 세상 밖으로 고개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자칫 광기에 물든 죽음의 힘에 내몰려 여린 생명들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숨 죽인체 기도하며 밤을 지세웠습니다. 마침내 긴긴 밤이 지나고, 끔찍한 악몽에서 깬 것처럼 새로운 아침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에 제 몸을 던진 이름 없는 시민들의 용기와 서러운 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한 맘으로 ‘평화’를 갈망했던 모든 이들의 기도와 또한 간절하고 진실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어둠이 사라지고 난 지금에 이르러 비로서 ‘평화’란 지켜내는 것임을, 그리고 총칼의 위협보다 강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숱한 세월 반복되었던 폭력의 시간속에서도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이, 피뿌린 민주주의의 정신이 어느새 이 만큼 우리 사회를 단단하게 키워낸 결과였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대림절 두번째 초에 불을 붙였습니다. 혹시 오지 못할 수도 있는 오늘입니다. 어둠이 짙던 그날 밤 절절하게 꿈꾸웠던 평화로운 그 아침이 펼쳐진 겁니다. 그러고보면 그까짓 ‘초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 있겠느냐?’던 세상의 비아냥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불을 피워낸 우리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둠은 사라졌고 불꽃은 오늘도 여전히 세상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두번째 초에 불을 부치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오늘도 주님께서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하면서 타오르는 사람들이 되라 보내신 ‘빛’이라 믿습니다.
2.
오늘 성서일과 말씀을 이끌어가는 인물들도 이런 빛을 위협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독서 구약 본문에는 ‘말라기’가 2독서 서신서는 ‘사도 바울’, 3독서인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소리내어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말하는’ 사람들로 보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 ‘소통’되지 않는 말, 그래서 일방적인 ‘외침’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것이었다면 충분히 실망하거나 낙담할 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외침은 멈추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먼저 ‘내일’을 가져오시는 하나님과 소통했던 사람들이었던 까닭입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는 이들과 달리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듣는 기쁨과 소망의 힘으로 단단하게 채워진 이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은 자신이 외쳐야 할 ‘메시지’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1독서의 책이름 ‘말라기’는 주님의 말씀을 외친 선지자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그 뜻은 ‘나의 사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 자체가 고스란히 ‘보냄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는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저 보낸 이의 말을 전할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세우셨다고 하는 이런 ‘자기인식’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구약에서 만나게 되는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말과 행동, 삶으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정체성의 근거는 주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혹시 ‘친위쿠테타’를 선동했던 어떤 이들처럼 자기 탐욕과 욕망에 붙들려 치욕의 이름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언자 ‘말라기’의 정체성은 ‘당신의 사람을 보내어 당신의 때를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외치던 그의 말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거짓과 기만, 선동으로 제 자신의 세상, 제 자신의 때만을 바라던 패악한 이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에 잇대어 있는 ‘예언자’는 언제나 ‘주님의 때’만을 말합니다. 예언자는 덧붙입니다. 그 날이 주님에 의해 임하게 되는 ‘심판’의 날’이라구요.
말라기는 ‘심판’의 날이 이르게 되면, 이 백성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연단되고 깨끗함을 입게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니까 이 날은, 불순물이 모두 벗겨지고 우리가 정금처럼 온전해지는 겁니다.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하는 일입니다.
3.
교회력에서 ‘가’해와 ‘나’해의 대림 기간에는 1독서 본문으로 ‘이사야’를 읽습니다. 실제로 오늘 ‘말라기’본문은 ‘이사야’ 40장과 내용이 무척 닮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의 메시지를 외쳤고, 그들의 정체성이었던 그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 오고 있는 ‘구원의 날’ 뿐임이 분명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서신서의 사도 바울도 ‘그 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정금처럼 온전’해질 것이라는 ‘말라기’의 예언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핵심은 ‘그날’ 자체가 아니라, 그 날을 가져오고 시작하고 마침내 이루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살고 있으면 되는 걸까요?
여기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말라기’가 전한 내용과 달라보이는 한 대목을 추가합니다. 주님의 구원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편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 이사야 40:3-4
그리고 나서야 비로서 주님의 날이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 이사야 40:5
그렇다면, ’말라기’는 왜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빼먹은 걸까요? 아니면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걸까요? 아닙니다. 사실은 이미 선지자 ‘말라기’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 말라기 3:1
‘이사야’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주께서 오실 길을 닦으라’고 했다면, ‘말라기’는 ‘우리’가 아니라 앞서 오실 ‘하나님의 사람’에 이해 그 길이 닦일 것이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분을 참으로 오랜 시간 기다려왔고, 또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앞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닦고 계신다면, 우리 또한 그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4.
구약 본문 뿐만 아니라, 복음서 말씀에도 또 다른 외치는 이가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지금껏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광야’에 머물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앞서 왔던 예언자들의 예언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될 그 날, 하나님이 보내실 그분의 때를 기다렸던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 ‘광야’였을까요? ’광야’는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의 전통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곳입니다. ‘광야’를 뜻하는 ‘미드바르’라는 단어가 ‘말씀’인 ‘다바르’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겁니다. 결국 인생을 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이후로, 그는 요단강 지역을 두루 다니며 외치기 시작했던 겁니다. 말씀은 반드시 외쳐져야 하고, 반드시 살아내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했던 메시지는 이미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이 민족의 가슴에 새겨졌던 예언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이사야 40:3
‘이사야’도 그렇고, ‘요한’도 동일하게 여전히 주님의 오실길을 맞이하고 싶은 이라면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고 준비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한계 많은 사람의 도움이나 준비 따위 없이도 자신의 능력만으로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실 수 있을텐데, 우리같은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한 것처럼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준비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의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사실 이런 말씀은, 그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구원’에 대한 인식과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겁니다. 이미 ‘본 회퍼’가 말했던 ‘값싼 은혜’로 전락해 버렸을 만큼,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예언자들의 말처럼 전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인 만큼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에 대한 앎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텐데, 여전히 우리는 구원이란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갈망하고 열심히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신앙적 열심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과는 무관한 신앙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열심,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열심으로 국가조찬기도회를 기웃거리고,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끔찍한 지경에 몰아넣은 이들을 축복해주는 일이 되었던 겁니다. 교우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영생’은 무엇이고, ‘부활’은 무엇이며, ‘구원’은 무엇인지, 아니 예수 따름의 길에서 ‘나’ 자신은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 혹은 ‘하나님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5.
성경은 ‘하나님’을 ‘뿌린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 땀흘리고 수고한 이들은 반드시 기쁨으로 거두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선지자’들이 통찰해 낸 하나님은 바로 그런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었던 겁니다. 패망했던 조국에 왕이 돌아오시는 것처럼 깨어진 우리 삶에 참된 주인이 임하시는 날을 맞기 위해서는, 포로됨에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시는 왕의 걸음에 걸맞는 ‘길’을 예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일이 ‘왕’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나라’잃은 우리가 ‘나라’를 찾는 길이고, ‘왕’을 잃은 우리가 ‘왕’을 얻는 길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만 하는 그 일,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의 길을 평탄게 하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 누가복음 3:3
세례자 ‘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남겼던 예언의 핵심,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탓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맞이하는 길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겁니다. 무엇으로부터의 ‘돌이킴’입니까? 그것은 지금껏 권위와 폭력과 부와 명예로 작동하는 세상을 따르던 걸음을 멈추고, 주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나라에 참여하는 길이며, ‘죽음’을 권세처럼 휘둘러 제 욕심을 채우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살리셨던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전향하는 겁니다. 그러나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회개’와 ‘돌이킴’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인생의 어디쯤을 걷고 있는지’, 내 지향이 하나님 나라를 관통하고 있는지 충실하게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후회나 반성만으로는 결코 주님의 날을 맞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날은, 탐욕으로 얼룩진 마음으로부터 돌이켜 은혜의 빛으로 자신을 닦아내는 이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나라가 이미 내게도 임하였다고 외치는 이들에게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6.
그 동안 우리는 이 땅을 피로 물들였던 ‘죽음’의 공포가 벌써 끝장났다고 안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주님께서 ‘더러운 귀신’이라고 꾸짖으셨던 ‘광기’에 사로잡힌 ‘죽음의 망령’이 우리의 시대에 총칼을 들이대며 여전히 활개치는 참혹한 장면을 모두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의해 쫓겨났던 망령들은 지금껏 어디에 숨어있었던 것일까요? 그것들은 다름 아닌, 탐욕과 광기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에 기생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파괴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으려드는 더러운 영들은 또다시 흔들거리는 영혼에 숨어들겁니다. 그리고 언제고 기회만 된다면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처럼 기도하며 늘 깨어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지나온 걸음 지워지지 않고 남겨진 숱한 우리의 선택들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허물과 과오를 그저 없던 일처럼 덮는 것이 아닙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우리는 이런 패악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왜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할 만큼 분별이 없고 어리석었던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난 주간 죽음의 공포로 사람들을 몰아 넣었던 이 사태를 부추겼거나 초래했던 이들이 누구였는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만 합니다. ‘회개’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날이 임하듯, ‘평화’의 날은 이런 이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어둠에 굴복하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의 걸음을 통해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빛’을 들고 ‘어둠’을 밝혀야 하는 것임을 배워왔고, 그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냈습니다.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우리들, ‘교회’의 차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엿보고, ‘하나님의 날’을 외치는 이들이라면, 이 메시지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되지 못했던 지난 삶으로부터 ‘회개’해야만 합니다. 차별과 소외로 내몰리는 연약한 이들을 외면하고 권력앞에 굽신 거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던 추악한 신앙, ‘우상숭배’야 말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임을 알면서도 ‘무당’이라도 괜찮다고 말하던 패악한 신앙을,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종말이 아닌 현세의 평안과 안락에 취해있던 게으른 신앙으로부터 돌이켜야만 합니다. ‘돈’은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며, ‘권력’은 ‘인애’와 ‘자비’를 흘려보내고 ‘공의’와 정의’를 지켜내는 도구임을 드러내는 존재로 우리가 세워질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길 삼아 세상에 임하실 겁니다.
교우 여러분, 불법과 불의한 세력에 의해 빛이 꺼져가는 것 같고 오히려 어둠이 짙어보인다고 해도, 여전히 주님의 날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걸음은 힘차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회개의 초’를 밝히십시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밝히는 일에 게을리지 하지 않는다면, ‘어둠’은 결코 틈타지 못할 거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게 될 길을 밝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밝히는 일에 마음을 담으십시오. 어둠속에서도 빛으로 자신을 밝히고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삶을 찾아내실 겁니다.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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