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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2 대림절 넷째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2. 18. 14:1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미가서 5:2-5a
응송 | 누가복음 1:46b-55
2독서 | 히브리서 10:5-10
3독서 | 누가복음 1:39-45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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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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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Tissot (Nantes, France, 1836–1902, Chenecey–Buillon, France). The Magnificat (Le magnificat), 1886–1894.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실 분
1.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해의 시간이 어느덧 끝자락에 걸쳤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대림절기의 바쁜 걸음속에서 숨가쁘게 지나쳤던 ‘계엄’과 ‘탄핵’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어둠과 빛을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유튜브나 sns를 통해 생산되고 전파되는 상업적 공포에 내몰려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지도 모를 극단적 선택에 주점함 없는 이들 덕분에, 타협하고 설득하며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 가치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위기의 상황마다 지켜야 할 것을 위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용감한 시민들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내일은 희망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오늘은 언제나 어떤 이들의 눈물과 희생의 터위에 세워진 것임을 부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모두가 그런 사람들처럼 신속하고 용기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두려움과 절망에 내몰려 쭈볏거리거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채 우물쭈물하게 됩니다. 때로는 ‘현실성’이라는 명분을 들며 짐짓 눈을 감는 비겁함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앞서 걸어가는 이들’의 선택과 삶이란 것이 언제나 뒤 따르는 우들에게 용기와 희망만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칫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섣부른 행동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함께 발맞추며 나아가지 못했던 비겁한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런다고 뭐가 바뀌느냐?’ 어리석음을 타박하기도 합니다. 비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똑같은 이런식의 물음 앞에 답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자칫 오지 않을 내일일지도 모른다는 염려 앞에 분명한 해답도 내놓지 못하면서도, 대체 우리는 오늘 무엇 때문에, 현실의 안정된 삶을 거슬러야 할지도 모를 이런 위험천만한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2.
구약 1독서 본문은 선지자 ‘미가’가 전했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8세기 무렵입니다. ‘미가’는 조국 ‘유다’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그 무렵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강대국 애굽과 앗수르, 아람 그리고 신바벨론에 이르기까지, 패권을 놓고 다툼하던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던 불안정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상황은 ‘미가’가 유다 종말을 외쳤던 근본적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의 눈에 들어온 필멸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유다 사회의 불법과 타락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미가서 2장과 3장 사이에 고스란히 그려지고 있습니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 | 미가 2:2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그 땅에서 가난한 이들은 결국 ‘노예’와 같은 형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정의’를 세우고 ‘불법’을 가로막아야 할 지도자들은 오히려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는 세상입니다.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한다. 너희는 내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 너희는 내 백성을 잡아 먹는다. 가죽을 벗기고, 뼈를 산산조각 바수고, 고기를 삶듯이, 내 백성을 가마솥에 넣고 삶는다.’ | 미가 3:2-3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척합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런 외식한 신앙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꾸짖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악행이 깊어질 수록 하나님은 도리어 얼굴을 감추실 겁니다. (3:4) 그런데 선지자와 함께 불의한 세상을 향해 엄히 꾸짖고 하나님의 뜻을 쫓도록 가르쳐야 할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상이 더 심각했습니다. ‘미가’선지자가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외쳤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미가 3:11
깨끗한 것일 수록 쉽게 더러워지고, 거룩한 것일 수록 타락하면 더욱 추해지는 법입니다. ‘빛’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타락하자,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가득찬 무법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외쳐야 했던 때입니다.
3.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조국 유다가 사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모두가 다함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만 삽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의 예언자들이 말한다. '너희는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아라. 이 모든 재앙을 두고 예언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우리를 망신시키실 리가 없다.’ | 미가 2:6
그는 오히려 군중들에 의해 침묵을 강요받았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 떨어져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조차 눈치채지 못하던 때에도,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보고 듣던 선지자의 속만 새카맣게 타들어갑니다.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이런 지경인데도, 그는 어떻게 포기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외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게 혼자서 주님의 뜻을 쫓고 열심히 외친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결국은 스러지고 상하고 깨어지는 혼자만 바보가 되는 의미없는 길을 왜 그토록 고집했던 걸까요?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미가 5:2
우리의 질문에 ‘미가’는 ‘예수’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읽혀지는 이 본문으로 답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 해답을 찾으셨나요? ‘베들레헴’은 변방의 아주 작은 성읍이고, ‘에브라다’는 아주 작은 부족의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농촌의 부족을 통해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이 아닌 그런 곳에서 메시아가 오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해도 특사를 파견할 때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도록 겉치레에 신경을 쓸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니라고는 해도 우리도 으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려는 유혹에 쉽게 떨어집니다. 이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못난 본성,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미가’의 예언은,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당신의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메시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장 희망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두 똑같은데, 오직 ‘하나님’만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지어는 제사장이나 예언자들까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타락했으니, 당시에 ‘선지자’의 눈에는 그저 조국 ‘유다’의 운명은 절망 그자체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입니다. 비로서 선지자 ‘미가’의 눈에는 참된 소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빛이 바로 그것입니다.
4.
대림 네번째 주일 응송과 복음서 말씀은 모두 ‘누가복음’에서 읽습니다. 응송은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우는 누가복음 1장47~55절이고, 복음서 말씀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영접하는 장면인 1장39~45절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로 불리는 그 노래를 ‘마리아’가 실제로 불렀는지 아닌지, 처녀 잉태가 사실인지 아닌지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예수’ 수태와 관련된 본문의 말씀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더 확장시켜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가’가 신앙 공동체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교회가 ‘마리아’의 이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 또한 ‘마리아’의 노래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으로 함께 고백하며 읽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리아’의 노래는 그저 이천년 전의 기록일 뿐, 오늘의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마리아’의 신앙고백은 무엇일까요? 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초기 교회가,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함께 그 고백을 신앙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 걸까요?
첫번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49, 51절), 두번째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권세 있는 이들을 그들의 권좌에서 내칠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52절)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천년 전의 ‘마리아’나 일 세기 교회 공동체와 오늘의 우리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은, 절절하게 실감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리아’ 개인의 상황이나, 박해와 환란에 내몰려 있는 ‘교회 공동체’의 형편은 언제 꺼질지 모를 바람앞의 등불이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린 상한 갈대와 같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처했던 형편처럼, 한줌의 빛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를 지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의 빛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믿어서 상황이 바뀌고, 삶이 나아질 수는 있는 것인지, 또는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 밖에는 없다는 ‘절박’함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신앙’은 한가한 이야기도, 그럴 듯한 종교행위도 아닙니다. 그저 제 인생과 운명을 구원해낼 하나 뿐인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 ‘절박성’의 여부를 ‘간절함’으로 오해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절박성’의 핵심은 나 자신이 무언가를 얼마나 바라는지, 정성을 다하고는 있는지의 차원이 아니라, 이것 밖에는 없다는 절망과 안타까움에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과연, 오늘의 우리가 이런 절박함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을까요?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기다림은 또 얼마나 ‘절박’한 소망인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선지자 ‘미가’가 외쳤던 ‘정의’와 ‘공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세상이 올까요? ‘마리아’가 노래했듯, 언젠가 또 누군가 세상의 권세 있는 이들을 내치고 구원의 날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요? 참담한 사건을 통해 ‘정권’이 또 무너졌습니다. 이제 절차에 따라 국민의 염원을 안고 다음 정권이 탄생하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이 땅이 모두가 행복한 ‘천국’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런 세상이 오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결단이나 헌신과 용기가 다 소용없는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길이 있다면, 그런 길을 선택하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오신 ‘메시아’인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기대나 희망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 비루한 세계의 절망을 초래하는 것이 ‘죄’와 ‘죽음’ 때문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삶의 지향을 이 한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 10:7, 9
저는 지금껏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구원 사건’외에, 폭력적인 ‘역사’안에 던져진 허무한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그리고 언제까지나 ‘예수’을 주목할 뿐입니다. 그분만을 인생과 삶의 근원적 능력임을 믿으며, 날마다 희망의 이야기로 인생을 채워나갈 겁니다. 비록 어둠이 찾아올 수도 있고 여전히 제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우왁스러운 날들도 찾아오겠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힘껏 싸우며 나아갈 겁니다. 당신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안에서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제게 그분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께 당신 자신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대림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곧,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성탄절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와 고백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어야 하듯, 이 대림절의 기간과 성탄절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라던 주님처럼, 하나님께 우리 각자의 운명을 맡기고, 그분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며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James Tissot (Nantes, France, 1836–1902, Chenecey–Buillon, France). The Visitation (La visitation), 1886–1894. 눈을 감으면, 지금도 어린 소녀 ‘마리아’와 그녀를 영접했던 ‘엘리사벳’의 만남의 장면이 선합니다. 그녀들의 삶은 얼마나 두렵고 서러웠을까요? 신음하듯 힘겹게 살아온 날들, 그러나 또한 소망의 빛 한줌도 보이지 않는 인생은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어린 ‘마리아’를 끌어안고 찬미하던 ‘엘리사벳’의 고백은 혹시 한 많은 여인의 삶에 발을 내딛는 어린 소녀를 향한 ‘동병상련’의 아픔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운명을 맡기고 척박한 세상안에서 서로의 위로가 되어주었던 그녀들의 인생을, 세상의 모든 여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걸음으로, 또한 세상을 복되게 하는 통로로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들에게도 ‘구원’의 소망이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그녀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넉넉한 구원의 빛이 되어주실 겁니다. 매서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움츠려 들지 마십시오. ‘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어둠이 짙습니다. 그러나 눈을 크게 뜨십시오. ‘빛’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암울한 현실에 낙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되시는,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밤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갈망과 희망도 절박해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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