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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5 성탄축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2. 25. 09:2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9:2~7
응송 | 시편 96
2독서 | 디도서 2:11~14
3독서 | 누가복음 2:1~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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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만테냐, '목동들의 경배'. (1456) (이미지 출처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01
늘 우울한 소식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 실망과 좌절로 얼룩지는 삶에 지쳐가던 이 땅에, 하늘로부터 큰 기쁨의 좋은소식이 찾아왔습니다. 인생이란 절망이 아닌 소망이며, 세상은 살만하다는 하나님만 가져다 주실 수 있는 놀라운 구원의 소식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을 통해, 오랜 기다림에 지친 우리 모두에게도 하늘의 큰 기쁨이 임하고, 그것을 실감하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복음서 말씀인 누가복음 (2:1~14)의 첫번째 단락은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요셉과 아내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출산이 임박한 채로,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서 호적을 신고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생긴 일입니다. 두번째 단락은 이렇게 태어났던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사실 아이를 출산했다는 것이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엄청난 사건이겠지만, 그밤 ‘생명’이 태어났다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세상은 남 이야기 듣듯 무관심하기만 합니다. 목자들의 이야기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말씀으로 읽고 있지만, 오늘도 삶에 내몰려 있는 이런 형편의 사람들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주 작은 이야기들 안에,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벼이 지나치고, 모른 채 지나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실망했던, 우리의 삶안에도, 지금!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02
모두가 평안히 쉼을 가지던 그 밤에도 양을 지키며 들녘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던 ‘목자’들의 형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전혀 낭만적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어쩌면 그날의 목자들은, 오늘 밤을 지새우며 배달을 마쳐야 하는 택배원일 수도 있고, 이 기회를 놓치면 끝일지도 모르다는 조급함에 내몰린 비정규직 직원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먼 타국 땅에서 서러운 밤을 지새우고 있을 외국인 노동자들, 서러운 차별에 내몰려 있는 우리의 아들 딸의 형편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주의 사자’가 그들을 찾아왔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췄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되는 걸까요?
그러나 그런 식의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신분이 바뀌고, 삶이 극복되는 일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복음서 말씀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들의 인생이 뒤바뀌는 ‘복’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업쑤이 여기고 가벼이 지나쳐버리고 무관심한 그런 이들의 삶과 이야기안에, 하늘로부터 임하는 낯설고 놀라운 은총의 빛이 베어 있다는 비밀,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이들이라는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그 말은 옳습니다. 지나고 있는 동안에는 힘겹고 고통스럽게만 보이던 시간들이었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하나님이 그때 함께 하셨구나’라고 고백하게 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바로 그 순간이야 말로 오늘 목자들이 ‘천사’를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서가 소개하는 ‘목자’들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십시오. 시덥지 않게만 보였던 똑같은 일상에서 느닷없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그런 낯설고 신비로운 장면을 마주하게 될른지도 모릅니다.
#03
그런데 ‘누가’는 천사를 목격한 목자들이 무서워했다고 말했지요? 이건 그만큼 당혹스럽고 놀라운 일이었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나서 목자들은 천사가 전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 ‘소리’안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누가복음 2:10-11
여기에서 천사가 말했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로 오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라는 대목입니다. 예수로 인해 구원받는 기쁨이 어떤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이르기까지,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불신에 떨어지게 될 날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라는 말씀은, 그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우리의 구원이 되어주신다는 약속이 됩니다.
이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액면 그대로,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라는 이 말씀을, 예수를 믿는 ‘우리’로 제한하려고만 듭니다. ‘선택’을 하든 ‘선택’을 받든, 자기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고 ‘율법’을 통해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일에만 열심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이나 자신들이 ‘율법’을 기준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었던 다른 사람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들만 선택받은 백성, 복받은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04
그러나 마치 태양이 선한 사람이나 악인이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아니나 모두에게 똑같이 빛을 전해주듯, 적어도 예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은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15:11 이하 집나간 둘째 아들의 이야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하고 폐륜적이었던 둘째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보다는 ‘자신’들의 특권이 깨어졌다는 생각이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상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인간이 나올 수 있느냐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앞선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속의 아버지가 모범적인 큰아들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폐륜아인 둘째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두셨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복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기자는 오늘 예수 사건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05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보다 훨씬 더 심하게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구원을 훼손하고 심지어 부인하려 듭니다. 돌이키지 않는 한 ‘동성애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내몹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불평등’한 대접을 받을수 있으니 ‘차별금지법’을 반대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슬람 같은 타종교나 타문화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배타적이며, ‘좌파’,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마치, 나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 듯한 근거를 늘어놓는다거나, 좋게 보려고 해도 이런 식의 ‘복음’이 오늘 성경이 전하고 있는 ‘온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한국 교회에 의해 ‘죄인’이라고 핀잔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이런 복음이 ‘좋은 소식’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에만 익숙한 탓인지, 너희에게 문제가 있다고만 할 뿐 이런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복음’이고 ‘우리’에게는 ‘복음’인데, ‘너’에게도 ‘복음’인 것을 좋은 소식으로 듣질 않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 받은 ‘복음’의 전통안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어떤 이들’을 소외하고 배제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게 된 걸까요?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예수께서 절대로 그런 이들을 용납해주실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헤아리고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 복음’이 온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된 소식이 되는 길은 간단합니다. 다름으로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똑같은 ‘존재’로서 존중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모두에게 ‘복음’이 되기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은 어떤 단서나 조건을 달아서도 않된다는 겁니다. 그건 그저 우리의 입장이고, 우리의 욕심이고, 우리의 선택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 주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 동안 우리 자신을 이루어온 생각과 가치관이 두텁게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하고 다른 어떤 기준보다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사건’,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기준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명 사건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에 ‘아멘’이 될 때만 비로서 ‘복음’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복된 소식이 되고,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참으로 세상을 ‘평화’하게 하는 하늘의 능력으로 경험될 겁니다.
#06
다시 말씀드리지만, ‘온 백성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하늘로부터 임한 소식이며, 그것은 곧장 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느냐 못하는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다른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하는지, 또 나는 얼마나 잘해냈는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늘상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경험’만이 모든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돌이키라고 요청하시고, 스스로의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향한 그런 삶으로 나아가셨던 ‘십자가’와 ‘부활’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실감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세상의 한계를 통렬하게 실감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늘의 소식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만족하는 것들, 심지어는 열심과 열정에만 몰두하게 되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더 어려워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온통 자기 자신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교회안의 신앙 조차도, 시쳇말로 ‘업적’을 쌓고 자신의 신앙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는 가깝고, 자기 자신에게는 마음을 쏟지만 정작 하나님과 가까워질 기회는 작아져 갈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목자’들에게 하늘의 소식이 들렸다는 본문의 말씀을 주목해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삶에 대한 절망에 내몰린 사람들, 자기 자신안에서는 어떤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어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치명적인 외로움에 내몰리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경험할 수만 있다면, 그런 인생이야 말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런 기쁨 충만한 삶이 보장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시나요? 여러분의 일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사실로 경험하고 계시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을 통해 그런 복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하늘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어떤 거룩한 곳을 찾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각자가 지나고 있는 일상의 삶, 그렇게 볼품없어 보이고, 그렇게 힘겹고, 그렇게 서럽고, 그렇게 외롭던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찾는 겁니다. ‘두드려라’던 주님의 말씀은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분명히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열리기는 하겠느냐?’ 실망하고 돌아서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사실임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 한, 반드시 그 문은 열릴 겁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롭고 고독했던 깊은 밤을 밖에서 지세워야만 했던 목자들은 ‘복음’의 소식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을 성서 기자는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라고 말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이제는 큰 기쁨으로 충만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해의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주님의 은총으로 인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소망과 기쁨과 평화로 가득했던 그들처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을 충만한 기쁨안에서 살아갑시다. 목자들을 통해 큰 기쁨의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졌듯, 우리의 삶을 통해 소외와 차별과 고독 가운데 던져진 온 땅의 사람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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