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4/12/29 성탄후 1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2. 28. 11:0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무엘기상 2:18-20, 26

      응송 | 시편 148

    2독서 | 골로새서 3:12-17

     3독서 | 누가복음 2:41-52

     

    # 설교음원

    http://naver.me/xDJ9TrdS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2j1dOVk4NY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사람'으로

     

    1.

    오늘은 2024년 쉰 두번째 주일, 그러니까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설레임으로 맞이했던 첫 주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일이라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또다시 실감하게 됩니다. 올 한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대만큼 사정이 좋았던 것도 아닌데, 힘겨워 포기하고 싶던 때도 많았을 텐데, 그때마다 또다시 ‘믿음’으로 내디뎠던 기특한 용기와, 눈물 뿌리며 걸어온 수고 위에 다함이 없는 주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지난 한해, 여러분이 걸어온 시간은 어떤 빛깔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진 흐린 날로 혹은 사나운 폭풍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겨우 겨우 아침을 맞았던 힘겨운 시간으로 기억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화창한 봄날처럼 따듯하고 풍성했던 기억 때문에 기분 좋은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게 되는 걸까요? 우리 시대는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인생을 결국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또 남겼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평가하려 듭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셈법에 휘둘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나는 신앙인입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이, 나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을 믿는 ‘시선’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면, 더욱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기준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늘 비교와 경쟁으로 작동하는 세상속에서,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불행하고 불우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순간적으로 우리의 시선이 제일 먼저 닿는 것은 기대와 달리, 얼굴이 잘생겼는지 아닌지, 표정이 밝은지 아닌지가 아닌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의 행색이나 옷매무새, 그리고 ‘분위기’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무의식중에 자신 앞에 있는 낯선 이방인의 정체에 대한 첫번째 그러나 쉽게 바뀌지 않을 판단을 갖게 됩니다. ‘목사님 같으세요, 혹시 선생님이신가요?’ 같은 말을 건내거나, 심지어는 선해 보인다거나 착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만났던 상대의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지만, 그날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 모양은 어떠했는지 같은 행색과 분위기는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품게되는 첫인상은 어쩌면 세상을 향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옷’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첫 인상이 언제나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고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면 어느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 첫 인상과 다른 모습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첫인상으로 보여졌던 상대가 입고 있던 겉모습이, 덮고 있는 내면과 일치하지 않은 탓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입고 있는 ‘옷’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난 2024년 한해를 다시 한번 평가해볼까요? 우리는 지난 한해 어떤 옷을 입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과연 그 옷에 걸맞게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2.

    오늘 1독서 구약 본문은 ‘사무엘’기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한나’가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아이가 ‘사무엘’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드리겠다던 약속대로, 자신의 아들을 성전에 바쳤고, 그래서 ‘사무엘’은 ‘성전’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12살이 되어야 비로서 성전에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가 12세는 지났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 시작부터, 무척 특별한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한편, 어린 사무엘은, 모시 에봇을 입고 주님을 섬겼다.’ | 사무엘상 2:18

     

    그의 나이가 몇살이었는지는 그가 ‘에봇’을 입고 있었다는 것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색실로 만든 화려한 에봇을 입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반 제사장들은 ‘세마포’로 만든 ‘에봇’을 입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에봇’은 제사장들의 의복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사장으로 봉사할 수 있는 연령은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봉사할 이들이 부족할 때에는 20, 25세까지 낮아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30세에서 50세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이 ‘에봇’을 입고 있었다는 것은 영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물론 당시에 대제사장 ‘엘리’가 버젓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린 ‘사무엘’에게 ‘에봇’을 입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이건 나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걸맞는 사람이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성서기자의 특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 사무엘상 4:18

     

    이 말씀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그만 전쟁에도 패하고 하나님의 궤까지 빼앗기는 사태가 일어났던 당시에 ‘엘리’ 제사장에 대한 성서기자의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제사장으로서 ‘에봇’을 입고 있는 것은 ‘엘리’였지만, 이미 그는 제사장의 옷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옷에 걸맞는 사람이라는 걸까요?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결국 어떤 옷을 입느냐 보다는 그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제사장의 ‘에봇’을 입었는지가 아니라, 그런 직임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 다운지가 더 중요한 겁니다. 제사장은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만’을 높인다면 다른 그 누구도 ‘높은 사람’이라는 지위나 이름을 가져서는 않됩니다. 거기에는 자기 자신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하나님만을 높이는 제사장의 옷에 걸맞는 사람인지는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거나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으려 든다거나, 혹은 반대로 다른 사람들을 업쑤이 여긴다면, 그는 ‘제사장’의 옷에 걸맞지 않은 사람일 뿐입니다. 바로 다음장인 사무엘상 3장의 사건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납작 업드리는 사람, 주님께 듣고자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야 말로 ‘에봇’에 걸맞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옷이 ‘사무엘’에게로 넘어간 것 뿐입니다. 

    으레 제 몫의 옷에 자족하는 법을 모른 채, 남의 옷만을 부러워들 하지만, 어떤 ‘옷’을 가질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 몫 만큼의 ‘옷’에 걸맞는 사람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3.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갔던 이야기안에서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던 ‘예수’의 삶의 지향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됩니다.

    구약 전통에 따르면, 유대인 특히 ‘남성’은 과월절, 맥추절, 추수절 이 세가지 명절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국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전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성전’을 찾는 것이 예루살렘 부근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에게는 이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 뿐만 아니라 감당해야 할 비용부담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한번 큰 마음을 먹고 순례길을 나서게 되면 그참에 아이들의 성인식도 몰아서 함께 치루는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합니다. 유대 전통에 남자 아이가 ‘성인’식을 치루게 되는 나이는 13살입니다. 13세가 되어야 비로서 ‘하나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탓입니다. 아마도 12살이 되었던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까닭도, 내년이면 ‘성인식’을 치루어야 할 예수를 위한 사전 교육차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유독 13세를 ‘하나님과 하나’되는 나이로 생각한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 또는 ‘한 몸’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하드’(אחד)를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로 풀어보면 알레프(א) 1, 헤트 (ח) 8, 달레트 (ד) 4이고 이 숫자를 다 합치면 13이 되기 때문에, 13세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나이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해했을까요? ‘성인식’을 마치게 되면, 그날 ‘성인’으로 받아들여진 아이는 회중앞에서 말씀인 ‘토라’ 두루마리를 펴서 읽게 됩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이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율법의 가르침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여튼 유대인들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부모의 보호와 양육 아래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존재에서,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 말씀과 동행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독립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가’는 오늘 성전 순례길의 결론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 누가복음 2:52

     

    이제부터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를 붙들고 예수는 하나님안에서 자라가게 될 겁니다.

     

    4.

    서신서 말씀인 ‘골로새서’는 다시금 ‘옷’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것은 마땅히 ‘교회’가 입어야만 하는 그런 옷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 골로새서 3:12

     

    그것은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참음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의 ‘옷’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로서 존재하는 한 누구라도 예외 없이 이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옷’이라는 것은 입기 전에는 그저 ‘옷’일 뿐이지만, 입는 순간 ‘옷’의 의미는 사라지고 이런 옷을 입은 사람, 저런 옷을 입은 사람과 같이 ‘옷’을 걸쳐 입은 사람만 남게 됩니다. 게다가 이 옷은 한번 입고서 싫증난다고 다시 벗을 수도 없는 ‘옷’입니다. 어찌해서든 ‘바울’이 말했던 이 다섯 가지의 성품을 내 옷처럼 자연스레 입어보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는 애당초 동정, 친절, 겸손, 온유, 오래참음 같은 그런 옷은 입지도 않았던 것처럼 헐벗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 로마서 13:14

     

    ‘바울’은 또 다른 편지인 ‘로마서’에서 자신이 말하고 있는 ‘신자’가 입어야 할 ‘옷’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를 입으라’는 이런 식의 말도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누군가 입던 옷을 가져다 입는다면 몰라도, 사람 자체를 입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과연 기독교 이천년 역사 안에서 교회는 어떻게 ‘예수’를 입었던 걸까요? ‘공동번역’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옷 입고’라는 부분을 ‘마음을 새롭게 하여’라는 번역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내는 외적인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달리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는 일입니다. 결국 공동번역처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읽든, 아니면 원문처럼 ‘옷’입는 것으로 읽든 결국은 ‘같은 생각’, ‘같은 가치관’을 가진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그런 ‘옷’을 입은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옷 입는다’는 것은 종교적 의례를 따르거나 흉내를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의 생각과 가치관, 하나님 나라를 향하던 그의 마음과 일치성을 경험해 가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5.

    ‘바울’은 ‘교회’는 ‘한 몸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다른 공동체였고, 또 달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공동체’라는 차별성은, 이전까지 입어 본적 없는 전혀 새로운 옷을 입을 때만 확보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입어야 할 그 옷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할 때만 ‘교회’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를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교양을 쌓고, 많은 업적을 이루거나, 배움이 크다고 해서 ‘거룩한’ 즉 ‘하기오스’(γιος)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 우리들이야 말로 ‘성도’ 즉 ‘하기오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내고, 어떤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기오스’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인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이 말했던 그런 다섯가지 성품을 이루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로 부름을 받았고 오늘도 ‘성도’인 까닭, 그렇게 존재가 변화된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일에 온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 ’교회’는 늘 그런 공동체여야만 하고, ‘성도’는 늘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는다면 정말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 놓일지라도,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당신의 운명을 우리에게 이미 벗겨낼 수 없는 옷으로 내어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라는 그 사실 말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 누가복음 2:52

     

    예수를 덮고 있는 ‘옷’처럼, 예수를 자라게 하셨던 것은 그와 하나되셨던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생각과, 가치와 길을 따라 일치를 이루어가십시오.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우리가 그분과의 일치안에 머무는 한, 하나님께서 예수께 그리하셨듯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옷이 우리를 그 옷에 걸맞는 사람, 거룩한 성도로 성장할 수 있도록 넉넉히 도울 겁니다. 아멘.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1/05 성탄후 두번째 주일 * 신년주일  (0) 2025.01.03
    24/12/31 송구영신  (1) 2024.12.30
    24/12/25 성탄축일  (2) 2024.12.25
    24/12/22 대림절 넷째주  (0) 2024.12.18
    24/12/15 대림절 셋째주일  (2) 2024.12.12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