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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31 송구영신성서의 거울 앞에 2024. 12. 30. 22:10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전도서 3:1~13
응송 | 시편 8
2독서 | 요한계시록 21:1~6a
3독서 | 마태복음 25:31~46
# 설교음원
http://naver.me/FDnSzDIF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OUrPrnf1bDM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
'영원'한 '생명'의 시간을 지나며
1.
우리는 지금 2024년 마지막 순간에 서 있습니다. 어느새 마지막 날입니다.
올 한해를 어떻게 보냈든, 그러니까 한해를 부지런히 잘 살아왔든 아니면 쫓기듯 정신없이 살아왔든,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이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2024년의 이 마지막 날이 올 것임을 몰랐던 사람은 없겠지만, 한 해를 마치게 되는 이 날이 있음을 실감하면서 매일을 살아온 분은 없을 겁니다. 그랬더라면 지금 이 순간 남아 있는 아쉬움이나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아쉬움을 매년 반복해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년 이 맘 때 즈음에도 우리는 똑같은 아쉬움과 후회를 반복할른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을 돌아본다면 그럴 개연성이 크다는 것은 거의 분명할 겁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잘 잊는 걸까요? 왜 그렇게 실수를 통해 배운 것을 기억해내지 못한 채 다시금 후회 앞에 서게 되는 걸까요?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시간’의 엄중함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시간’이 늘상 우리에게 ‘도적’ 같이 찾아오는 것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오고 있지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그런 날은 전혀 오지 않을 것처럼 쉽게 흘려버리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오늘 2024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온 세상과 우리 자신의 운명 전체의 시간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듣고 깨달음이 있고, 깨달은 말씀이 실감나는 현실로 이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2.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입니다 본문은 세개의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단락인 1~13절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단락인 14~30절은 달란트 비유 이야기가, 마지막 세번째 단락인 31 ~ 41절에는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세개의 비유는 모두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구별하시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의 결론은 마지막 46절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25:46
아마도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지실 겁니다. 혹시라도 ‘영벌’에 들어가는 것이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본문은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 비교적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만큼 아득한 이런 운명을 나누게 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작은 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제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어려움에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는 ‘굶주림’, ‘목마름’, ‘헐벗음’, ‘병듦’, ‘옥에 갇힘’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종말이 오기 전,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갔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작은 자’들을 돌 본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고, 이런 이들을 외면한 사람들은 ‘영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막연하게 ‘예수 믿으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하던 우리의 믿음이 송두리째 부인되는 기분입니다.
갑자기 믿음도 신앙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렵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심판자이신 주님을 대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을 뿐입니다.
3.
또 있습니다. ‘작은 자’들을 돌봐준 사람들이나, 외면한 사람들이나 똑같이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 마태복음 25장 37- 39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의인도, 악인도 모두 똑같이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 각자가 처해야 할 운명은 완전히 정반대로 갈라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한가지 뿐입니다. 대체 작은 자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마태복음 25:40
주님은 왜, ‘작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휴머니즘’ 가득한 세상을 만들라는 말씀일까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굳이 ‘복음’을 믿고 따라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친절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작은 자들을 돌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리는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아무리 돌보아도 가난한 이들을 부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행스럽게 당장의 가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질병’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4.
사실 끊임없이 ‘작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는 늘상 큰 자가 되고 싶고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에 휘둘린 채 살아갑니다. 그런 삶이 결국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런 삶이 결국은 나 자신의 인생을 가난하고 못나고 작은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지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결국 모두가 괴롭고 힘겹고 서러울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더 나아질 조짐이 보이질 않습니다. ‘오늘’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또다시 ‘어제’의 선택을 반복해왔던 것처럼, 늘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내일’이라고 달라질리는 없습니다. 세상이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태국을 떠나 무안으로 돌아오던 항공기가 추락하는 참사가 벌어졌고,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희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결국은 ‘인재’(人災)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런 사회적 참사가 한 두번이 아니었고 모두가 책임을 통감하고 그때마다 재발방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이런 식의 사고는 막을 수 있어야 마땅할 텐데, 그 마땅한 일이 너무나 아득하게만 보입니다. 대체, 이런 우리에게 다른 희망이 있기는 할까요?
‘성경’은 이런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우리가 자유를 얻을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힐 걱정을 하지 않는 세상, 죽음이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 오는 것 말입니다. 오늘 주어진 복음서 말씀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모든 가능성이 처절하게 무너진 삶의 현실 앞에 선 이들에게만 본문의 ‘말씀’은 비로서 해방의 기쁨으로 실감날 수 있습니다. 만약 거대한 혜성이 지구로 향하고 있는데, 충돌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이 상황에서 ‘구원’은 그저 혜성이 빗겨나가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나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차원의 세상이 열리는 그날에만 비로서 온전한 자유와 해방,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이 드러나는 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5.
오늘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일어나게 될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했던 작고 사소한 일들이, 그 날에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반대로 대단한 사람들 곁에서 스스로를 높이는 일에 몰두하고 또 그것들을 성취하는 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그 날에는 부끄러움을 당할 만큼 무가치한 일이 될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차원의 주님의 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궁극적인 사태가 눈에 들어오는 사람, 그러니까 영적인 시야가 틔인 사람들이라면, 사람을 대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일속에서도 ‘영생’을 실감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지금껏 먹고 살기 바쁜 시간속에서 ‘오늘’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처럼, 마지막 날, 그러니까 영생과 영벌에 대한 이런 식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영원한 생명’인 ‘영생’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해도, ‘영생’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여전히 병들고, 여전히 죽음이 가득해 보입니다. 그런 현실속에서 염려나 두려움, 외로움과 허무에 휘둘립니다. 당연합니다. ’영생’이 아직은 우리 삶에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문제들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주님의 날이 오는 날까지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안에서 기억해야할 것은 분명합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라는 것이 곧 도적같이 끝나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영벌이나 영생이 이미 그리고 벌써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말입니다.
6.
염려, 근심, 외로움과 두려움, 죽음의 힘에 내몰리지 않는 온전한 생명인 ‘영생’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세상입니다. 여전히 한해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쉬움과 후회를 떨쳐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 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작고 볼품없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 후회와 아쉬움이 남아 있는 삶일지라도 그 안에서 ‘영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빛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이 무엇인지를 이미 엿보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응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의 엄중함과 그 앞에서 한 없이 작고 연약한 우리 자신의 실존 앞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태에 눈을 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증인들의 증언에 잇대어 그들의 걸음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사도들이, 그들로부터 배우고 익힌 초기 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했듯, ‘증인’들의 경험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맛보았고 그로부터 ‘영혼의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죄와 죽음에 의해 삶이 파괴될 수 밖에는 현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겁니다. 그런 눈이 열리고 나서,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와 같은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와 환란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자’의 신세로 떨어지는 것에 전전긍긍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작은 자’를 어떻게 돌 볼 것인지도, 어떻게 해야 ‘작은 자’의 신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인지가 아니라, ‘작은 자’가 되는 것을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되는 ‘자유’를 얻는 경험, 그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경험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안타깝지만 2024년은 이제 우리의 손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아쉬움이 있더라도, 후회가 남아 있더라도 그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뿐입니다. 이제 주님이 가져다 주시는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야만 하는 것은 이 한가지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이루시고 기꺼이 우리에게 그런 생명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본질적으로 ‘작은 자’나 ‘큰 자’의 차이를 부추기는 조건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 더 놀랍고, 기쁜 것,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영생’의 능력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 믿음, 이 말씀에 잇대어 살아갈 수 있는 눈을 열어달라고 구하십시오.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는 주님안에서 걸어간다면, 2025년 365일의 매 순간은, ‘영생’안에서 살아가는 기적같은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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