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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30 성령강림주일 2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6. 10. 30. 22:15
2016/ 10/ 30 성령강림주일 24주 ( 종교개혁주일 )
본문 - 누가복음 19:1 ~ 10 https://youtu.be/2VhbIkskXo8 - 클릭하시면 설교 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진짜 삭개오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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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여리고에 이르신 예수의 행적중에 발생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본래 고대로부터 종려나무의 숲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대추야자로 당도가 높고 양분이 많아서 물이 적고 척박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식량자원이기도 합니다 요단강 수원 가까이에 있는 비옥한 토지와 젖줄이 되는 물줄기로 인해 종려나무가 늘 우거져있는 종려나무의 숲, 여리고는 풍족하고 살기좋은 도시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살기 좋고 풍족한 여리고이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에서 발견되어지는 여리고의 실체는 그닥 행복한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9장 바로 앞 18장 35절부터 말미까지 이어지는 사건은 구걸하는 맹인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풍족한 그 땅이었지만, 구원자이신 예수를 향하여 통곡하고 절규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절규하는 이의 가슴에는 무엇이 담겨있는 것일까요 ?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러나 누구도 들어주지 않고 공감해주지 않는 외로움과 고통속에 처한 사람들의 억울함과 좌절이 서린 몸부림이 바로 절규입니다
이탈리아의 빌프레도 파레토라는 경제학자가 주장했던 20대 80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 그의 이름을 따서 파레토의 법칙으로도 불리우는데, 세상은 상위 20%가 하위 80%의 부를 소유하고 감당한다는 현상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양극화라는 말로 더 익숙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파레토의 법칙, 즉 양극화가 더 강화되어가고 있어, 어느새 10:90 사회로 치닿고 있다고 합니다 100명중 10명을 위해 90명이 가난해야하고, 나머지 10명은 90명이 나누어야할 부를 독점하며 살고 있는 세상말입니다
예수께서 찾으셨던 여리고도 역시 그런 땅입니다 천해의 자연 조건과 풍족한 농경사회가 만들어 놓은 부유함은 사람들의 행복을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오늘 19장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예수께 절규하던 눈 못보는 맹인을 등장시킴으로 여리고가 참담하고 낙담한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잠겨있는 곳임을 드러내어주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의 뒤안에 굶주린 이들의 절규가 있었고, 건강하고 건장한 이들의 이면에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남의 일에 눈을 돌리거나 관심을 갖는 이 없는 메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니 예수 앞에 섰던 맹인은 겉만 번지르르한 도시 여리고에 대한 누가의 고발인 셈입니다
과연 여리고를 향하신 예수의 걸음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로 향하고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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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9장의 이야기의 배경에서 우리는 그런 양극단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길가에 가난한 맹인이 앉아있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내미는 손이 없는 곳, 그래서 자신의 손을 잡아 달라고 처절한 절규를 외치는 그 땅에 예수께서 임하셨습니다 이미 여리고에도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소망을 주시는 예수의 이야기, 이미 이 성안에서도 눈먼 이를 낫게 하신 이적에 대한 소문은 성내에 파다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의 주변에 많이 몰려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기대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맹인의 눈도 뜨게 했으니 내 눈도, 혹은 내 아픈 상처를, 혹은 배고픔을, 억울함을,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과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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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든 지금 여리고 성내, 예수님이 서계신 그 주변은 사람들의 기대감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속에서 소외된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도 역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달려 나왔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 이미 그가 지나온 도시 곳곳에서 부터 시작된 소문을 익히 들어왔던 차였기에, 꼭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먼 발치에 예수께서 때 마침 도착하셨는지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합니다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 나오고, 어쩌면 그 길 곳곳에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이적이 일어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오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렬이 다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용을 써 보아도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보통은 키가 조금 작더라도 사람들의 어깨 사이 사이를 찾으면 곁눈이라도 볼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다른 이들에 비해 키가 월등히 작았던 탓에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특한 그는 곧 주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위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사람들 키위에서 내려보게 되어서야 웅성거리는 행렬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속 그 한 가운데 서계신 예수가 보입니다 길 가에 서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수가 잘 보입니다 다행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예수의 곁이 아닌 저만큼 떨어진 나무 위에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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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19장 1절에서 삭개오를 소개하는데, 성격이나 사람됨, 혹은 그의 평탄이 아닌 세리장이요 부자였다라는 표현으로 간단히 그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세리장이요 부자였다는 말속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는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 제국과 유대 기득권에 의하여 수탈당했던 세금은 보통 35%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제국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의 이권이 더해져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강탈당했었고, 이 때문에 세금을 걷는 이들은 로마의 압잡이, 민족의 배신자, 동포들의 고혈을 빨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뻔뻔한 악당들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리장이요 부자라는 말은 삭개오가 세금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편취함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어떤 연유로 삭개오가 세리장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곱추 난장이라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조롱하고 신에게 버림 받은 부정하거나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에 대한 앙갚음과 증오의 마음이, 그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일그러진 삶을 선택하도록 내몰았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세리장의 권세와 축적한 부를 통해 사람들에게 등을 돌렸고, 사람들은 또한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부정하고 악한 세리라며 등을 돌리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돌린 등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찾아오신 그 순간에도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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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수님의 행렬의 장면으로 돌아가 봅시다 3절에서 누가는 사람들이 많아 삭개오가 예수를 볼 수 없었고, 그러므로 ‘삭개오가 나무위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예수님이 그를 발견하고 만나시는 훈훈하고 감동적인 장면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죄인에게 손을 내미시고 만나주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속에는 여전한 불통과 차별과 미움의 마음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무위까지 올라간 삭개오의 노력이나 열정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마을 사람들과 삭개오의 사이에 놓여진 커다란 벽, 누구도 건너가거나 건너오지 못하고 있던 냉랭하고 무거운 그 벽을 허물어트리신 예수님께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긴장감과 대립의 장면속에 다수의 사람들이 삭개오 한명을 인정해주지 않고 그들의 틈 바구니에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애써 발 뒷굽을 들고 길개 고개를 빼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눈앞에는 냉담한 사람들의 뒷 모습만 보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열어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삭개오는 굳이 나무위를 오를 필요가 없었겠지요 나무 위는 삭개오 입장에서 예수를 보기에 편한 자리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의 사이에서는 더 멀어진 곳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사람들속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내몰리고 만 셈입니다 그러니 실상 삭개오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매정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세워진 이 장벽은 무너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한번 사람 사이에 정이 나고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세상 없는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때 예수께서 사람들 틈을 밀쳐내고 삭개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나면서 부터 키가 작은 곱추 난장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죄인이라고 외면당했던 삭개오에게,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마음의 담안에 꼭 꼭 갇혀있던 그에게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백성으로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벽을 높이 세워가고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향한 벽만 그리고 있지만, 예수를 보겠다고 서로를 밀치며 우격다짐하는 이들속에 세워진 벽은 얼마나 많았을지 눈에 선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으레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는 이들이 세운 벽은 그렇게 높아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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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예수께서 여리고에,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이유를 10절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는 삭개오이며 찾으신 이는 예수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여리고로 향하셨던, 아니 삭개오를 만나신 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삭개오, 잃어버린 그가 하나님의 용납과 용서로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말입니다
왜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일까요 ?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아닙니다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인 이유는 여리고성에 있던 이들이 삭개오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 때문에 삭개오는 사람들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성내에 있는 사람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삭개오를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편견과 미움과 증오, 조롱이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로 만들었습니다 아니 여리고성에 있던 사람들에게 삭개오는 이미 잃어버린 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아오셨습니다 누구도 관심갖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고 손 내밀지 않는 이 불쌍한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심으로 주님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도 외면하지도 않으셨음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통해 비로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한 죄인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의 후손들중의 하나로 용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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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이름 뜻은 히브리어로 ‘자카이’라고 합니다 뜻은 ‘순수함, 의로움’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삭개오는 결코 그 이름 값에 걸맞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함 대신에 증오가, 의로움 대신에 세상을 향한 분노가 그 안에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막힌 담을 허물고 사랑으로 손을 내미시는, 잃어버린 이를 찾으시는 예수의 생명은 등진 세상을 원망하며 살고 있던 삭개오를 순수함과 의로움이라는 이름을 회복한 진짜 삭개오 ‘자카이’로 회복시켜내셨습니다
늘 사람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로 똘똘 뭉쳐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를 악물고 세금을 뜯어냈던 그의 손이, 이제는 그 동안의 모든 원한과 분노로 모은 재산을 타인을 위하여 내어 놓겠다고 선언합니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이제 타인을 향해 열리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절반을,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를 더해 갚겠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과 만난 사람의 운명입니다 불의함에 상처받던 이들이 예수를 만나면 위로를 받고, 상처를 주던 이들은 이렇듯 의로운 마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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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며 날카로운 상처를 품고 살던 삭개오는 찾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에게 등을 돌렸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7절 말씀을 보니, 주님이 삭개오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시는 것을 보고 따라오면서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라고 수근대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겠다고 달려나왔던 그들이지만, 주님을 향해 ‘저가’라고 말하는 말투에서 이들의 속좁은 마음이 이미 빈정이 상하고 뒤틀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못난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이들의 마음에 세워진 담은 허물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이들은 이제 죄인인 삭개오와 함께 하는 예수에게 눈을 흘기고, 그도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고 높은 담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 10절은 이런 그들을 향한 재판정의 판사와도 같은 예수님의 최종 선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고,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제 이 여리고에서 삭개오는 외면당하는 이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틈 사이에서 잃어버린 자가 아닌 다시 찾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담을 세우고 그를 잃어버린 자로 취급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은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예수님 최종 선고에 의하면 삭개오는 찾은 자이며, 잃어버린 자는 바로 여리고 성안에 있는, 예수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그리고 여전히 삭개오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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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명을 발견하고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을 지금 주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 여러분은 잃어버린 자입니까 ? 아니면 구원을 받은 삭개오입니까 ?
지금 여러분은 다른 이를 향한, 누군가를 향한, 세상을 향한,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향한 벽을 세우고 있는 이들이십니까 ? 아니면 벽을 허물고 나를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 이제 잃어버린 이들을 향한 벽을 허무는 이들 이십니까 ?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삭개오는 누구일까요 ?
‘잃어 버린 자’에서 ‘잃어 버리다’ 라는 말은 ‘잃다’와 ‘버리다’의 합성어입니다 어떤 연유로, 계기로, 사건으로든 우리는 사람을 잃을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갈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잃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잃고 난 이후의 태도입니다 잃고 나서 포기하고 버리느냐 ? 잃고 난 이후 찾고 구원하느냐 ? 의 선택이 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내 방식과 다르고, 나보다 미숙하고, 나보다 수준이 낮고, 내가 싫어하는 방식이라고 잃은 사람을 애써 찾으려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포기가 바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미움의 대상도 삭개오입니다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이들도 삭개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고통받고 눈물흘리고 있지만 우리가 등을 돌려버린 사람들 모두가 삭개오입니다
가치관과 생활의 수준, 기호, 윤리적, 도덕적 순수함, 허물과 실수등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향해 담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막힌 담을 허물고 사람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잃는 사람들이며, 잃은 것을 포기하고 버리지만, 하나님은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그릇되고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기이로 이룬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개혁은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삭개오를 진짜 삭개오, 다시 찾은 삭개오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야 말로 교회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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