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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1/05 성탄후 두번째 주일 * 신년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 3. 16:12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예레미야 31:7~14

      응송 | 시편 147:12~20 

    2독서 | 에베소서 1:3~14

    3독서 | 요한복음 1:(1~9), 10~18

     

    # 설교음원

    http://naver.me/xNLXJMqC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설교영상

    https://youtu.be/YmBehPuLtdc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Rembrandt van Rijn (1606-1669), Jeremiah Lamentin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 1630. Rijks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과연,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1.

    새로운 2025년의 첫주일인 성탄절 2주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난 2024년의 고비를 우리는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힘겹게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힘차게 내디뎌야 할 첫걸음마져 주저하게 될 만큼, 지금 우리 앞에는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감당하고 지나야만 하는 아찔하고 위태로운 현실의 문제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새해 아침을 맞는 소망과 기대보다는 암울한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제1독서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외침은 이런 우리에게 반갑기만 합니다.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 예레미야 31:13

     

    하지만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마땅히 기쁨으로 구해야 한다는 선지자의 외침은 아무래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이미 기원전 7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해버린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달라고 구하라는 말도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앗수르’에 의해 끌려갔던 이들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합니다. 남아 있는 이들이라고해서 사정이 나을 것은 없습니다. 나라는 이미 망해 버렸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제국들의 위세는 여전합니다. 그러니 상황이 이런 지경인데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드러나게 될 것(10-14절)이라는 선지자의 외침은 뜬구름처럼 들렸을 겁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 31:12

     

    북이스라엘이 멸망한지가 벌써 오래이고 이제 ‘유다’의 운명마져 경각에 놓였던 당시에, 선지자는 여전히 한가로운 희망의 예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말 선지자의 예언대로 양떼와 소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게 될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대체 선지자는 어떤 통찰과 믿음을 경험했던 것일까요? 

     

    2.

    현실적으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기쁨의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늘 패망과 멸망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유다’의 역사는 늘 그래왔습니다. 선지자가 말했던 그런 날을 모두가 바라고 희망했지만, 역사안에서 그들은 단 한번도 그런 식의 예언의 성취를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운명과 역사도 늘 그렇게 암울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인류의 불행한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이런 식의 말씀을 들으면 뻔한 교리적 문제처럼 상투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성경의 이런 고발과 진단은 옳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가 말했던 대로, 정말 양떼나 소떼가 늘어나는 식으로 삶의 형편이 지금보다 좋아지게 된다면 인생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가 무너지고 ‘유다’의 평화를 위협하던 ‘바벨론’이 무너지게 된다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까요?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이런 식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나이브한 생각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양떼와 소떼가 늘어나게 된다고해도 그때부터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가져야만 한다는 경쟁에 내몰리고 말 겁니다. 자신의 가축을 위한 풀과 물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게 되고, 결국은 갈등과 불화로 인해 ‘평화’는 쉽게 깨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도 개인이나 사회, 국가간의 위기와 갈등이 멈추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통해, 인간의 탐욕과 욕심 때문에 ‘평화’가 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이런 생각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희망의 날’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을 실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실패한? 선지자의 예언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근본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야 말로 우리가 ‘신앙’으로 살아내는 이야기의 핵심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전한 말이 옳다는 것에 동의가 되시나요? 이런 이야기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 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그런 일은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믿지 못하는 경우 모두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현실성에 자꾸만 회이가 든다면, 반대로 ‘인간’ 편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답을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그렇게 정직한 물음을 이어간다면 결국은 기독교 역사가 이야기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바와 같이, '죄'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닿게 될 겁니다. 또한 그렇게 치열하게 '자기 실존'을 들여다 보고난 이후에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처럼, 흩어진 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고 구원해내며, 강한 자의 손에서 야곱을 건져내는, 참된 자유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코 가벼이 여기거나 우습게 볼 수 있을 만큼 맹목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삶, 형편없는 상황과 절망적인 조건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인생과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고 얻은 깊은 통찰과 안목이 바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이시다'라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어떻게 이런 믿음의 터 위에 세워질 수 있게 되었던 걸까요? 신자들 가운데 ‘유대교’와 ‘기독교’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많지만, 초기 교회가 유대교 신앙의 터위에서 세워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1세기 교회가 ‘야웨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인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인 그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외쳤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은, 역사 안에서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전혀 기대하지 못하던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게 있어 선지자들의 예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의 성취라고 해서, 어떤 마을에서 태어났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말했고, 결국 언제, 어떻게 되었다는 식의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만일 그렇게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면, 아마도 유대인들 모두가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기독교로 회심했을 겁니다.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예언의 성취로 경험했던 걸까요? 예수안에서 일어난 사람은 할 수 없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물론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일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 말로 예언의 성취, 하나님의 구원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주실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겁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운명과 일치를 이루는 일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믿음이었고 결론이었으며, 마음과 영혼을 다해 천착하는 지향인 겁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조롱섞인 비난은 논외로 하더라도, 현실 사회 문제에 대해 무책임한 지극히 개인주의적 신앙이라는 책임론에서 기독교 신앙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같은 진보적 입장에서 던지는, 실천은 없고 사회개혁에 무책임한 허울만 남은 교회공동체의 신앙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요구가 매섭기만 합니다. 물론 그런 주장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고, 타당합니다. 실제로 '신앙'의 뒤에 숨어 스스로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감추고 현실과 삶을 방치하는 정직하지 못한 신앙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AD 70년 경에 일어났던 유대-로마 전쟁 당시에 교회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갖은 박해와 비난을 당했습니다. 적극적인 항쟁에 참여하지 않고 비겁하게 뒤로 숨었다는 오명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회당 모임에서 공공연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그들을 향한 실망과 증오가 컸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때의 교회 공동체가 죽음이 두려워서 회피했던 걸까요? 아니면 내세신앙에 물들어 현실을 포기했던 걸까요?

     

    4.

    하지만 역사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초기 교회가 보여주었던 신앙은 결코 현실 타협적이고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신앙 언어는 실제로 모든 권위에 대해 ‘순교’로 저항하는 삶 자체였습니다. 결코 수동적이거나 비굴하거나 무력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인지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상당수의 ‘열혈당’ 같은 과격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가 여전히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천착해 왔던 이유나, 그들 이전의 ‘예레미야’같은 선지자들이 제국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을 외치지 않았던 것은, 그리고 예수께서 유대 땅의 모든 병자들을 고쳐내시지 않고 뿐만 아니라 폭압을 일삼던 ‘헤롯’과 ‘로마’ 제국을 무너트리지 않으셨던 까닭과 그분의 뒤를 따르던 예수의 제자들이 무력해 보이기만 했던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것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를 개혁하며 고쳐내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 탓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참되고 궁극적인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보다 본질적이고 온전한 ‘구원’을 향해 천착했던 것 뿐입니다. 

    당시에 교회 공동체의 선택은 어리석고 비겁해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투쟁과 세상을 구원해 보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허무와 결핍과 슬픔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조급한 방법론 보다는, 우선은 ‘왜? 그런 상황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만이 ‘전부’라는 오만한 껍질이 벗겨져,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해내지 못하는 한, 우리의 ‘내일’은 또다시 ‘오늘’의 굴레를 반복하게 될 뿐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를 통한 구원 경험의 터 위에 삶을 세워가는 삶을 세워갈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 서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뿐이라는 믿음을 삶의 근거삼으라는 겁니다. 그런 신앙으로 ‘오늘’을 ‘종말’처럼 그리고 ‘종말’을 ‘오늘’에 앞당겨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덧없어 보이는 ‘오늘’에 대한 헛헛함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에 잇대어 있다는 감격이 차오르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양떼’나 ‘소떼’가 없어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출세나 성공을 하지 못하고, 명성이 갖지 못한다고 해도 넘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더 이상 염려나 근심에 내몰리지 않아도 되고, 강요에 떠밀려 조급하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형편이나 사정, 사회적인 신분이나 업적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이런 경험이 바로 선지자 ‘예레미야’가 외쳤던 온전한 기쁨과 환희로 채워지는 구원의 날인 겁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로부터 신탁과 약속은 받았지만, 실제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초기 교회는 바로 예수의 운명안에서 비록 ‘십자가’로 떨어진 인생일지라도 결국 하나님에 의해 구원과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할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5.

    과연, 우리 주변에 온 마음을 다해 기쁨과 감격함으로 찬송할 수 있도록 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뻐할 만한 이유보다는 슬픔과 절망에 떨어지고도 남을 이유만 보입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믿음의 대상보다는 배신과 아픔을 가져다 주는 것들만 보입니다. 인면수심의 사람들이 도리어 큰 소리를 치고, 불법을 자행하는 이들이 정의를 외치고, 법과 원칙을 파괴하는 이들이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엉터리 같은 세상입니다. 슬피울며 애통하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이들이, ‘국민을 위해’라고 말하는 행태도 여전합니다. 

    이런 형편이 계속되는 2025년, 과연 우리를 찬송하게 할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어진 ‘삶’을 경축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기쁨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힘, 옳음이 그릇됨을 꾸짖고, 빛이 어둠을 내어쫓는 세상을 만드는 힘 말입니다. 저는 그 힘을 기꺼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하나님의 구원안에서만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했습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 죽음과 부활안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토록 목놓아 외쳤던 소망이 현실로 드러나고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이 시간, 우리가 그리고 모두 함께, 찬송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게는 그만이 유일하고 절박한 ‘소망’일 뿐입니다.

    어둠에 덮인 세상을 밝히고, 삶의 기쁨도 환희도 빼앗겨버린 이들에게서 생명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도, 제 세상인양 불의와 불법에 기댄 악인들로부터 의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걸음을 지켜낼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늘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빛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전히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구원의 그 빛이, 창조의 말씀으로,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믿음으로 우리의 아버지 되어주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베풀어 주실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운명을 걸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멘.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에베소서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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