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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27 부활절 제 2 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5. 4. 25. 15:0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5:27-32
응송 | 시편 118:14-29
2독서 | 요한계시록 1:4-8
3독서 | 요한복음 20:19-31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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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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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 앞에 선, '베드로' '부활', '죄사함' 그리고 '증인'
1.
성경은 주님의 부활을 믿고 경축하는 우리를 ‘부활’의 증인(證人)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부활을 믿고, 또한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공동체로서만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우리는 무엇으로 ‘부활‘을 증거하고 있을까요? ‘부활’의 절기를 지키고, 그렇게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 ‘증인’으로서의 존재감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백번 양보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증언이란 것이 얼마나 믿을만 한 걸까요?
지난 12.3 계엄과 대통령 탄핵을 지나 이와 관련된 재판들이 한창입니다. 우리는 수 많은 증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증인’들은 자신의 증언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증인’이라고 하면 ‘말’하는 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참을 말하고 또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으니, ‘증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2.
부활절 기간에는 1독서 본문으로 구약본문이 아닌 ‘사도행전’ 말씀을 읽게 됩니다. 오늘 주어진 사도행전 5장의 말씀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 불려간 ‘베드로’와 사도들이 재판을 받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기구입니다. 제자들이 재판을 받게 된 까닭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일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주님이 그리하셨듯 ‘하느님 나라’ 복음일 겁니다. 종교나 사회적 기득권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 나라’를 병적으로 싫어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현재의 세상 나라는 모두 망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금 이 땅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오면 않되는 나라, 있어서는 않되는 ‘나라’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자들이 궁박한 상황에 내몰린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 사도행전 5:28
대제사장의 심문내용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음험하고 사특한 무리들이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어떤 죄목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어떤 법을 어겼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권위에 기댄 강압과 협박일 뿐입니다. 그냥 제자들이 싫고, 그들 때문에 몹시 불편할 뿐입니다. ‘그 이름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예수’처럼 불온하고 위법한 생각을 가진 한 패거리라고 몰아가는 겁니다. 그들의 겁박은 제자 공동체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이들에 의해 한번 낙인이라도 찍히게 된다면 적어도 유대사회에서는 온갖 억압과 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그들의 스승인 예수는 바로 이들에 의해 유대법으로 고소를 당했고 결국에는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서슬퍼런 재판정에 그들이 불려나와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의함과 치부를 감추기 위해 자신들의 힘으로 증거를 감추고, 증인들을 겁박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칠고 사납게 굴어도 어둠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때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매우 손쉬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이 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예수도 잡아 죽였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십자가’에 내몰아 죽인 예수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제자들의 입을 통해 세상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그는 참으로 의로운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던 ‘백부장’의 고백처럼 사람들안에서 ‘예수’가 옳았던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묻어 버리려고 했던 과거가 자꾸만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기득권을 위협하니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제 버릇을 남주지 못해 다시금 예수의 제자들도 여차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폭력의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3.
제자들은 직접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한 적도 없고, 기득권자들의 패악함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불편합니다. ‘어둠’은 생래적으로 ‘빛’을 싫어하는 법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두울 때는 ‘빛’인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아침이 오고 ‘빛’이 밝혀지는 순간, 자신들이 ‘빛’을 가장한 ‘어둠’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증인’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겁니다. ‘증인’의 가치는 무엇을 말하는 거나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들은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빛이고 또 무엇이 어둠인지는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음험하고 사특한 이들은 ‘증인’의 존재를 싫어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보문에서도 제자들이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으로가 핵심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사셨는지를, 또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하다가 어떻게 불의한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으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를 죽음에서 일으켜내셨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니 보았으니 ‘증인’이 아닐 수 없고, ‘증인’이니 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던 겁니다. 그들은 그저 ‘증인’이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은 고스란히 불법과 불의함에게는 바름과 정의가 무엇인지 일깨우는 가시가 되기도 했고, 서러움과 핍박에 눌린 이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음을 보여주는 위로가 되었던 겁니다. 그들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기대고 있던 것이 ‘진리’였고, 그들이 따르던 이가 ‘예수’였기에 가능했던 결과입니다. ‘증인’은 오히려 말을 잘하는 사람이어서는 않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불필요한 말들이 덧붙여지면 오히려 진실이 가리워질 뿐입니다. 진실은 담백하고 분명합니다. 그래서 ‘무엇’에 그리고 ‘누구’의 증인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 사도행전 5:32
제자들은 자신들 어둠의 겁박과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스스로가 진실에 기대고 주님께 잇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용기를 북돋우워주신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당연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니까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안에서 무엇을 본 ‘증인’들입니까?
4.
‘성령’에 의해 하나님께서 써내려 가시는 역사의 마지막을 엿보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 요한계시록 1:5a
‘요한’사도는 죽으셨으나 다시 사심으로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의 나라’와 ‘구원’을 드러내는 신실한 ‘증인’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예수’를 ‘영생’과 ‘구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드러낸 ‘증인’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의 선택만 남게 됩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리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쯤되면 답답해질 법도 하지만, 요한은 조급해하질 않습니다.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요한계시록 1:7
‘구름을 타고 그가 오실 것’이라는 표현은 비밀스러운 방식이 아니라, 세상 만민이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요한은, ‘하느님’에 의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진실은 가리워지지 않고 다시금 ‘하느님’에 의해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운명을 걸고 있었던 겁니다.
5.
이제 마지막으로 복음서 말씀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주간의 첫 날 저녁’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을 한주의 마지막날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주간의 첫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오늘날의 ‘주일’이 됩니다. 그 주간의 첫날,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듯, 죽은 사람이라도 일으켜 세우는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역사 안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라도 붙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문을 걸어닫고 이전의 세상에 갇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자신이 ‘부활’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먼저 신실한 증인이 되어주신 겁니다. 그런데 재미난 대목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요한복음 20:23
‘부활’이야기 중에 뜬금없이 끼어든 ‘죄’와 ‘죄사함’에 대한 언급이 매우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보입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을 타박하고 민망하게 하시려는 걸까요? 그도 아니면 무언가 그들에게 허물과 과실이 있음을 고발하시려던 걸까요? 이 문구를 해결하려면 요한복음의 결론인 마지막 21장의 장면을 염두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감격스러운 장면에 이어지는 21장에서 보여지는 제자들의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기만 합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 일행의 모습이 ‘디베랴’ 호수가에서 발견됩니다. ‘디베랴’호수는 ‘갈릴리’호수의 다른 식의 이름입니다. 대체 그들은 왜 이곳에 있던 걸까요?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 요한복음 21:3a
처음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고기잡이 생활로 돌아가버린 겁니다. 도무지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예수님과 함께 하며 꿈꾸던기대가 모두 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라는 것이 이처럼 손에 잡기 어려운 일인가 싶습니다. 이제 무슨 수로 이들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그때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내셨고, 요한복음의 결론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다시금 ‘베드로’를 ‘제자’로 일으켜 세우시는 모습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그러니 ‘요한’이 제자들이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어김없이 이들을 찾아내시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이라는 것, 주님은 약속처럼 늘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 아무리 깨어진 이라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야 말로 ‘부활’의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6.
이제야 왜 요한이 23절을 ‘부활’이야기 안에 집어 넣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죄’는 본래 하나님과의 어긋나 버린 우리의 불행한 실존을 말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또한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 앞에서 ‘예수’와의 관계성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주셨던 ‘평안’은 사라지고, 그 빈 자리에 포기와 체념, 그리고 절망이 곧장 찾아들었습니다. 이런 절망의 늪에서 ‘사함’ 즉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주님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제자들의 삶에 ‘생명’이 가득하도록 채우셨고, 그로부터 그들안에 다시금 ‘하느님의 나라’의 꿈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실패감과 무력감, 정죄와 절망으로 짓누르는 ‘죄’로부터 주님께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거나, 역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언제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깨어지고, 버려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본래 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리로 이끄는 ‘화해’의 능력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죄’를 사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바램과 꿈은 앞으로 당신이 ‘죄’로부터 견져내어주신 베드로와 제자들 공동체에 의해 실현될 겁니다. 당신은 홀로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 서계셔야만 했지만 이제 당신께서 보여주신 꿈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바로 모든 깨어진 삶에 내몰린 이들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록 지치거나 흔들릴 때, 힘겨움에 내몰리고 무너질 때, 체념과 포기, 무력함에 주저앉을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그날까지 언제나 찾아오시고, 또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에 잊혀진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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