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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11 부활절 제4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5. 5. 8. 15:46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9:36-43
응송 | 시편 23
2독서 | 요한계시록 7:9-17
3독서 | 요한복음 10:22-30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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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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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흐르고, 흘러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요한복음 11:25-26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앞에 슬퍼하던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도무지 믿음이 생기지 않아 비틀거릴 때도 있습니다.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덧붙인 말씀 때문입니다. ‘죽어도 사는 것’은 이 다음 천국에 가서 확인하면 그만이니 일단 넘어갈 수 있지만,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을 지금껏 본적이 없습니다. 대체 주님의 말씀은 참일까요? 아니면 ‘부활’을 설명하시기 위해 그냥 하신 말씀일까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은 참으로 ‘믿을 만’한가요? 만일 이 질문에 대한 신앙적 근거가 없다면, 아무리 좋게 말해도 우리가 그저 맹목적인 수준의 신앙에 머무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될 겁니다.
2.
‘부활’ 신앙의 근거로 ‘나는 이런 경험을 했네, 너는 저런 경험을 했네’라는 식이 경험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부활’의 증인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주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부활’신앙에 대한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은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주님은 ‘믿음’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 요한복음 11:25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안에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무엇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1세기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리하셨듯,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을 통해 드러나야만 할 겁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처럼,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반드시 우리 자신이 살아내는 ‘일상’을 통해 드러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부활’의 생명, 즉 ‘영생’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고 경험될 수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이란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해도 그저 ‘하나님의 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일 뿐, 우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미 바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5:14
그렇다면 우리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드러나야 할까요? 1독서 본문인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에게서 드러나게 되는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배경이 되는 ‘욥바’로 가 보겠습니다.
3.
‘욥바’는 ‘가자’지구로부터 북쪽이며, ‘가이사랴’의 남쪽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곳에 오늘 사도 ‘베드로’가 이곳에 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욥바에 살고 있던 ‘다비다’, 헬라어로 ‘도르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죽음 때문입니다. 그녀가 평범한 신자였는지, 아니면 여 ‘제자’라는 표현대로 ‘사도’들과 같은 정도의 권위를 가진 목회자였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가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했다고 하는 설명을 통해 그녀가 매우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여하튼 이 죽음의 장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기도하자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난 겁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이런 식의 기적은 구약부터 시작해서 성서안에서 숱하게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다비가’가 되살아난 일이 놀랍기는 해도, 이 본문 외에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은 다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이런 식의 ‘기적’이나 ‘놀라운 일’은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성서는 그런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훨씬 근원적인 사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 바로 ‘하나님 경험’, 놀라운 ‘생명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다비다’의 이야기에만 주목을 하게 되는데, 본문은 얼핏 대수롭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42, 43절의 이야기를 서둘러 그리고 굳이 덧붙이고 끝을 맺습니다. 그 내용이라는 것도 얼핏 대수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기자는 그 두 절의 말씀을 본문 전체의 결론으로 삼은 것이 분명합니다.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일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습니다. 일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잠깐 있다가 신기루 처럼 사라지고 잊혀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그 일은 ‘베드로’ 사도가 잠시 ‘욥바’에 머물면서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제 그가 떠나고 나면, 다시는 이런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기적이란 그런 겁니다. 그러나, 43절은 이 기적이 있고 난 이후, ‘베드로’ 사도가 ‘여러 날’을 ‘욥바’에 머물렀다고 쓰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장면이 성서기자의 눈에 예사롭지 않게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왜 성서기자는 ‘베드로’ 사도가 ‘욥바’에 머물렀다는 것에 주목했을까요?
4.
성서기자는 ‘베드로’ 사도가 머물게 된 곳이 ‘시몬’이라는 ‘무두장이’ 집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굳이 그의 ‘직업’을 밝힌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그가 ‘욥바’를 떠나지 않고 여러 날 묵게 된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을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1세기 당시에, ‘동물의 시체’를 다룰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유대 율법에서 ‘무두장이’는 직업 자체로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랍비 유대교의 규범집인 ‘탈무드’에 따르면, 무두장이는 성전에서의 예배나 공동체 생활에도 제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유대 사횡안에서 ‘무두장이’는 천대를 받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들의 작업장이나 주거지가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심지어는 무두장이의 아내는 악취와 불결함을 이유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도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몬’은 사회 종교적 차별과 폭력에 의해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이 초기 교회의 신자라서 방문을 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베드로’의 걸음을 이끌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베드로’ 사도는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들렀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함께 생활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사도가 ‘시몬’의 집에 묵었다는 것은 단순히 숙소를 택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장면은 사도행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 안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10장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제 ‘성서기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눈에 들어옵니다.
대선에 나섰던 한 후보가 쪽방촌에 들렀다가 주민은 만나지도 않고 사진만 찍고 자리를 떴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담합니다. 한없이 무겁고 힘겨운 삶에 내몰린 이들조차 자신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나 수단처럼 여기는 그 마음 씀씀이가 잔인해보입니다. 그런 이들에 의해 연약한 이들의 삶이 벼랑끝으로 내몰리게 되는 겁니다. 교회도 이런 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마치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손을 내밀고는 예외 없이 사진이나 촬영에 더 마음을 쏟고 그것을 또한 자신들의 선행으로 드러냅니다.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던 예수님의 말씀(마태 6:3)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이었으나 또한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 유대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과 차별이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라고해서 ‘무두질’하는 환경이 낯설지 않았을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제 살을 내어주고, 제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아닌 그저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거부당한 이가 용납되고 내쳐진 이가 존귀함을 받을 수 있다면, ‘베드로’ 입장에서는 더욱 이를 마다하고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누구나 환영받고, 누구라도 용납됨을 경험하게 하는 것, 교회가 세상을 평화하게 하는 사명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절망에서 다시 일어섰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걸음을 통해 냉대와 천대속에 무너졌던 한 사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일어서게 되었으니, 예수님에게서 그의 제자인 ‘베드로’에게로 흘러 간 ‘부활’의 생명이 넘치고 흘러, 이제는 버려진 삶의 자리에 있던 무두장이 ‘시몬’에게까지 이어져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 겁니다. 이처럼 ‘물’이 채워진 곳에서 비어있는 곳을 채우듯, ‘생명’은 언제나 있음에서 없음을 향해 채움을 이어가는 법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베드로’ 사도 안에 ‘부활’의 생명이 담겨 있어 보이지 않나요?
5.
이처럼 ‘부활’의 흔적이 겉으로 드러나기 이전에, 반드시 내면의 신앙 고백이 먼저 달라지게 됩니다. 시편 23편안에는 훌륭한 ‘부활’신앙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얼핏 읽으면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면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노래는 풍성하고 넉넉한 삶으로 인도하는 느긋하고 목가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문다면 이 노래를 반만 읽은 겁니다. 다시 읽어보십시오.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시인이 고백했던 상황은 사실은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리고(4), 원수들이 조롱하고 무시하는 처지(5)에 내몰려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 내몰려 있음에도 ‘앞으로는 잘 되리라’는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목자가 되어주신다면’ 그런 형편에 처해 있게 된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고 하는 겁니다. 간절히 믿으니 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고난의 잔을 비켜가게 해달라는 기도외에는 할 줄 모르는 우리의 형편을 아득히 벗어난 셈입니다.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이런 신앙이 가능한 걸까요?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살것이다’라던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영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에 의해 깨어지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깨트리는 본래 하나님이 부어주셨던 ‘생명’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눈으로만 현실을 파악할 수 있고, 보이는 것,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 경험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겁니다. 하지만, ‘존재’란 우리 자신의 인지 능력이나 경험에 의해 제한받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귀로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그 너머의 소리는 존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진 하늘 뿐이지만, 저 너머에는 태양 조차 작은 먼지처럼 보이게 할 만큼 압도적인 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간은 또 어떻습니까? 아무리 식견과 지식을 동원해 미래를 예측해보려해도, ‘내일’은 언제나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존재합니다.
‘십자가’에서 무너질때까지도 ‘예수’님 안에 죽음에 의해 깨어지지 않는 놀라운 ‘생명’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부활’통해 그분안에 ‘영생’이 담겨 있었음을,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겠다던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과 한몸으로 살아가셨던 것처럼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한 몸으로 계심도 사실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하심이 사실이라면 ‘영생’하는 생명은 지금도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분이야말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이 사실을 믿음으로 보게 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환경도 여건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이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6.
‘무두장이’처럼 서러운 형편과 소외로 내몰려 있다고 해도, ‘바울’처럼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렇게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둘러쌓인 인생이라도 괜찮습니다. 복음을 외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느냐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일도 없습니다. 왜 받은 달란트가 왜 이리 적냐고 투정부리지도 않습니다. 망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조급함이나, 이 잔을 비켜가게 해달라고 주님을 윽박지르는 안쓰러움은 더더욱 없습니다. 한 ‘달란트’가 아니라 몇 푼의 ‘데나리온’이라도 주인에 의해 받은 것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고맙고, 그러니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이런 나와 함께 해주시니 감사하고 또한 이런 나의 목자가 되어 언제나 함께 해주시라는 기도가 간절해 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부활’은 애당초 ‘다시’ 사는 ‘생명 사건’입니다. 반드시 ‘죽는 것’이 먼저라는 겁니다. 결국 종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아, 내 안에도 예수님안에 있던 부활의 생명이 있었구나’실감할 수 있게 될 뿐, 지금의 이런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생명’이 있다는 흔적 뿐입니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비틀거릴지라도 이 믿음에서 이틀하지 않고 한 걸음씩 걷다보면,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 보이는 그곳까지 나아가고 보면, 어느새 우리의 걸음에도 사랑하는 주님께서 심어두셨던 ‘영생’의 씨앗이 발화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게 될 테니까요. 예수 부활의 생명이 제자들에게, 또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에게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의 삶을 채웠던 ‘생명’이 우리들에까지 흘러 들어왔습니다. 채워진 생명은 반드시 넘치고 흐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지고 오시는 ‘그 때’에는, 우리를 채우고 넘치는 ‘생명’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는 날이 오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고, 또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주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아멘.'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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