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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18 부활절 제 5 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5. 5. 14. 11:09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11:1-18
응송 | 시편 148
2독서 | 요한계시록 21:1-6
3독서 | 요한복음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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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an with Dead Child by Kathe Kollwitz 1903 39x48cm private collection 찾아오시는 '하나님', 찾아오는 '나라'
1.
우리는 지난 주일 1독서 사도행전 말씀안에서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던 ‘무두장이’ 시몬을 끌어안았던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욥바’에 머물던 ‘베드로’ 사도가 오늘은 ‘가이사랴’ 지방을 찾았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의 제국 수비대 주둔지이며 유대 총독부가 있던 곳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복음이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전해지게 되었고,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11장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 사도행전 11:1
이미 ‘복음’이 유대 민족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더니, 사람이나 문화의 차별과, 지역과 경계를 가르며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했고, ‘베드로’의 여정도 그런 역사안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곳곳마다 이르러 사람을 살려내고 평화를 이루는 ‘복음’의 이야기가 가슴을 뛰게 합니다. 하지만 같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우리 현실을 생각하니 되려 서러운 마음이 듭니다. 물론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는 것 같은 일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들이 무너지고 생명과 평화의 물결이 흘러가는 소식들은 어느새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 사람은 저래서 않되고, 이런 사람은 이래서 않된다는 반목과 갈등, 혐오와 소외의 불편한 이야기가 교회 안팎에서 들려옵니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 불통하면서도 말도 통하지 않는 선교지를 향해서만 ‘사랑’과 ‘헌신’, 차별없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심이 계속되는 모습이 때로는 기괴해 보이기도 합니다. 규모와 덩치가 커지고 더 열심히,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해왔음에도, 이미 세상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린 교회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교회안에서 교회를 등지고 떠나는 이들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게다가 정작 교회안에 남아 있는 우리 안에도, 성경에서 읽는 것처럼 복음이 가져다 주는 가슴 뛰는 기쁨과 생동감이 사그러들고 있으니 아찔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심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솔직히 어떤 때에는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울고만 있는 어미처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그저 우리끼리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2.
지난 주일 1독서 말씀에서 부정하다고 사회가 외면했던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며, 기꺼이 너와 나는 같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던 ‘베드로’ 사도의 너그러운 마음과 따스한 태도에 감동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오늘 이방인 ‘고넬료’의 이야기를 보면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너그럽지 못했던 ‘베드로’의 민낯을 발견하게 됩니다. 같은 유대인 안에서의 차별까지는 무너트렸지만, ‘이방인’을 향한 낯설음과 혐오까지 끌어안기에는 힘들었는가 봅니다. 그의 신앙이 가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인 ‘고넬료’에게로 가라는 말씀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유대인들의 정결예에 따르면 ‘부정한’ 것들이 담긴 보자기 환상을 보여주셨고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을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보내주시고, 말씀까지 하신 겁니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움직일 것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베드로’의 저항은 완강합니다.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 11:8
‘빌립보의 가이사랴’에서 앞으로 ‘십자가’를 지시게 될거라는 주님을 가로막던 ‘베드로’의 얼굴이 겹쳐보입니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그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하늘’로부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우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불경스럽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금껏 우리는 어떤 문제 앞에서 생각이나 판단, 기준을 적용할 때마다 정작 자신은 늘 예외처럼 여겨왔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다는 착각을 신념이나 믿음처럼 여기다보니,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믿음, 신념과 가치에 부합하느냐?같은 문제일 뿐, 하나님 말씀이 무어라 하시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도 아무 말씀 않하시는데도, 자꾸만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이건 부정하다 저건 경박하다 손사레를 칩니다. 하나님은 책망하시지 않으시는데도, ‘저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꾸짖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되려 하나님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이들 조차도, 저런 사람들을 교회안에 받아들여서는 않된다고 가로막기도 합니다. 따지고보면 우리는 이건 않되고, 저건 않되고, 이건 틀렸고, 저건 옳고 하는 식으로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선택을 거절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는 ‘베드로’를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무려 세번이나 똑같은 환상을 통해 설득할 만큼, 하나님의 고집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오늘은 기필코 ‘베드로’의 고집을 바꿔놓으실 작정이신가 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두 번째로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 사도행전 11:9
마치 버럭 화를 내신 것처럼 보입니다. 인자하고 자비하셔서 늘상 사람에게 져주시는 하나님 답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요. 이렇게까지 명령하신 것이 단순히 이방인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감옥안에 갇혀 있는 ‘베드로’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간도 쓸개도 빼어줄 것처럼 바보같고 무력해 보이다가도,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맹수보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것, 예, 참된 사랑이란 이와 같은 겁니다.
3.
‘베드로’의 이야기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느 것이 참으로 진리를 따르는 길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베드로’처럼 어리석은 고집을 피울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 이제부터가 오늘 성서일과 독서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의 고뇌와 달리, ‘고넬료’의 집에 결국 감격스러운 구원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뜻을 굽힌 ‘베드로’의 ‘순종’이나 ‘결단’ 때문입니까? 아니면 ‘베드로’의 믿음 덕분이었습니까?
그러나 무려 하나님 말씀도 거절하던 ‘베드로’의 거칠어진 마음을 끝가지 다독이고 설득해낸 것도, 생명을 살려내는 걸음으로 이끄신 분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도들을 부르셨을 때처럼 하나님은 이방인일지라도 차별하지 않고 기꺼이 한 몸되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도 ‘성령’ 하나님이었습니다.
2독서인 ‘요한’의 계시록 말씀은 우리에게 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를 위해 그날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왔지만, 종말의 날에는 우리 모두를 위해 ‘새 예루살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부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내려온다(2)는 겁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요한계시록 21:4
이 약속 안에는 이전의 모든 것들이 지나가버린 것처럼 잊혀질 만큼 온전한 구원과 다함없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 동안 인류 역사가 그렇게 몸부림쳐왔지만 결코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니 참으로 꿈만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처럼 놀라운 나라를 얻으려면 치루어야 할 값이 얼마나 될른지, 덜컥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 요한계시록 21:6
이 말씀은 ‘생명수 샘물’이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으레 값을 내지 않고 거저 얻는 것은 싸구려라는 선입견을 가집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않되는 물, 공기, 햇빛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 같은 것들은 대부분 값을 치루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값을 치루지 않아서 그런지 마치 싸구려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한번 파괴되어 버리면 다시는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값을 치룰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저 값을 치룰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만일 어느날 갑자기, 거저 누리고 있던 이 모든 것의 값을 요구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지금 우리는 이런 요구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오존은 깨어지고, 이상 기온이 계속되면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려가고,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해 같은 위협에 이르기까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찌해서든 막아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으니 절망스러울 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대가를 요구받고 있는 겁니다.
4.
그러니 ‘요한’ 사도가 말하는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하는 ‘나라’는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게 될까요?
그러고 보니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2절)이었다는 대목이 떠오릅니다. 비록 유대교로 전향한 개종자는 아니었지만 이미 유대교 회당에 참석하고 토라의 규범을 따라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읽었던 9장 말씀에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던 ‘다비다’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녀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신앙생활과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선행을 쌓은 이런 이들이라면 예비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에 넉넉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런 식의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오늘 성서일과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신앙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베드로’를 찾고 ‘고넬료’를 찾아내셨듯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내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고, 그렇게 인간을 구원해내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기꺼이 하늘이 땅이 되어 우리의 터전이 되어줍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찾아오실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줄곧 부활과 영생, 생명 같은 근본적인 것들은 우리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질 뿐이라고 하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은혜의 빛이 비추고 있으니 거룩하게 살 수 있을 뿐, 우리 스스로는 거룩함을 이룰 수도, 생명을 얻을 수도 없는 겁니다.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 사도행전 11:3
신실하고 거룩하다고 불리웠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고넬료’에게로 향했던 ‘베드로’를 비난하고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의 비난속에서 저는 ‘누군가’를 닮아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 누가복음 7:34
종교기득권자들이었던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똑같이 비난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제야 그들의 눈 밖에 나 있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제법 예수님을 닮은 ‘제자’다움이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앞서 가신 예수가 계셔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걸음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그분을 닮아가는 것, ‘신앙’은 이런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기 애쓰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언젠가 각자에게 필요했던 시간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어느새 우리도 그분을 닮게 된 자신의 모습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5.
설교의 머릿말에서 교회가 마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미와도 같다는 말했을 만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고 나누다보니 점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심장이 멈추고, 온기마져 싸늘하게 식어진, 죽은 아이와도 같은 우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주님이 계시기에,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죽음’을 몰아내고 ‘생명’으로 충만하도록 부활의 온기를 불어넣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처럼 반갑고, 따듯합니다. 적어도 그 말씀이 우리안에 심기워져있는 한, 우리는 변화될 겁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 요한복음 13:31b
안식후 첫날 ‘부활’하신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마리아’에게는 ‘아직’이었을 뿐이지만, 주님은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제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담이 허물어 지고 서로가 사랑하고, 평화하는 주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겁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한, 우리의 걸음 위에도 마침내 ‘생명’ 살림의 역사, ‘영생’의 기쁨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그분의 밝고 따듯한 빛이, 우리 걷는 이 길을 밝히고, 이끌어 주리라 믿습니다. 십자가 끝에 마주하게 되는 ‘부활’처럼, 그분은 우리를 그렇게 만나 주실 겁니다. 저는 그분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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