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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05/04 부활절 제3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4. 30. 14:14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사도행전 9:1-6 (7-20)

       응송 | 시편 30

    2독서 | 요한계시록 5:11-14

    3독서 | 요한복음 21:1-19

     

    #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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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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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conversion of Saint Paul, Benjamin Gerritsz Cuyp (Dutchm 1612 -1652)

    누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겠는가?

     

    1.

    오늘 1독서부터 응송인 시편에 이르기까지 성서일과 독서본문들을 흐르고 있는 주제 단어는 ‘회복’입니다. ‘회복’이라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 본래의 자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야말로 복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이런 정의에 선뜻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그만큼 우리가 무언가를 더 많이 받고 누리고 얻어야 복이라 생각하는 ‘물신주의’에 길들여졌던 탓일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과거의 ‘자신’에 대한 지독한 패배주의와 자격지심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 비교와 경쟁에 내몰려 상처를 입으며 살아온 탓일 겁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사람들도 별반 상황이 다르진 않아 보입니다. 종종 공중예배의 대표기도안에서도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와 같은 식의 모습이 쉽게 드러납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존재’가 ‘악’이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죄인’이라고 하면 무언가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지나가 버린 어떤 일을 떠올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도 이전과는 다른 삶, 인생의 역전 같은 것을 기대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사실일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서일과’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회복’과 그런 ‘회복’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2.

    우선 1독서 ‘사도행전’에서 만나게 되는 ‘회복’된 인물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율법주의자 ‘사울’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박해하고 심지어는 잡아 들이는 일에도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타고난 악당이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늘 ‘자신이 옳다’고 여기던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그 자신은 지금 가장 선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의 눈에는 살기로 가득합니다. 도무지 하느님을 믿는 기쁨과 평화가 얼굴 빛에 드러나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평안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열심을 더하면 할수록, 공허와 결핍을 채울 수 없는 자기 자신만 남게 되고, 그런 자신을 감추어야만 하는 ‘자기 기만’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정죄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니 자기 자신의 옳음, 의로움을 하느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셔야 할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의 결과란 늘 자신을 향한 ‘정죄감’의 짐 밖에는 남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기만과 정죄감에 떨어져 있던 그를 찾아내셨고, 건져내 주신 분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2독서인 ‘요한’의 계시록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본래 있어야 할 영광과 지위를 회복하시는 역사적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지금은 인간의 악과 어둠이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상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날,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선하신 하느님에 의해 지음받았던 모든 것들의 실체가 드러나게 될 겁니다. 천상에서 열리고 있는 신령한 예배의 모습이야말로 누가 창조의 주인이며, 역사의 주권자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예배의 자리가 하느님과 또 한 분, ‘어린 양’을 위한 자리라는 겁니다. 저는 이 장면이야말로,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찍이 ‘십자가’에 잡혀 죽게 되었던 ‘예수님’입니다. 하느 겁니다. 그러니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끝도 없이 추락하는 깨어진 우리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절망스럽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모든 절망하는 인생에 마침내 하느님께서 ‘소망’의 날을 가져다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소망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하느님이 머무시는 가장 높은 곳 보좌에 이르신 ‘어린 양’이 받으시는 ‘영광’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분이 받으실 ‘영광’은 없던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첫 창조의 시간, 그때에도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그분이 마땅히 받으셔야 했던 바로 그 영광이니까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은, ‘어린 양’이신 주님뿐만 아니라 그분께 믿음으로 이어진 모든 어그러진 것들이 회복되는 날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3.

    복음서에서 만나게 되는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입니다. 오늘, 그들의 모습이 발견된 곳은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디베랴’ 바다라고 하니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곳은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갈릴리’ 호수를 부르는 또 다른 식의 명칭일 뿐입니다. 실제로 복음서 안에서 ‘갈릴리’ 호수는 ‘갈릴리’, ‘게네사렛’, ‘디베랴’ 세 가지 명칭이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도 자신의 복음서 안에 두 용어를 모두 사용하기도 합니다. 먼저 ‘게네사렛’이라는 명칭은 ’키노르’ 즉 ‘수금’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와 달리 ‘갈릴리’와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 주변의 도시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호수를 어느 지역에서 바라보고 있는지에 따라, ‘갈릴리’ 호수라고도 불리고 ‘디베랴’ 호수라고도 불리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며 3년간의 공생애 활동이 펼쳐졌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디베랴’는 어떤 도시일까요? ‘디베랴’는 ‘헤롯’ 왕이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인정받기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건축하여 바쳤던 도시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이 ‘디베랴’ 바닷가라고 장소를 표현한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황제의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황제의 도시’란, ‘황제’를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도시를 뜻합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살아가시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이제 ‘황제’의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삶으로 떨어져 버린 겁니다. 그들 손에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버려두었던 고기잡이 ‘그물’이 다시금 들려졌고, 밤을 지세워야만 하는 수고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겁니다. 그런데 동틀 무렵 주님께서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그들을 다시금 찾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덤덤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벌써 ‘부활’하신 이후 세 번째 자신들을 찾아오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먼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쯤 되면 대체 예수께서 입으신 ‘부활’한 ‘몸’이란 어떤 것이던 것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부활’이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몸’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무언가 다른 몸, 그래서 ‘신령한’ 몸이라고 했던 겁니다. ‘부활’을 목격한 이들이라고 제자들을 부러워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결코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부활’은 너무 분명하게 느껴지다가도 또 어느 순간이면 없는 것 같고, 다함없이 감격스럽다가도 한순간에 허무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도마’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던 주님의 말씀이, ‘부활’이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경험하게 되는 사건임을 몰랐던 겁니다. 

     

    4.

    이제는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을, 눈으로만 찾으려 드니 제자들에게 도무지 주님은 계시지 않는 것만 같았을 겁니다. 그러니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을 겁니다. 마치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났던 ‘주간의 첫날’ 이전, 그러니까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렸던 그때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제의 세계,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날’들에 갇혀 있습니다. 특히나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그날, 자신은 주님을 배신한 ‘죄인’이라는 내면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고기를 잡다가도 불현듯 그날의 일이 떠오르기라도 할라치면, 스승을 배신했다는 정죄감과 수치가 그를 짓눌렀을 겁니다.

    오늘도 예외 없이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내용은 마치 제자들이 처음 주님과 만났던 그날의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처럼 그날도 밤세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남은 것 하나 없는 허무한 인생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을 건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 요한복음 21:6a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던 걸까?’ 허무하고 덧없는 일상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단박에 ‘주님’이신 것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자신들의 서러운 인생에 이처럼 따듯함으로 다가와 주신 분은 주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금방이라도 또다시 주님이 어디론가 사라지시기 전에 따라나서야겠다는 심정이었는지,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채 물로 뛰어들어 주님께로 향합니다. 하지만 막상 해안가로 나와 결국 주님 앞에 섰지만 도무지 할 말이 없습니다. 여전히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자라는 낙인과 정죄감이 무겁기만 한데, 미리 자신들을 위해 주님께서 준비해 둔 숯불과 조반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잔뜩 붙들려 있을 뿐입니다. 죄송스럽고, 더 없이 부끄럽습니다. 타박이나 원망이라도 좋으련만 주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뜬금없는 물음뿐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더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세 번의 물음과 ‘네 양 떼를 먹여라 네 양 떼를 치라’는 세 번의 부탁은, 주님이 이미 당신을 향한 ‘지금’, 그 마음 하나면 족하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베드로’는 조건도 차별도 없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다함없는 용납과 구원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무너졌던 삶의 의미와 소망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되는 겁니다.

     

    5.

    조금 더 본문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날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이 찾아내신 제자들은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두 제자까지 모두 7명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복음서 기자는 ‘유다’를 제외하고 남는 나머지 네 명의 제자들이 어디로 간 것인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고, ‘도마’는 드러내고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며 주님을 무시했었던 장본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신뢰’를 제자도의 자격으로 삼는다면 이들은 기준 미달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에 반해 ‘요한’과 ‘야고보’, 특히 ‘요한’은 예수께 사랑받는 제자라 불렸을 만큼 모범적입니다. 그리고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무명의 두 제자까지, 참으로 다양한 군상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친히 준비하신 식탁에 모두를 불러주셨고, 다시금 이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들의 면모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부르고 대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 안에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또한 누구도 소외되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과거의 잘남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고, 지나온 못남도 수치가 되지 않습니다. 넘치는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어찌 살았느냐?를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머릿말에 드렸던 말씀으로 돌아가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알 수 없는 정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하하고, 운명을 못마땅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 안에서 우리 중에 누구라도, 포기되거나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6.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을까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의 신앙이 과연 바른 믿음 안에 서 있는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쉬운 물음이 있습니다. 살아온 시간들, 우리의 선택들, 그렇게 쌓여 있는 자신의 과거를 기꺼이 용납하고, 기쁨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크신 하느님과의 화해, 생명으로 충만하신 주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반드시 우리 자신의 운명이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그분 안에서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앞으로 주어질 미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까지 인생 전체가 구원을 얻고 용납되었으니,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넘치는 기쁨과 자족함으로 채워질 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날 다멕섹에서 눈이 어두워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본래 보아야 하지만 보지 못하던 것을 마침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종말'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와 세상의 기만과 윽박지름이 아닌,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의 '부활'을 포착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고, 그래서 성전의 회복이 이루어졌던 '하누카'의 날, 다함께 뛰쳐나가 시편 30편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던 이스라엘의 기쁜 노래가 우리 삶 곳곳에서도 울려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둠이 짙고, 세상이 온통 엉터리 같고, 삶이 무겁기만 하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죽어있는 땅에도 생명을 돋게 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생명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넘쳐 흐르게 될 겁니다. 주께서 죽음을 이기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그를 찬미하시고 기뻐해야만 합니다. 죽음의 땅에서 울려퍼지는 그 기쁨의 노래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이웃들의 삶으로, 곳곳마다 강처럼 흐르고, 마침내 바다를 이루어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올 겁니다. 마침내 주님이 가지고 오실 그 날까지, 서 있는 그곳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부활'의 공동체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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