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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1/04 성탄절 후 두번째 주일 * 신년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25. 12. 31. 14:1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전도서 3:1-13

      응송 | 시편 8

    2독서 | 요한계시록 21:1-6a

    3독서 | 마태복음 25:31-46

     

    * 설교영상 및 음원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시간의 빈틈에, 영원을 심기

     

    1. 새로운 한해를 마주하며

    성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금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 서게 됩니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화려한 조명 뒤편에는 여전히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있고, 문명의 이기(利器)가 정점에 달했다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굶주림에 내몰린 이들의 눈물과 그런 이들을 서글프게 하는 불의함이 곳곳마다 가득합니다. 세상은 소득이 높아지고 기술이 발전하면 인류의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 말해왔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격차는 교묘해졌고,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를 소외와 차별로 내몰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새해가 되면 달라질 것이라 믿었던 오늘이지만, 별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과연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의 물음 에 대한 성서의 진술은 언제나 단호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밟아야 유지되는 이 세상의 문법으로는 결코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2. 세상의 불합리 앞에서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 조금 더 공정하고,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이 되기를 꿈꾸지만, 성서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계시록은 지금의 세상보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다 같이 잘사는 정도로 수선(修繕)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21:1)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시대와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판 자체가 뒤엎어져야만 합니다. 단순한 개선이나 개혁의 차원이 아닙니다. 왜 '좀 더' 나은 세상으로는 부족한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현재의 세상은 근본적으로 비교와 경쟁이라는 틀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강자가 약자를, 성공한 자가 실패한 자를 짓밟아야만 하는 방식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환난에 내몰린 이들을 돕자고 아무리 소리쳐도, 한편에서는 먹다가 지쳐서 버릴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우리 자신 또한 그런 형편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또는 "얼마나"와 같은 개선의 방식으로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3. 생명수를 얻는 나라 

    그러나 요한은 묵시 가운데 우리의 한계와 절망을 뒤집어 엎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세상을 엿보았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21:4.

     

    4절은 그 나라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전까지 죽음, 애통함, 아픔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야 드러날 세계의 모습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우리의 종말에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이 놀라운 메시지의 핵심은 6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21:6. 

     

    그날, 그 세계에서는 목마른 자들에게 생명수 샘물이 "값없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이사야 55:1. 

     

    아마도 요한은 환상을 경험하는 중에 구약의 이사야가 전했던 예언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철저히 효용과 가치를 따집니다. 쓸모를 입증한 사람,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 겨우 샘물 곁에 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던 것처럼 ‘돈 없는 자도 와서 사 먹되,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는’(사 55:1) 역설이 작동하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도구와 수단으로 내몰았던 역사를 가로막고, 결코 시장의 논리에 인간의 생존과 존엄이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창조주의 의지이며 선포입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가 읽어왔던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이런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이른 아침부터 일했지만 거의 끝 무렵에 들어온 이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품꾼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운운하며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만 받은 사람이나,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고도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이 내가 되는 순간 오히려 말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그 동안 나보다 적게 가진 사람,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는 비용은 낭비처럼 생각하는 세상, 얼마나 가졌느냐로 성공과 행복을 가늠하는 세상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4. 목마른 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목마른 자는 대체 누구일까요? 성경은 부유함을 행복의 근거로 삼지도 않지만, 물질적 가난을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욕망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도 부유한 이들과 똑같은 탐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더 가져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얼마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하는지 뿐입니다. 심지어는 교회 출석을 하고 있는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의 차원도 아닙니다. 진정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모든 생명의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따지고보면 인간이 삶에서 겪는 치열한 몸부림은, 결국 생명의 근원과 단절된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인 외침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 갈증을 존재의 주인이 아닌, 먹고 마시는 세상의 것들로 해소하거나 대체하려 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는 뻥 뚫려버린 영혼의 결핍을 채울 길이 없음을 알기에 오늘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의 한토막에서 이 고통을 사무치게 표현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

     

    오늘도 하나님의 채움을 경험하기 위해 타는 목마름을 안고 신음하듯 몸부림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먹고사는 일에 뒤처지게 된 그들을 향해 쓸데없는 것에 휘둘린다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한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으로 목마른 사람만이,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봅니다. 바로 그 시선 끝에 세상에서 실제로 목마르고 굶주린 '지극히 작은 자'들이 서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목마름은 필연적으로 이웃의 육적 목마름을 향한 긍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5. 지극히 작은 한 사람

    3독서인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는 이런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인자가 영광 중에 올 때,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세워질 겁니다. 그때 왕이 오른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25:35, 40.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너무나 성급하게 나 자신은 염소가 아닌 양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유념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영생과 영벌에 들어갈 이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의인들도, 형벌에 떨어질 자들도 모두가 똑같이 ‘대체 언제?’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날 드러나게 될 겁니다.

     

    두번째는 영생과 영벌을 나누는 주님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이라면 뭔가 대단한 일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님의 기준은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전부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볼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작은 자’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요? 따지고보면 얼마나 덜 가지면 작은 자이고, 얼마나 더 가지면 가진 자라고 할 수있는 것인지, 얼마 만큼 해야 칭찬받을 만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 모호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결코 ‘얼마나 많이’와 같은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 모두를 구원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만 응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도울 것인지, 어떤 이들을 영접하고 어떤 이들에게서 돌이킬 것인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심판, 즉 주님의 날에 잇대어 있는가에 대한 답이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따르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사로잡힌 시선을 돌려 주님의 날, 주님의 때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주님께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미 자신이 ‘작은 자’가 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들을 작은 자라고 할 것인지, 또는 얼마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같은 문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저 아파하는 삶에 함께 머물고, 절망하는 날들을 연대하며 이겨냅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삶이라도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베푸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6. 제 몫만큼 응답하기

    이제 제1독서인 전도서의 말씀으로 돌아가 오늘 새해 첫번째 주일 설교의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 전 3:1.

     

    전도자는 결코 삶의 허무를 노래하는 냉소주의자가 아닙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리듬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습니다. 전도자는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는 '때(Time)'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겸허히 고백할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세상은 무질서하고 불의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긴 호흡 속에서 역사는 그분의 '제때'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내일의 구원을 내가 성취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어진 '지금'이라는 선물을 누리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 3:12 ~ 13.

     

    세속적인 쾌락을 좇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래의 언젠가 거창한 유토피아를 명분 삼아 오늘 하루 만큼의 생명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은 오늘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건네는 물 한 잔의 '순간'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미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를 믿는 사람은 조급해하지도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쉽게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 나에게 허락된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응답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7. 때를 따라 아름답게

    우리는 여전히 시작과 끝이 언제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는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오늘을, 우리 앞에 놓인 작은 자 하나를, 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면 됩니다. 주님은 그것으로 우리가 양인지 염소인지를 판단하실 겁니다.

    성탄 후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오늘 우리는 세 본문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본문들 모두 한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어느 때에 이르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Kairos)을 맛보고 경험하며 살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모순투성이로 가득하고 살아가야 할 일도 팍팍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알맞은 때에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을 믿는다면,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런 날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럴 때마다 타는 목마름을 안고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오. 그런 갈급한 마음이 식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히 돌봐주십시오. 비록 거창한 변화는 아닐지라도, 여러분이 건네는 따뜻한 눈길 하나, 작은 나눔, 성실하게 응답한 하루 가운데 이미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씨앗을 담아두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심겨진 씨앗은 때가 이르면 반드시 결실하기 마련입니다. 마침내 드러날 그 날에 우리는 믿음 하나 붙잡고 걸어가고 있는 지금의 서러운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받게 될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오늘’은 모든 눈물을 씻어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안에 있습니다. 작은 이에게 손을 내밀고 작은 일에 충성하듯, 주어진 우리의 자신의 작은 몫만큼, 기쁨으로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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