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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1 주현 후 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6. 1. 7. 11:2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42:1 - 9
응송 | 시편 29
2독서 | 사도행전 10:34~43
3독서 | 마태복음 3:13~17
* 설교음원과 영상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조반니 벨리니 작 ‘그리스도의 세례’, 이탈리아 비첸차 비루함 속에 스민, 거룩함
1. 길을 잃은 정의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시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음’과 ‘과잉’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본의 욕망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를 외치며 끊임없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정의를 부르짖는 선동의 언어들로 가득 차 있으나, 정작 그 소란스러운 외침들 사이에서 참된 의로움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지 오래입니다. 말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물 한 모금을 얻지 못해 갈급해하는 기이한 모순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성서일과 독서본문들은 주현 후 첫 번째 주일을 맞는 오늘, 우리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문법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식’을 목도하라고 요청합니다. 그것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점철된 세상의 헤게모니를 뚫고 들어오는 침묵의 저항이며,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현실 한복판에서 피어오르는 생명의 역설입니다. 세 본문의 텍스트를 관통하며 흐르는 말씀의 숨결을 따라,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의 좌표를 다시금 깊이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2. ‘상한 갈대’이야기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는 ‘야훼의 종’의 모습은 오늘이나 그때나 낯설고 불편한 충격을 던져줍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학습해 온 영웅 서사나 구원자의 이미지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광장에서 군중을 호령하며, 자신의 위세를 만천하에 과시하는 승리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보낸 종의 모습은 세상에 비해 무력해 보일 뿐입니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 이사야 42:2세상은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해 기어코 제 목소리를 높이려 듭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애국심을 과대포장하고, 기업은 상품의 효용을 부풀리며, 사람들은 SNS를 통해 행복을 드러내고 과시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작동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그런 자기 과시나 선동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목소리 크기 대결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밑바닥, 그 비루한 현장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 이사야 42:3여기서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은 단지 읽기 좋으라고 쓴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이런식의 표현은 효율성과 생산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음’ 판정을 받은 잉여 존재과 그런 세상안에서 억눌리고 상처입은 공동체 모두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계산법으로라면 이미 부러져서 피리를 불 수도 없고 지팡이로 쓸 수도 없는 갈대, 기름이 다 떨어져 그을음만 내뿜는 심지 같은 것들은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경제적 합리성이고, 세상이 말하는 ‘정의’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기어이 이 폐기물들을 끌어안고 가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미쉬파트(Mishpat, 정의)’는 드러납니다. 부러진 것을 다시 잇고,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내는 것, 그리하여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들에게 다시금 생명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의 실체는 이런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외치는 정의는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을런지, 정의라는 미명 하에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며, 오히려 상한 갈대들을 무심히 짓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3. 경계를 허무는 정의
서신서로 읽은 2독서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 인간이 쌓아 올린 견고한 ‘분리의 장벽’을 뒤흔듭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는 철저한 차별과 배제로 작동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야 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깨닫고 전율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 사도행전 10:34b베드로는 지금 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던 출신, 학력, 재산, 지위 같은 모든 세속적 기준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혁명적 선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로 삼으셨다는 말씀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42).
‘심판주’라는 단어를 종말론적 공포로 읽게 된다면 성서의 의미와 복음의 깊이를 놓치고 맙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예수가 심판주, 즉 ‘기준(Canon)’이 되셨다는 말이고, 세상이 만들어놓은 모든 평가 기준이 폐기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구원의 기준으로 삼고 들여다보면, 돈이 많다고 해서, 권력이 높다고 해서, 혹은 종교적 열심이 특출나다고 해서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와 동시에 엄정한 경고의 말씀이 됩니다. 세상이 정한 기준과 방식대로 줄을 서고, 남들을 밟고 올라가 쟁취했던 성공들이 예수라는 기준의 심판대 앞에서는 헛된 먼지에 불과하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자들이라도 예수 안에 있다면 그들은 생명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는 심판주가 됩니다.
‘죄 사함’(행 10:43)이라는 말 또한 윤리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죄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행위를 넘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 즉 ‘존재론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분리를 봉합하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연결함으로써 삶을 비집고 밀려드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생명입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이 생명을 실감하고 있을까요? 여전히 세상의 평판과 인정이라는 가짜 생명줄을 붙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4.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어온 하나님
3독서인 마태복음 본문도 읽기에 당혹스럽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회개를 상징하는 요단강에 들어와 세례를 받으시는 대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모순을 견딜 수 없어 주님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지는 단호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 마태복음 3:15예수님이 말씀하신 ‘의(Dikaiosyne)’는 도덕적인 무결점이나 무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적 올바름’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하나님 수준으로 높이 올라오라는 강요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들의 자리, 죄와 오물이 뒤섞인 흙탕물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와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었고, 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의 비참함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며, 예수님이야 말로 이런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성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며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마 3:17이런 말씀을 읽을 때 신화적 상상력이나 초자연적 장면만 상상하고 소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폐쇄된 인과율의 세상,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현실에 틈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땅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질서, 하나님의 나라가 개입해 들어왔다는 겁니다. 심장이 뛸 만큼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소리’를 통해 우리들에게 지금 우리가 누구의 소리를 듣고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족과 결핍을 들춰내고, 그러니 더 가지라고 부추겼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실패를 정죄했습니다. 외면하거나 뿌리칠 수 없는 그런 소리에 주눅 들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는 다릅니다. 그 어떤 성취나 조건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쓸모나 효용을 입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라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 예수는 광야로 가서 마귀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존재 자체로 긍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런 하늘의 선언을 들을 때 비로서 죽음의 공포와 비교의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됩니다.
5. 부활을 살아가기
우리는 밥벌이의 지겨움과 생존의 위협이 엄존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의 하루라는 것은 정의니 생명이니 하는 말들이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고단하고 팍팍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는 더욱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땅의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이 지배하는 이 척박한 현실 한복판에서, ‘다른 차원’의 생명 원리를 붙들고 저항하며 살아내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생명은 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안락한 노후 자금이 불안을 잠재우거나, 죽음의 허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약한 갈대를 꺾는 모든 힘과 권세를 억누르고 막아내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모든 차별과 소외의 벽을 허물어트리는 그분의 공의, 그리고 기꺼이 흙탕물 같은 삶에 찾아와 우리를 사랑받는 존재라 말씀해주시는 그분의 음성안에서 참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놀이터에서 친구가 좋은 장난감을 가졌다고 해서, 혹은 놀이에서 졌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넉넉하고 늠름하게, 오히려 친구에게 장난감을 양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집니다.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되는 한주간은 세상의 소음에 귀를 닫고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강요하는 욕망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상한 갈대 곁에 머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고,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 길 끝에 생명이 있음을 붙들 수 있는 믿음이 부어지는 날들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걸음이 쌓여,
예수께서 그러셨듯, 우리 또한 이 건조한 세상에 생명의 물길을 트는 작은 틈이 되기를,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 이 길위에 선 우리를 도우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그 길을 열어내실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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