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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18 주현 후 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6. 1. 14. 09:37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49:1~7
응송 | 시편 40:1~11
2독서 | 고린도전서 1:1~9
3독서 | 요한복음 1:29~42
* 설교음원과 영상은 주일 예배후, Youtube 채널을 통해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Verrocchio, Andrea del, The Baptism of Christ (그리스도의 세례 AD1475) 가리워진 것, 나타나는 것
1. 계량화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지금 모든 가치가 숫자로 환원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그 중심에는 자리하고 있는 것은 돈입니다. 삶의 행복은 통장 잔고의 액수로, 사람의 가치는 연봉과 아파트 평수로, 교회의 부흥은 출석 인원수로 계량화된지 오래입니다. 자본이 곧 신이 된 이 거대한 물신(物神)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강요에 내몰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선이고 가난하면 악이라는, 지극히 속물적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형편이 이러한데 우리가 교회안에서 내뱉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니 ‘거룩한 소명’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무척 한가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 우리의 삶이 물량적 가치로만 평가받는 그 비참한 환원주의의 끝에서, 우리는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운명의 닿을 어디에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봐야만 합니다.
2. 부르심 앞에 선 ‘종’
1독서인 구약 본문은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라는 절망의 시간을 견뎌냈던 ‘제2이사야’의 고백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당시에 이미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현실의 논리로만 본다면, 유다의 신 야웨는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패배한 무능한 신으로 추락해 버린 셈입니다. 패배주의와 냉소적 신앙으로 떨어진 권중들은 야훼를 향한 신앙이 아닌 힘과 권력이야 말로 진리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폐허 속에서 이사야는 납득하기 어려운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 이사야 49:1b.여기서 ‘태(胎)’라는 공간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시작점을 의미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 나의 노력, 나의 판단이 개입하기 이전의 절대적인 기원(起源)이며, 오늘의 현실 모든 것을 낯설음이 아닌 본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근거입니다. 이사야는 자신과 유다 민족이 처한 포로라는 비참한 현실을, 재수가 없어서 혹은 정치를 잘못해서 생긴 우연한 불행인 것처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신앙은 자칫 현실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운명론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고백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한 경험’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내 삶의 주권이 바벨론 제국의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태에서부터 지으신 여호와께 있다는, 존재론적인 주권 선언인 겁니다. 이게 바로,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해석하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이사야는 이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종’으로 규정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굴종과 비자발성을 내포한 불쾌함을 가져다 줍니다. 주인이 되기를 원할 뿐, 종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처절한 자기 인식,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거스르는 힘이 바로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아무도 이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하실 것이다’라는 그의 설교는, 당장 빵 한 조각이 급한 포로들에게는 공허한 헛소리, 터무니없는 망상처럼 들렸을 겁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보면 그는 그저 실패한 예언자일 뿐입니다. 그는 고립되었고, 수고는 헛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 이사야 49:4b적어도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의 평가, 타인의 인정,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막연해 보일 뿐인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심연에 자신의 삶 전체를 투신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런 태도가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불안하고, 섭섭하고, 억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내 삶의 채점 기준을 세상이 쥐고 있다고 받아들인 탓입니다. 세상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사야는 그 채점표를 찢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시선 앞에 단독자로 섰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던 그의 고백은 옳습니다.
3.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
2독서인 서신서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칭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칭찬의 이유는 1독서에서 읽은 이사야의 믿음을 닮았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 1:7‘하나님만이 나의 힘’이라고 했던 선지자의 신앙은, 초기 교회 안에서 고스란히 주의 재림을 향한 종말론적 소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언급한 ‘나타나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의 본래 뜻은 ‘덮개를 벗기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다’입니다. 주 오심의 날인 ‘종말’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광신적인 종말론자들의 전유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는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이 만큼 냉소적이고 냉랭한 신앙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재림 신앙이나 종말에 대한 감각 없이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신앙을 가지는 사람은 교회안에서 낯설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가 십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배우는 정도로 소비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다 종말이 언제쯤인지에 대한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림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입니다. 참된 생명,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완성될 생명의 실체는 아직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눈으로 보고 만지고 직면하게 되는 모든 것들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라고 하는 제국, 그 화려한 도시 문명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감추어진 예수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날(Apokalypsis) 그 순간만을 갈망했습니다. 막연하고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통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이런 종말론적 신앙을 살아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깨달음이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른 믿음으로 살아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울 사도는 그들이 종말을 향한 기다림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코이노니아’,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9절). ‘교제’라는 이 말은 흔히들 생각하는 단순히 교회에서 커피 마시며 친교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부활하여 새로운 존재 방식이 되신 예수, 그 생명의 원천과 지금 여기서 깊이 연결되는 신비적 연합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란, 아파트 값이 오르기를 기다기고, 성공하는 삶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그날을 기다리며 그 날에 제 운명을 걸며 살아가는 겁니다.
4. 무지(無知)를 깨우치시는 성령
3독서 복음서는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향해 나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31절, 33절 두번이나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당대 최고의 선지자로 여겨졌던 세례 요한조차 예수를 몰랐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안면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존재가 지닌 신적 본질,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보냄을 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었다는 실토입니다. 쉽게 말하면 미처 알아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을 안다’, ‘예수를 안다’고 말하는 우리와 다른 모습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직접 들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의 앎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 그러니까 생존에 필요한 정보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돈 버는 법, 건강 관리하는 법은 기를 쓰고 알려고 하면서, 정작 내 영혼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해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지식에는 능숙하면서, 정작 생명의 주인에 대해서는 무지에 머물러 있는 ‘영적 불감증’이야말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런 무지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앎의 세계로 도약했습니다. 그 도약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 요한복음 1:34.그날 요한은 이전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의 외모나 화려한 기적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동안 잠들어 있던 영적인 감각이 깨어지며 포착된 ‘성령의 임재’였습니다. 자기 인식의 감옥을 깨고, 외부로부터 침투해 들어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목격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습니다. ‘어린 양’은 세상의 눈으로 볼 약해 빠진 존재입니다. 구원자라고 하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힘센 존재 쯤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눈을 뜨게 된 그는 무력해 보이는 어린 양에게서,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이런 인식론적 전복이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로 떠나보내며 기꺼이 쇠하여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세상은 힘을 숭배하지만, 성령을 본 자는 십자가의 약함을 숭배합니다. 세상은 소유를 자랑하지만, 예수를 아는 자는 비움을 실천합니다. 진짜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5. 거룩한 부르심을 향하여
이 시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인이 되라고 강요합니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너라고, 네가 가진 것으로 너를 증명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매인 ‘종’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사야처럼 실패한 목회자로 보일지라도, 세상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판단에 내 삶을 맡길 배짱이 있습니까? 바울처럼 2천 년의 침묵 속에서도 본질의 드러남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갈 인내가 있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어린 양을 따를 영적 안목이 있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성서일과 세 본문은 ‘보라’는 하나의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세우시는 종을, 세례자 요한은 성령이 머물고 있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생명의 드러남을 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막연하신가요? 우리는 ‘고난받는 종’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시어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주현절의 계절, 모쪼록 죽음으로 덮인 어둠의 땅을 밝히신 주님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젖히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날이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드러남의 역사가 있기를 빕니다. 모태에서부터 우리 존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부르시는 하늘의 음성에 응답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복된 길, 세상이 알지 못하는 주님이 동행하시는 평화의 삶이 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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