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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5 주현후 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6. 1. 20. 11:31
# 성서일과 독서본문
1독서 | 이사야 9:1~4
응송 | 시편 27:1, 4~9
2독서 | 고린도전서 1:10~18
3독서 | 마태복음 4:12~23
* 설교음원과 영상은 주일 예배후,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제임스 티소, <너희는 기적을 위해 나를 따른다>, 1886-1894 무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껍질을 벗고, 다시금 삶으로
1. 소비되는 타인의 고통
제1독서 구약 본문으로 우리는 지금 기원전 8세기, 그러니까 2,700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울려퍼졌던 울부짖음을 읽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의 시대상을 본문속에서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유대민족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과연 오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하는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절박한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좀처럼 그들이 처했던 절망의 깊이를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말씀'이라고 성서를 추켜세우지만, 정작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처절한 신음소리를 들으려고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마치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나의 일이 아니면 그저 먼발치 풍경처럼 여기는 불감증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 빛은 '소유'가 될 수 없다
이사야가 들춰내었던 '어둠'과 '캄캄한 땅’, 빛이 부재하다는 그 말은 곧 '생명'이 차단된 죽음의 땅을 뜻합니다. 과연 그 시대만 그러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십시오.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치적 혼란, 경제적 빈곤, 질병? 물론 물리적인 현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생명'이 아닌 것을 '생명'이라고 믿고, 그것을 얻지 못해 조급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시대의 구원이란 돈, 성공, 건강, 명예 따위입니다. 이것들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상대적인 조건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을 생명의 원천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지식으로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런 조건들에 목숨을 겁니다. 많이 가지면 행복하고 적게 가지면 불행하다는 천박한 물량주의가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가져도 불안하고, 조금만 잃어도 세상이 무너진 듯 절망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주어진 우리 각자의 삶은 일그러지고 깨어지곤 합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살고 있지만, 실존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힌 꼴입니다. 선지자가 말했던 ‘어둠’이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빛이 비쳤다.”
| 이사야 9:2그가 말하고 있는 빛이란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늘로부터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빛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값없이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 이사야 9:4선지자는 이런 사실에 터잡아 평화와 구원도 하늘로부터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통찰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고 앗수르의 군화와 채찍 아래서 신음할 때, 바벨론에 의해 망했을 때에도 이스라엘은 스스로 그 멍에를 벗을 힘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빛은 외부로부터 왔습니다.
오늘 주어진 운명과 치열한 삶의 무게를 벗어낼 수 없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쟁취한 성취물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사는 삶,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노예의 삶입니다. 늘 무언가에 쫓기고, 비교하고, 두려워하는 삶은 캄캄한 감옥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참된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가짜 생명줄인 돈, 명예을 움켜쥔 손을 놓아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적인 생명의 빛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늘 말씀드리듯 이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쥐고 있는 것은 언젠가 시들고 썩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임하는 빛, 움켜잡을 수 없는 빛 만이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게 합니다. 2,700년이 지난 지금, 이사야의 예언은 오히려 더욱 절실한 실존적 진리입니다.
3. 형식이 본질을 대체한 시대
'생명의 본질’이란 이런 식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교회는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상황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라며 파를 나누어 분쟁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들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이가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파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갈라졌을까요? 13절 이하를 보면 '세례'가 쟁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 기독교의 권위자였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자유의 복음을 전한 자였습니다. 교인들은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준 메신저의 권위에 줄을 섰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를 통해 자신의 영적 수준을 드러내려고 했던 겁니다.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누구의 라인이냐’는 형식만 남은 겁니다. 예수의 정신보다는 어느 교단, 어느 대형교회, 어느 유명 목사 밑에 있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오늘 교회의 병폐가 고스란히 겹쳐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라는 알맹이는 내다 버리고, 포장지를 가지고 싸우는 유치한 작태는, 명백한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교회를 칭찬하던 바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전서 1:17바울은 껍데기를 거부하고, 형식이 본질을 삼켜버리는 교권주의를 경계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많이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세례라는 예식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道), 즉 자기를 비워 하나님에 의해 살아나는 그 본질적 사건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강박, 특정한 종교적 행위를 해야만 만족감을 얻는 태도, 교회 라고 하는 조직 안에서의 인정욕구까지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말의 지혜’일 뿐입니다. 생명은 결코 파당을 짓는 일이 없습니다. 생명은 흐르고 연결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당을 짓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재하고 오직 권력 투쟁과 죽음의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과연 '형식'에 매몰되어 있을까요? 아니면 '본질'을 붙들고 있을까요?
4. 돌이킴의 삶, 메타노이아
3독서 말씀으로 마태의 복음서를 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 중의 변방 '가버나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태는 이곳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고,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예루살렘은 1등 시민의 도시였고, 갈릴리는 버려진 실패자들의 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수도 서울이 아닌 지방, 소외된 자들의 거주지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어둠'이라고 부릅니다. 실패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 희망이 없는 땅이라고 섣불리 낙인찍으려드는 겁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자랑거리를 부끄러움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놀랍게도, 그 '변방'에서 하나님의 빛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예수께서 흑암 속에 있다고 멸시받던 갈릴리 사람들곁에 계셨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아니 마치 자신들이 빛인 것처럼 으스대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작 영적 맹인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좋은 집에 살고,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남부러울 것 없는 스펙을 갖추면 내 인생은 '밝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조건이 좀 나아지면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한 것이 우리입니다. 하지만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썩어문드러진 삶이 수두룩합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었을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이 꿈틀대는 삶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질은 외형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버려진 땅이라고 여겼던 가버나움을 찾으신 예수께서 내뱉은 첫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눈물 몇 방울 흘리는 반성이나 후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뜻의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는 식의 구호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는 존재의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성공과 욕망을 좇던 삶에서, 이전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를 모두 벗어던지는 삶으로의 요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인 하늘나라로 삶의 방향키를 완전히 돌려야 한다는 혁명적 요구인 셈입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는 바로 여기, 현재적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고,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교로만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 마태복음 4:23b예수께서는 흑암 속에 방치된 자들, 병들고 귀신 들려 인간 취급 못 받던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료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닌, 세상이 버린 자들에게 "너희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존엄의 회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손길과 말씀을 통해, 존재의 절망에 떨어진 사람들이, 영적인 자존감을 회복했습니다. 세속적 잣대로 가늠지어 노예처럼 전락해버린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이처럼 생명은 관념에 머무는 것이 아닌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겁니다. 반드시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믿음은, 생각과 선택, 행동과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겁니다.
전쟁이나 사회적 참사가 끝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남겨진 가족들의 심정을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참담한 비극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은 오만과 폭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침묵하며 그들의 고통 곁에 서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 이전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그 처절하고 저주스러워 보이는 그 죽음의 현장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함께하고 계신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죽음의 운명 조차 깨트리며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별일 없는 봄날의 위안처럼 허무한 것이 되고 맙니다. 빛은 대낮같이 밝은 곳에서는 필요 없습니다. 빛이 존재를 드러내는 곳은 캄캄한 어둠, 절망의 밑바닥입니다. 가버나움 같은 우리 삶의 현장 말입니다.
5. 생명은 살아내는 힘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세본문은 신자인 우리들에게 껍데기를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알맹이와 본질을 붙들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사야가 지적했던 당시의 사람들처럼 정치적, 군사적 안정같은 힘이나 능력에 몸달아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처럼 종교적 형식이나 인맥이나 경험을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부를 향한 기대감을 채워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께서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신 그곳이 바로, 가버나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런 삶에서 하나님은 경험됩니다. 아니, 그런 삶을 복있는 삶으로 일구어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잘 포장된 종교적 의식 속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파당을 지어 서로를 배제하는 짓, 나는 이만큼이라는 자기의를 드러내는 일을 멈추십시오. 먼저는 실패와 내몰림 같은 칙칙한 어둠에 휩쌓인 내 삶을 하나님께 개방하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셨고, 또한 함께 하시는 땅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방향을 내 욕망의 성취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통치로 돌리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으니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로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요구하신 ‘회개’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응답함으로 믿음을 드러낼 때, 비로소 아무리 캄캄한 가버나움일지라도,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늘의 빛이 쏟아지는 찬란한 하나님 나라가 될 겁니다. 예수를 믿고 본질을 붙드십시오. 생명을 사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여러분의 실존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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