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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부인' ... 그 살아감의 길목회 일기 2018. 7. 6. 19:19
...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태 16:24
1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어디에 있을까 ?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신앙함의 길이 향하고 있는 곳은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요약되어지는 삶은 ‘자기 부인’에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선명할 수록, 살려는 본능과, 채우려는 욕망의 실체인 나 자신을 부인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니, 호흡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언사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 ‘자기’를 ‘강화’시키는데에 익숙하다
우리의 삶에서 포착되는 모습이 늘 그렇다
‘나’를 삶의 중심에서 덜어낸다는 것은 평생에 씨름해야할 몫인지도 모르겠다
2
가끔은 ‘나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다’ 거나, ‘십자가를 완전히 통과하였다’고 하는 용기?있는 고백을 들을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말이라도 그리할 수 있음이 부럽기도 하지만, 실상 마음이 ‘철렁’해진다
‘자기 부인’을 종교의 언어 즈음으로 자리매김시키는 우리는, 교회를 나간다거나, 주일을 지켜낸다?라거나, 혹은 전도나 선교를 결심하거나 하는 과정 어디 즈음에선가 ‘자기 부인’의 단어를 끄집어 내곤한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해야하는 곳은 우리의 매일, 매 순간에 있다 ‘살아감’은 특별한 어떤 사건이나 순간일 수 없다 반복되어지는 무감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한 사람의 ‘살아감’ 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의 부름의 자리는 우리의 일상에 있다
3
‘나’를 중심으로 채워지고 강화되어 가는 삶,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기쁘게 할 것들에 대한 기대감의 배신앞에서, 그 집착된 나의 죽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해낼 수 있는 것이 ‘자기 부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를 따를 수 있다 썩어질 것들에 나를 기대면서 예수를 따를 수는 없다
예수의 십자가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던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사망하였다고 선언한다
살아있음을 ‘죽어있음’으로 볼 수 있을 때에야 ‘자기 부인’이 가능하다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다’ 라는 ‘부활’의 정체성은 여기에서 경험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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