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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3 성령강림후 18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0. 12. 20:25
1 독서 | 예레미야 29:1, 4~7
2 독서 | 디모데후서 2:8 ~ 15
3 독서 | 누가복음 17:11 ~ 19
응. 송 | 시편 66:1 ~ 12
설교음성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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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비롯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마주치게 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여전히 유대교의 모습을 유지한 채였습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실제로 예수님도, 바울도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와 유대교가 달라졌던 가장 큰 차이, 그러니까 유대교와 구분되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 (야훼)을 믿는다 것에 있어서는 유대교나 기독교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랍비나 예언자로만 평가할 뿐입니다. 이에 반해 초기기독교 공동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던 베드로의 고백이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던 도마의 고백은 바로 이점에서 빛이 납니다. 이들의 고백은 모두,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니 ‘예수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 입니다.
2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일치가 될 때에, 우리는 비로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은 믿고 있는 것을 경험해 가는 것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교회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 교회안에는 교제와 봉사, 섬김 기타 등등 수 많은 조직과 다양한 사역들이 있지만, 결국은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경험’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의 핵심에 ‘예배’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예배’외에 다른 것들은 사실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일이나 사역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일의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가장 본질적인 은총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의 대부분의 시간을 주어진 세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지내게 됩니다. 소유와 경쟁이라고 하는 세상의 기준과 틀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돈을 버는 도구, 집단과 공동체를 위한 소모품만 남게 됩니다. 그런 자아 상실, 생명의 고갈로부터 다시금 우리를 붙잡고, 지탱하고, 일으켜세우는 것은 나 자신이 소모품이 아닌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기억뿐입니다.
‘예배’는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피곤함, 슬픔, 고통, 낙망함 … 이 모두를 끌어안은 채 하루 하루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다시금 해석해 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런 삶을 감당하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런 세상에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시기에 주어진 몫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가 버려진 존재가 아님을 확인받게 해주며, 그렇게 우리를 붙들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환희와 감동과 찬양과 경배로 가득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내고,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내 삶의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걸음위에 임하는 자유와 해방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경험입니다. 구원의 경험은 하나님 경험을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만이 구원의 경험입니다.
지금 !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로 가득차 있습니까 ? 이 아침의 예배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을 통해 우리 모두의 가슴안에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기쁨과 찬양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예수는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가고 계셨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마을에 이르러 열명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나병환자 ( 한센병 ) 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 그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지금이야 인식도 많이 좋아지고, 치료법도 많이 개발되고 있지만, 고대시대에 나병은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살이 썩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하늘이 내린 천의 저주라고 여길 법도 합니다.
유대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들은 성 밖에 거해야하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버려진 사람들, 누구도 기억하지 사람들입니다. 이전에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떤 명성이 있었는지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지금은 기억에서 버려진 사람입니다 !’
스스로 사람들앞에 나설 수 없던 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필사적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더욱이 그는 병을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는 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상황입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니 애타게 예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뭔가 부자연스럽습니다. 누가는 그 모습을 ‘그들이 멀리 서서’ ( 메시지성경 _ '그들이 거리를 두고 서서' )라는 말에 담아냅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줄 수 있는 분이 오셨는데,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야할 텐데, 나병환자가 사람을 만지거나 다가가면 돌로 쳐죽일 수도 있으니, 그저 멀리 서서 어쩔 줄 몰라할 뿐입니다. 한번만 돌아보아주기를 바라며, 목이 터져라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버려진 그들의 소외와 고독감의 깊이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 그러나 레위기 법에 따르면 일반인들을 만났을 때 나병환자의 입에 담겨야만 하는 유일한 말은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레 13:45)뿐입니다. 모든 깨어진 삶은 ‘나 때문입니다’라는 슬픈 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자 그들의 말은 간절한 언어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사회에서, 신앙공동체안에서, 그리고 가족들에게 버려진 그들입니다.
예수는 지금 그런 이들의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상하고 헤어져 버려진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 고통의 자리에 찾아와주십니다. (*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com + passion’ 고통을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
4
그런데 조금 특별한 것이 눈에 띄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별반 다른 조치는 하시지 않습니다. 만져주시거나 ‘나았다’라는 선언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이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왜?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
그들은 이미 제사장으로부터 ‘부정한 자’라고 정죄되고 버려졌던 이들입니다. 제사장은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들을 내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운명이 깨어지고 말았던 그 출발점으로 다시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길에 몸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기가 막히고 놀라운 일입니다. 너무나 잘된 일입니다.
그 끔찍한 아픔으로 기억되던 곳, 세상 누구나 버리고 마는, 포기하고 마는, 가족조차 어찌할 수 없어 자신들을 버리고 포기했던 그 아프고 처절한 곳, 생각하기도 싫은 아픔이었을 그 자리를 향해 돌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따듯하고, 너무나 감동스럽습니다. 주님에 의해 그들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제사장에 의해 나병환자로 낙인찍혔던 그들의 기억은, 하나님 말씀은 잔인하고 끔찍하다! 라는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로 남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 말씀은 살림의 말씀이라는 새로운 기억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 그 동안 헤어져있던 가족들 생각부터 나지 않았을까요 ? 구속되고 매어있던 곳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기쁨을 찾아 달음박질부터 할 터인데, 15절을 보니 병이 나았음을 확인하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는 곧장 예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19절에 이르러 비로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해 주십니다. ‘나병이 나았다’라고 하는 제사장의 선언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선언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돌아온 사람, 즉 사마리아인은 ‘믿는다’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을 보셨길래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이 있다고, 그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언하셨던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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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시선에 인상깊게 남는 장명은 어떤 것입니까 ? 나병환우들이 나병이 나았다는 장면입니까 ? 아니면 기쁨에 겨워 제사장들을 향해, 가족을 향해 뛰어갔을 모습입니까 ? 하지만 아마도 초대교회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본문속에서 한 장면만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 는 대목입니다.
설교 초입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는 가장 큰 사건은 누가 뭐래도 ‘예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다 ! 예수야 말로 하나님이 아들이시다 !’가 그들의 신앙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예수께로 돌아온 것은 바로 이 사실,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교리적으로 정리된 내용이 아닌,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계십니까 ? 예수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음을, 삶에서 경험하고 계십니까 ?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안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모른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아닌가요 ? 성경이 주목하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목숨을 걸고 좇던 예수께로 더 가까이,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한 채, 그저 교회생활, 종교생활만 익숙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저 내 경험만 강화시켜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여러분에게도 ‘예수’는 전부이십니까 ? 여러분은 지금 예수 안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
그러고 보니, 누가가 돌아온 이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한 이유가 짐짓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 혹은 다른 유대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이 그렇게 천박하게 여기는 사마리아사람만이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았고, 예수로부터 구원의 선언을 받게 됩니다. 어쩌면 나머지 아홉명은 유대인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아는 이들인데,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기쁨을 ‘모든 것’으로 누리는 이는 이방인인 ‘사마리아인’ 뿐입니다. 어쩌면 누가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보다 하나님을 더 모른채, 예수가 구원이심을 경험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 교회안에 있는 ‘우리’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어쩌면 우리는 병이 나았다! 라는 사건만 바라본 채, 여전히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나머지 아홉명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인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언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입니다. 물론 불치의 병에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기쁜일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이 또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질병에서 나음을 입는 것이 ‘구원’이라면 나머지 아홉명도 나음을 입었는데, 유독 이 한 사람에게만 ‘구원'을 선언하셨으니 여기서 예수가 말씀하시는 ‘구원’은 단순히 병에서 낫거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구원’은 이 다음에 죽어서 천국가는 것에 국한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에게 선언된 이 놀라운 ‘구원’은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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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에서 나음을 입은 아홉명의 사람들도 나병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서러움이 이제는 모두 지워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건강 뿐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여줄 가정, 사회, 교회 모두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정말 기쁜 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선언뿐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나병에서 낫게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고,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런 기쁨도 결국은 ‘죽음’앞에 퇴색되어버릴 것 입니다. 사마리아인의 경외의 대상은 기적 처럼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나병 조차도 낫게 하시는 능력이신 하나님을 예수안에서 경험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실제였고, 그에게 예수는 하나님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안에서 하나님께 용납되고,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십니까 ?
하나님 경험, 즉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나병환자처럼 행동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이 전에, 내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셨다는 것,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으니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어진 삶을 하나님안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예배의 자리를 찾습니다. 예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을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밖에는 찾지 않고, 그 일외에 다른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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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예수를 경험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해석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 없는 것이나 주어진 것들은, 깨어진 것이나 회복된 것, 잃은 것이나 찾은 것, 절망하는 것이나 찾아낸 꿈 모두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본질입니다. 그 경험만이 충만한 기쁨과 구원의 감격으로 이끌어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소망을, 말씀을 통해 자유를, 말씀을 통해 회복을, 말씀을 통해 구원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유다백성들에게, 편지를 써 보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_렘 27:5~7
지금 예레미야의 말은 민족을 배신하라는 것일까요 ? 아니면 사실 그는 현실주의, 기회주의자였던 것일까요 ? 그도 아니면 이미 망했으니 다 포기하자는 것일까요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_10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루실 놀라운 역사 (정확히 칠십년의 때가 채워진 그 날에 이루실)에 자신과 유다 민족의 운명을 투영시켰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고,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도 외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_딤후 2:9
‘하나님 경험’이라는 본질에 주목하는 사람은, 생, 노, 병, 사의 운명안에 매어진 어떤 상황에도 주어진 길을 흔들림없이 오롯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하나님이신 그의 말씀이 어떤 상황에도 매이지 않는 능력임을 믿고, 또한 그런 말씀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병에서 나은 사마리아인처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 그것 뿐입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나병환자처럼 결박에서 벗어남을 경험할 때에나, 예레미야처럼 나라를 빼앗길 때, 혹은 바울처럼 감옥에 매어있는 때에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비로서 예수의 음성이 들려 올 것이며,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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