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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20 성령강림후 19주
    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0. 19. 14:54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31:27 ~ 34

             2독서 | 디모데후서 3:14 ~ 4:5

            3독서 | 누가복음 18:1 ~ 8

             응   송 | 시편 119:97 ~ 104, 혹은 121편

     

    설교음성

    https://drive.google.com/open?id=1fxtpmKb0cIOh3b9mWRnMVSroN-tSKveh = '클릭'하시면 설교음성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QINo8stwpAA = '클릭' 하시면 설교영상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믿음'"

     

    1

    여러분은 혹시 ‘강청 기도’ ! 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 간청(懇請)이 아닌, 강청(强請)말입니다. 우리 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복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신앙안에는 때를 쓰듯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도 되돌릴 수 있다는 강한?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여전히 이런 기도가 존재하고, 이런 기도를 장려하거나 무분별하게 강요하는 설교도 들리우는 것이 실제입니다. 그릇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체성인,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왜곡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무지함의 결과일 뿐입니다. 기도는 때를 쓰며 하나님의 뜻을 꺾어내고, 우리의 뜻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옳으신 뜻앞에 나의 뜻이 꺾어짐을 경험하고, 나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요한은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이이신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음으로, 기도가 수단이 아닌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녀됨의 기쁨을 누리는 경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의 말씀의 내용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백합니다.

     

    한 마을의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유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인지 억울한 일이 있었지만 해결할 수 없던 그녀는 결국 재판장을 찾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보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그는 억울함을 신원하는 그녀의 간청을 외면하고 묵살합니다. 귀찮았을 것입니다. 대단한 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힘없고, 능력없는 과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끈임없이 재판장을 찾아갔고, 결국은 귀찮고 번거로워서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게 되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앞서 말했던 ‘강청기도’의 근거 말씀으로 자주 언급되는 본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강청하였더니, 귀찮아서라도 들어준 것처럼, 주님도 우리가 기도하고 기도하면 뜻을 돌이키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 !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귀찮아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응답이 되었다는 것이 대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인데, 서럽지 않으십니까 ? 이런 분이라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더욱이 본문의 마지막 8절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다시 말해 ‘세상에는 믿음이 없다’ 라는 뜻인데, ‘강청’하면 들어주신다! 라는 꿈같은 이야기로 본문을 해석하기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3

    그렇다면 이 비유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 우리는 본문 앞에서 질문해야만 합니다.

    신약성서를 읽어나갈 때 목적지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말씀을 처음 읽고 있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의 눈입니다. 그들의 컨텍스트(삶의 정황)가 복음서가 지향하고 있는 1차적인 삶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본래의 의도와 목적에서 일탈하는 성경읽기를 피하기 위해서 간과해서는 않되는, 반드시 고려되어야하는 자리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에게서 여러분은 어떤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 어떤 문제, 어떤 억울함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억울함은 그녀의 온 삶을 ‘간절함’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핀잔과 모욕감속에서도 이방인 재판장을 찾아 갔겠습니까 ? 사랑하는 자녀를 군에서 잃은 부모가, 혹은 뺑소니를 당해 누워있는 자녀를 둔 어미가, 때로는 억울한 재판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자녀를 둔 부모가 어떻게 사는지 보셨을 것입니다. 법정 앞에, 병원앞에, 국회 앞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켓을 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며 삽니다. 어떻게 저러고 살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분들께는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억울함을 씻게 되는 것만이 그 삶을 지탱하는 근거입니다. 그 ‘간절함’과 ‘절박함’이 그들의 삶을 이끌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아침의 예배로 여러분을 이끌었던 그 ‘간절함’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주님앞으로 여러분의 걸음을 이끌었던 그 ‘간절함’의 자리를 주님께서 갚아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방인 재판장에게 달려가서 매달렸던 과부의 절박함은 이천년전 즈음 본문앞에 섰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간절함과 겹쳐집니다. 그들의 신앙의 자리를 지탱해왔던, 구하고 또 구하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하였던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삶의 근거가 되었던 유일한 ‘절박함’은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 즉 ‘예수의 재림’이었습니다. 다시 오신다고 했던 예수의 재림은 점점 지연되고 있었고, 어느새 그들의 마음은 애가 타기 시작합니다. 불안하기도하고, 안타깝기도 했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롱이 들리고, 계속되는 박해와 핍박앞에 믿음이 흔들립니다. ‘주님은 언제 오시는 것일까 ?’ 지연되는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눈을 뜨고 보면 어제와 똑같은 오늘입니다. 다시금 기도하며 주님을 기다려보지만 오늘도 이 기도가 과연 응답되는 것일까? 라는 질문앞에 낙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하였고, 또다시 주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다시오실 주님을 제외하고는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비어짐을 채울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핍절된 엉터리같은 세상이 온전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의 재림이 이룰 세상에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기에,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록, 그런 매일이 쌓여갈 수록 그들의 간절함은 더 깊어만 갑니다.

     

    사람들은 그때에도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땅의 것에 만족하고, 가치를 추구하고, 천착하며 살아갑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의지하는 것이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구원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영적인 간절함과 절박함’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서 흔들리고 맙니다. 그렇게 초대교회안에도 세상을 향해 떠나간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남겨진 이들의 간절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_디모데후서 4: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은, 말씀에 붙들려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며 사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세상, 예수가 아닌, 이 세상의 신이 요구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고, 이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만족시키며 살게 만드는 것들, 그 유혹앞에 우리는 놓여 있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우리들 가운데에도 어느새 이런 유혹에 마음을 빼앗겨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강청해서 세상의 권세, 명예를 얻으라거나, 부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성장시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성공했다고 복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만족, 구원의 경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도록 곁길로 부추기는 것들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 말씀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고, 예수가 다시 오시는 그 재림의 날에 온전한 구원의 완성이 담겨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재림만이 인류의 소망이라는, 그 절박성에 운명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런 절박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느새 세상의 방식에 타협하며 그냥 적당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일상의 필요한 것들을 채우라는 세상이 요구하는 말에 자신을 매몰시키고 맙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쟁에 내몰리고, 삶은 피폐해지고 만족함이 사라지고 맙니다.

     

     

    4

    주님의 약속과 오늘의 결과 사이에 벌어진 ‘갭’과 ‘차이’가 발견될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 차이를 메꿀수 있는 것은 그야 말로 ‘믿음’ 뿐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기도’입니다.

    요즘은 기도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하는 ‘맹신론’과, 기도해봤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도는 단순히 사람의 심리적 안정을 주는 허위일 뿐이라고 외면하는 ‘무용론'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방법이 아니라, 나는 무익하고, 무능하다는 존재론적 경험을 한 성도의 삶의 태도,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 기도한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께만 관심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이 있고, 다른 구원이 있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재판장이 들어주지 않고 있지만, 과부에게는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그에게 외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기도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답이 없고, 길이 없고, 살 수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다는 ‘간절함’, 하나님께만 소망을 갖는 그것만 ’믿음’이 있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기도는 그래서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은 포기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5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패망의 이유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너지고 망하게 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사람은 결코 악과 죄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출애굽 때 받았던 약속인 율법을 기준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준에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은 단 한번도 이 약속을 지켜낸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옛 언약의 약속을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 말씀앞에 섰던 예레미야는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31:34b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를 때에만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해주시겠다’는 옛 언약의 파기선언인 동시에, 새로운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무조건 용서하시고 용납하셨음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일방적인 용서의 선언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내야하는 옛 언약이 아닌, 일방적인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선언인 새 약속안에서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확인하고, 고백하며, 그 약속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6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따라야할 길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이 없이는 흔들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고난도 찾아오고, 환난이나 시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 찾아올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 주님을 기다리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세상의 이야기와 현실속에서 낙담과 포기를 강요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하고, 세상이 아무리 크게 보여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외에는 다른 답이 없는 영적인 절박함을 가진 이들에게는 ‘네 원한을 풀어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속히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모든 절망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구원의 능력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세상속에 서 있는 우리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복음을 전하라’는 바울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 _디모데후서 4:1 a

     

    우리가 믿어야할 것도, 지켜야할 것도, 전해야할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며 생명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준엄한 사실을 믿으며 사십시오. 복음을 전하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기도하면서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나는 무능하고, 인간은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만이 답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답은 없습니다. 다른 구원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아닌 다른 곁길로 유혹하는 그럴듯한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복음’아닌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사십시오. 이것이 세상 끝날 보게될 ‘믿음’입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 아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_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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