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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3 성령강림후 21 째 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0. 30. 16:15
성서일과
1독서 | 하박국 1:1 ~ 4 ; 2:1 ~ 4
2독서 | 데살로니가후서 1:1 ~ 4, 11~ 12
3독서 | 누가복음 19:1 ~ 10
응 송 | 시편 119:137 ~ 144
설교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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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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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바늘귀에 들어가다 !1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진 기온과 함께, 저 멀리서 겨울이 찾아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요즘은 운전을 하는 마음이 새롭습니다. 분명 같은 길인데 펼쳐진 그림이 완전히 달라 보입니다. 어느새 그렇게 세상은 울긋불긋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세상 만물이 다 이렇게 주어진 때를 따라 변화되어가는데, 과연 사람은 새로워질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에 이르렀는데, 가을이 더 쓸쓸하고 스산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늘상 깨어지고, 언제 내게도 믿음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형편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이기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겠지요. 감흥없이 지나칠 때도 있지만, 어느 한날 갑작스레 깨어지지 않고, 도무지 변화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자괴감이, 찌르는 흉기처럼 날카롭게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 하박국 선지자의 하나님을 향한 절규가 마치 우리네 서러운 모습만 같으니 안타깝게만 보입니다.
-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_합 1:2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인도하심 따라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된 이 민족이, 어느새 제국의 폭력과 죄를 따라 살고 있는 타락한 모습에 선지자의 마음은 타들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성취해내지 못하는 이 안타까운 현실앞에, 선지자의 외침은 이제는 ‘정말 할 수 있을까 ?’, ‘우리가 변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 마져도 사치스러운 듯,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는 현실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앞에서 다시 일어선 하박국 선지자는 지금까지의 고뇌와는 전혀 결론을 선포합니다.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_ 합2:4
현실을 볼 때는 소망이 없고, 이처럼 깨어진 이스라엘만으로는 희망이 없지만, 이런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아니 역사를 뚫고 들어와 그들을 건져내셨던 하나님이 새로운 소망과 희망이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되는 내일, 이스라엘이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내일, 세상이 바뀌어지는 내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소망을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잇대어 있는 믿음안에서 찾아내었습니다.
2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주님이 걸으셨던 걸음은 언제나 고달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온 삶과 영혼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순간에도 주님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이라고 말했는가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는 다른 하늘의 나라, 땅의 권세와 힘이 작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가 작동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과 예수의 삶은 그 자체로, 비록 깨어진 땅에서 사는 이들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가지는 꿈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꿈을 다시 꾸라고 하셨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해 죽는 것이 아니라, 꿈이 없어 죽는 법이라고 하지요? 과연 예수를 만난 우리는 어떻습니까 ? 우리의 삶, 우리의 신앙은 오늘 다시금 새롭게 변할 수 있을까요 ? 예수를 만났으니 꿈을 꿀 수 없는 현실에서도 하늘을 꿈꿀 수 있고, 밑둥이 깨어진 것만 같고, 늘 넘어지고 마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자취에 세워지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
비록 짧은 삶이었으나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이들을 만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만나는 이들마다 하나님을 가슴에 담아낼 수 있기를 꿈꾸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 하나 만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으셨지요.
함께 먹고 마시며,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제자들 마져도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했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사람은 늘 그렇습니다. 곧잘 해내고, 이제는 좀 그럴듯해 보인다 싶어도, 결국은 제 힘으로는 한 뼘도 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후에 예수를 찾아온 어떤 관리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부자청년이었던 이 관리가 ‘니고데모’였다고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도 존경받고, 말씀에도 신실했으며, 무엇보다 이 땅의 것에 메이지 않고 하늘을 꿈꾸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찾아온 목적이 성공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영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얻는 것인지 묻기 위함이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오늘 예수께서 우리가 모인 이곳에 오신다고 소문이 난다면, 분명 많은 사람이 모일텐데 아마도 그 목적은 이와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싶고, 불행히도 이 예상은 맞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수심이 가득하여 돌아가고 맙니다. 결국 예수님을 좇지 못하겠다고, 예수와 함께 하늘을 꿈꾸지 못하겠다고 돌아선 것이지요. 예수님의 실망감도 또한 대단히 컸던것 같습니다. 그가 떠나간 후에 제자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던 예수님은 아쉬움과 여운이 많이 남으셨던지, 그의 뒷모습을 보시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움켜쥐어내야하는 내것만을 생각하다보면,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든, 유익한 것이든, 염려나, 근심이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늘이 있으므로 땅이 있음이 분명함에도 하늘이 그렇게 비현실적이고 공허해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늘을 꿈꿀 수가 없습니다.
3
그와 헤어진 후, 예수님은 걸음을 여리고로 향하셨고, 그곳에서 우연치 않게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나시게 됩니다.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했었지만,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수탈하던 이들이었던데다, 로마에 대해 직접적인 반감을 표할 수 없었기에, 세리를 대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더 적대적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이런 ‘세리’들의 ‘장’, 그러니까 ‘우두머리’ 격입니다. 도둑놈 중에도 ‘대장’ 도둑놈인 셈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여리고 성내에서 삭개오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성내의 모든 사람들이 비난하고 욕하는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들 만큼은 그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지어준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이 본래 ‘ 깨끗함, 순결함, 정결함’ 이라고 하니, 그의 부모들은 그가 누구보다 순진하고 정결하여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기를 꿈꾸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게 키가 작은 육체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직업은 세리입니다. 매일이 사람들의 눈살이 찌푸러지게 만들고, 매일이 그렇게 욕을 먹는 삶입니다. 그것이 자존감을 무너트렸고, 남들앞에 떳떳이 설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삭개오 본인도 그런 자신의 운명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용납과 용서로 해소되지 못하고 자신안에 쌓이면 더 자신을 파괴하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그럴 수록 그는 더 악착같이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을 갚겠다’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노와 증오로 굳을 대로 굳어졌던 그에게,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병든자를 고쳐주고 사랑으로 용서하는 이가 여리고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버둥거리던 키 작은 그가 예수를 만나려면 남들보다 높은 곳을 찾는 수 밖에는 없었고, 때마침 사람들 키보다 훌쩍 큰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곤 그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노력을 아셨는지, 그 길을 지나시던 예수께서 삭개오와 눈이 마주치셨고 그에게 다가섰습니다. ‘속히 내려와라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겠다’ 아무도 함께 해주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 버려져있던 그를,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그를 주님이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주님만 그를 용납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삭개오가 외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 동안 그에게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극복해야할 사람들, 자신의 발 밑에 두고 복수해야할 대상들일 뿐이었습니다. 가난하거나 아픈 사람들도 관심없었습니다. 제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그런데 지금 절반을 구제하고, 빼앗은 것은 네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가 그 동안 동족의 재물을 수탈해왔던 세리장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예수님 앞에서의 그의 고백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그를 부르셨고, 그의 집에 찾아가 그와 함께 하신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하면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이라던데 삭개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
그렇게 모두가 의아해하고, 어리둥절해 하던 그때, 예수님만은 그를 보면서 흐뭇해 하셨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자신이 움켜쥐며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하늘을 꿈꾸며 살아가겠노라고, 참으로 말씀에 순응하는 사람을 만나셨으니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예수님께서도 호감을 가지셨던 부자청년은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시던 예수의 말씀에 실족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죄인인 삭개오는 해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여겼습니다. ‘복’만을 바라고 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것, 하나님이 자신을 인정하셨다고 내세울 유일한 증거인 ‘복’ 마져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 드디어 자기 자신을 가두었던 감옥에서 해방되고 도리어 복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외치시지 않으셨을까요 ?
‘드디어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를 만났다’ !
4
마침내 !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갔습니다 !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 예수님은 삭개오를 ‘이도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라며 그 동안 갈라졌던 동족과의 관계로 다시금 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대체 그 짧은 시간에 삭개오는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빼고는 본문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역사상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도 그렇고, 나 자신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삭개오를 통해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
사실은 이미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자청년이 뒤돌아 갔을 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면, 대체 누가 구원받겠느냐?는 제자들에 질문에 주님은 18:27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말씀하셨지요. 맞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변화되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은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
비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을 봅니다.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시다’ 이 말이 여전히 하나님안에서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우리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워지기를 축복합니다.
5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오늘의 예배를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한해를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에 행하신 일들, 감사의 제목을 기억해보기로 지난주에 약속했었습니다. 무엇들이 여러분의 감사의 제목인지 궁금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써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교우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살후_1:3
라고 인사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_살후 1:4
목회자 바울의 감사는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매일 매일을 ‘대체 주님의 날은 언제입니까 ?’ 라고 되물을 수 밖에 없는 삶을, 그렇게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성도들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실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내고, 그렇게 박해, 환난의 날들 속에서도 인내와 믿음을 지켜내고 있으니 그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또한 그렇습니다 !
목사의 감사는 다른데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수가 늘어나고, 평판이 좋아지고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목사의 감사는 늘 함께 하는 성도들에게로 향합니다. 그저 세상에서 믿음 하나만 붙들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것, 힘에 겹고, 눈물이 마르지 않은 삶 가운데에서도 오직 주님을 소망의 빛으로 붙들고, 어둠을 떨치고 일어서는 모습에 목사는 감동합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헤어져 도저히 예배의 자리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분명한데도, 기를 쓰고 믿음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은혜의 자리를 향해 나아오는 모습이 대견하고,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주님 은혜로만 살아간다고 하는 그 고백이 감사합니다. 그 믿음이 어제보다 더 커보이니 대견하고, 오늘보다 더 굳건하게 자랄 것을 믿으니 감사하게 됩니다.
-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_살전 2:20
여러분이 바로 목사의 영광입니다.
물론 성도의 삶이 나아지거나, 그의 형편이 좋아지는 것도 기쁨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목사의 가장 큰 영광은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의 믿음이 예수님 앞에서 날마다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믿음으로, 믿음으로만 살아보겠노라는 믿음의 고백을 붙들고 두려움과 맞설 때마다, 어느새 조금씩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 변해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도우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부에 따르면, 이후에 가이사랴 지방의 감독이 된 삭개오가 사도 베드로의 사역을 돕는 일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날 예수 앞에서 변화되었던 삭개오도 예수님과 헤어진 이후 직면하게 된 삶앞에서 후회와 돌이키고 싶은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돌무화과나무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시던 예수님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께서 불가능해 보였던 그 걸음을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내신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이 고난의 터널을 믿음으로 걸어내며 흘리고 있는 눈물을 결코 가벼이 보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그 눈물의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주님 손에 들리워 응답하시는 날을 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6
어제까지 걸어온 걸음을 보며 낙망하지 마십시오 .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
내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거라 포기하지 마십시오 .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
세상이 대체 변하기는 하겠느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
‘믿음’을 가진 성도는 내가 할 일을 보며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오직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만 믿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무익하고, 나는 무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사람은 할 수 없는 현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주어진 이유는 불가능을 내가 이루라고 시험하시거나 독려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불가능앞에 좌절하는 내 삶에, 하나님이 능히 이루심을 보이시려고, 그 하나님이 소망이 되시려고, 그 하나님이 마침내 세상을 이기시었음을 함께 기뻐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오늘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나는 바뀔 것입니다. 나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나의 가정도, 나의 교회도, 세상도 바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믿음의 걸음위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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