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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7 성령강림후 20주 ( 종교개혁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0. 25. 11:15
성서일과
1독서 | 요엘 2:23 ~ 32
2독서 | 디모데후서 4:6 ~ 8, 16 ~ 18
3독서 | 누가복음 18:9 ~ 14
응 송 | 시편 65
설교음성
https://drive.google.com/open?id=1RNkfC_tTcMSrA41n6Pkg-GXB-vYr2qFw = '클릭'하시면 설교를 청취할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pJvj2KxYCnI = '클릭'하시면 예배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 외젠느 뷔르낭(Eugene Burnand) 'The Pharisee and Tax Collector, 1908' 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화가이며,
이 성화는 1908년 파리에서 퍼낸 '비유'에 관한 삽화집 중 하나입니다 _도토리교회 홈페이지 참조. )
'깨어진 자를 구원하시는, 낮은 자의 하나님'
1.
예수님은 두 사람을 비교하며 제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이라고하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종교인으로 비난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이 몰상식하거나 죄를 짓거나 타락한 사람들은 결코 아닙니다. 이들은 말씀을 지켜내는 신앙의 힘으로 잃어버린 다윗의 시대를 회복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켜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 힐책을 당하는 대상이었지만,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는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리는 당대 ‘죄인’의 대명사였던 사람들입니다. 로마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당시 유대사회에서 로마 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로부터 세금징수 권한을 위임받은 터라 자기 몫까지 더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악착같이 세금을 징수해냈던 친일 압잡이 정도로 여겨졌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이 둘이 성전에 올랐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이 둘은 ‘기도’하러 올라왔습니다. 바리새인은 당당하게 성전안에 들어갔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나님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세리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우는 성전뜰까지는 나아가지도 못한채, 그저 먼 발치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채 가슴을 뜯으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길을 최선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수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운 ‘죄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둘의 기도의 내용이 좀 색다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나는 이만큼 살아냈다고 말합니다. 세리를 비롯한 죄인들 같이 살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나는 의로운 자가 아니냐는 자부심마져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 다시 말해서 누가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드리는 기도냐는 말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저 성전에 올랐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저 만치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리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보다 우월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그의 모습에 자신감마져 느껴집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지도 못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기도란,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말뿐이었습니다.
2.
본문 단락의 마지막 절인 14절에서 비유를 마치시는 예수님은 이 둘중에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도리어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과연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려고 했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 둘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랐었다는 것과 비유 자체가 이 둘의 기도의 내용에 대한 것들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경우에, 본문 말씀이 기도의 자세나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단락의 첫 시작인 9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비교적 분명하게 말씀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을 보면,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씀하시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14절은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으니, 결국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과연 ‘무엇이 의로운 신앙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계신다고 결론 내릴 수가 있습니다.
여하튼 바리새인은 뻔뻔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겸손한 세리가 우리 눈에 더 들어옵니다. 그리고 주님도 세리를 인정해주신 것을 보면서, 세리와 같이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해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의 삶 자체만 놓고 볼 때, 세리의 편을 들어주기도 어렵습니다. 도리어 바리새인이 칭찬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리는 매일을 ‘죄인’의 삶을 버리지 못한 채 그렇게 삽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는 부끄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곤 성전에 올라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세리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지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이라 불리우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던 성도들이, 돈과 명예, 부와 권력, 명성을 얻기 위해 온갖 범법을 행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상이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 주일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을 향한 비난을 오히려 세상의 박해라고도 말합니다. 세상의 천덕꾸러기, 세상의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이 꼭 세리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요? 과연 세리의 기도는 진실한 것일까?라고 하는 의문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에 반해,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리새인은 하나님 말씀앞에 자신을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말씀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세웁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고, 신실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또 이들은 그렇게 살아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을 지켜내며 살 것인가?만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3.
그러니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고려해 본다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바리새인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 우리의 기대와 생각이 여지없이 빗나갑니다. 이유는 ‘의롭다’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롭다 할 만하다 생각되었던 바리새인은 하나님께는 불합격입니다 ! 사람이 보는 의로움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움이 다르다 ! 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겉모습을 보며 의로움을 판단할 수 밖에는 없고, 또 쉽게 그렇게 사람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이 의롭다 인정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세리를 정죄하고 비난했기 때문일까요 ? 사실 바리새인의 뻔뻔함이나 그가 세리를 정죄하고 비난했다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이유라고 한다면, 반대로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세리’의 ‘의로움’의 행위는 무엇인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는 왜? 바리새인은 죄인들을 정죄하면서 기도하였고, 세리는 왜?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 둘의 차이는 하나님을 아는가 ? 모르는가 ?의 문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는 것이, ’구원’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이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 라는 것을 인생에서 경험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이 전부가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구이신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어떤 관계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만 절실합니다. 다른 것에, 다른 방법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둘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합당한가?만이 큰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중한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이나, 집을 사는 것이나, 성공하는 것처럼 평상시에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것들이었음에도, 이웃이 그것을 얻고 누리게 되었다고 해도 그닥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온 마음이 어떻게 하면 병이 낫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뿐입니다. 그 절박성만 남게 됩니다. 사실은 그것만 중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이런 절박성이 없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세리를 비난하고 정죄하면서 그보다 조금더 나은 나를 찾아내려고만 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닥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기도, 그의 신앙은 남들보다 나은 나, 남들보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하나님께도 인정받은 자일거라 자위하는 것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사람에게는 세상이 보이지 않고 은혜만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된 사람은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자신이 하나님이 됩니다. 평안도없고, 구원받았음에 대한 기쁨도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자신을 올려 놓아야만 합니다. 언제나 경쟁에서 앞서나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내몰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의 곁에서는 무시당하고,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만 남게 됩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삶의 겉모양은 그럴듯하게 바꾸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우리가 하는 어떠한 수고와 노력으로도 결국 삶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경건한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
반면에 세리는 어떠했습니까 ? 세리가 했던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슬퍼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나는 무능하다 !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실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 구원,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리가 말하였던 ‘키리에 엘레이에손’,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의 고백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들으시고, 이 고백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주님앞에 설 때에 우리는 이것 밖에는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나야 말로 깨어진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 ‘나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자신의 깨어진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백만을 믿음의 고백으로 받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할 수 있는 기도는 그것 뿐입니다. 더 무언가를 해달라거나,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기도는 애당초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누가 이렇더라, 저렇더라 할 여지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할 때에야 비로서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죄인’ !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절대적으로 무능하고, 절대적으로 불쌍한 존재 말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내의지와는 상관없이 모태신앙인이었던 저는 자랄 수록 믿음을 갖지 못하고, 곁길로 빠져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이 도리어 재미있고, 여유있고, 윤택했고, 세련되었습니다. 약간의 쾌락이나 즐거움도 누리고, 행복했지요. 결혼후 아내 때문에 다시금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적당히 신앙인의 모습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건이 터졌습니다. 회사에 출근한 저에게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임신 4개월 즈음이었을 겁니다.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 아이가 이상하데.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유전자에 이상이 있을 확률이 너무 높데’ …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결혼후 5년이 지나서야 겨우 겨우 얻은 아이였습니다. 모든 꿈을 포기하고 선택한 결혼의 대가로 얻은 아이였습니다. ‘이렇게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야속했지만 의사는 다른 어떤 말로도 위로해주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산모나 태아에게 조금 위험성은 있지만 정밀유전자 검사를 시행해 보자 결정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그 결과를 기다리는데 한달이나 걸렸습니다.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아내를 위로하지만 속이 타들어갑니다. 퇴근을 하고 오는 길에 자연스레 발걸음이 교회 지하 기도실로 향하게 됩니다. 처음 한주는 아무런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났고, 속이 상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투쟁하고 싸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또 그렇게 기도실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서러워졌습니다. 내 맘대로 꿈꾸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인생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나였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 나는 정말 무능하구나 ! 그러고 보니 나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 ! 아, 내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구나!’ 라는 고백이 터져나옵니다. 뱃속에 있는 내 아이를 위해 무엇하나도 해줄 수 없는 그 무능함에 사뭇칠 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터져나온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였습니다. 이것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만을 말하며 나머지 3주를 기도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사라집니다. 그 어떤 화려한 것도, 그 어떤 걱정이나 염려나 근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는 하나님앞에 용납받아야만 하는 사람 ! 죄인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이가 용서를 받고, 나는 비어있다고 내미는 손이 채워지는 법입니다. 애통해하는 자가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십니다. 세리는 비록 사람들에게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는 용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 은혜의 역설입니다.
바벨탑을 무너트리셨던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인간 본성을 반드시 낮추어 버리십니다. 그래야만 그 낮추어진 그 입이 ‘하나님만이 구원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성도의 입에 이 고백이 쏟아져 나오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5.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함에 있어 반드시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십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높이시는 분이십니다’ 높아지는 자리를 추구하는 세상은 자꾸만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어내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우쭐대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높아지려는 이들을 낮추심으로 세상의 공평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매일이 힘에 겹고, 삶은 나아질 것 같지 않으며, 내가 이런 자리에 있다고 절망하거나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낮은 자리에 있음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앞에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낮음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반드시 높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부터 계속되던 예수님의 비유들속에서 주님의 눈이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목자는 아흔 아홉마리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양을 찾아나섰고, 아버지는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린 아들을 받아주었고, 부자의 잔치집 먼 발치에서 죽어가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가족에게 조차 버려지는 천형을 받았기에, 먼 발치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던 나병환자들을 예수는 찾아가셔서 고쳐주셨고, 세상의 권력과 구원으로부터 버려진 과부의 신원이 응답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전에 올랐으나 차마 그 안에 들어가 기도할 수 조차 없어 먼 발치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세리를, 사람들은 외면하고, 비난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편이 되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깨어진 아픔을 끌어안고 하나님앞에 서는 이를 향해 예수님은 달려가십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죄인을 부르려 찾아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_ 14a
하나님이 높이시고, 하나님이 낮추십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곁을 내 주지 않아, 성전 뜰 저 만치에 서 있던 세리를 하나님이 높이셨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금 그이 곁에 서 계시다는 사실을, 오늘 여러분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
사도바울의 위대함은 무엇입니까 ? 그가 목회를 잘하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일까요 ?‘나는 달려왔습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졌습니다. 내 목숨은 이미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참으로 달려 볼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경주입니다’ _디모데후서 4:6 (새번역)
바울은 아무도 복음에 주목하지 않는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인생의 걸음을 오롯하게 걸어갈 수 있게 했던 힘은 사람들이 아닌 주님 앞에서만 살아가는 것이었스니다. 목숨을 드렸다는 말은 그의 모든 삶이 주님만을 향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박수 갈채 뿐입니다. 그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공정한 재판장이십니다.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도 공정하게 대해 주실 것입니다’ 4:8 (새번역)
바울은 다멕섹에서 이미 자신안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용납하심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기에, 그는 자신의 온 삶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일치시키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 무능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인데, 주님이 나를 용납해주셨다 ! 그러므로 내게는 주님 밖에는 없다’
예루살렘에 찾아온 대환란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서,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을 마무리 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_ 욜 2:32
민족 공동체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대환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법 담력이 있고, 의지가 강하고, 신을 기대는 나약함보다는 의연하고 떳떳하게 살겠다고 자신하던 사람들이라도 쉽게 영혼마져 핍절되기 일쑤입니다.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력한 것들인지 깨닫게 됩니다. 암담한 절망, 무언가 나아질 기미 조차 보이지 않는 무력감앞에 모두가 서있던 그때, 그런 상황에서 요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두의 주님이셨지만, 누구나 무너지는 것 같은 삶의 경계속에서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 오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엘은 하나님을 구원으로 믿으며 무너진 삶에 짓눌리지 않고 새로운 소망을 품고 일어설 수 있는 남겨진 사람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
성령이 임하여 내 안에 의로움을 붙잡으려 경직되었던 마음이 부드럽게 된 사람들입니다. 내힘이 아닌, 하나님만이 구원이심을 경험하고 그 구원안에 용납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지금'에 만족되지 않는 거룩한 갈망이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나는 깨어져야한다 것, 하나님앞에 온전하지 못함을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죄인들이 용납받았던 사건, 하나님이 그들을 붙잡아 주셨던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내 힘을 의지하다 넘어지고, 또 때로는 세리처럼 회개하기를 언제까지 반복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록 지금은 온전하지 못하여도, 우리는 이미 주님의 은총안에 서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안에 보내주신 성령께서 믿는 마음을 주시고, 무너진 자리를 높이시는 은혜를 부으실 것입니다.
그날은 곧 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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