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117 성령강림후 23주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1. 15. 18:55
성서일과
제 1 독서 | 이사야 65:17 ~ 25
제 2 독서 | 데살로니가후서 3:6 ~ 13
제 3 독서 | 누가복음 21:5 ~ 19
응 송 | 이사야 12 혹은 시편 98
설교음원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설교영상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에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말씀’이 이루어낼, 새로운 ‘역사’
# 교회의 전통
교회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메시지는 매우 확고하고 분명하며, 강력합니다. 오늘도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두번째로 써보뱄던 그의 편지 본문 3:6을 보면에 그는 ‘명령’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교우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은 익숙치 않은 단어가 눈에 띕니다. ‘전통’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켜라!’ 말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반드시 지키라고 말했던 ‘전통’은 ‘성경말씀’이 아닌, ‘디다케’라 불리우는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것들이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통해 말씀을 배우며 신앙을 쌓아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초대교회, 특히 본문속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교회에는 숱한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화려한 세상의 유혹보다 더 교회를 힘들게 했던 것은, 어느새부터인가 교회안 곳곳에서 들려오는 말씀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전하는 이들과 그들로 인하여 흔들리는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믿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이냐?’라는 식의 패배주의로부터, 세상과는 담을 쌓아버리는 그릇된 열광주의가 신앙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신천지 같은 사이비부터, 그릇된 시한부 종말론까지 다양한 이들이 진리를 가리우고,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의 길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대단히 편협하고, 주관적인 성경해석에 터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을 읽고, 임의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으레 직통계시를 말하거나, 비유풀이와 같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알레고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단한 비밀이 들어있고, 자신들만 그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가리워지고, 숨겨지는 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해석자의 주관에만 의존하고, 그 해석을 절대시하다보니 검증도 불가능합니다. 계시를 풀어낸다는 자신만 특별하고, 그러다 결국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밖에 없는 폐해가 초래되어집니다.
# 말씀을 해석해 나가는 신앙의 길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그릇 사용하면 도리어 생명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지요 ?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지만 타락한 인간 본성의 도구가 되어 버릴 때는 영혼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파괴시켜버리는 흉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인간이 해석할 수 있느냐?’며 난색을 표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대단한 무지이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는 ‘본 대학’ 학생들을 향한 강연의 마지막 충고를 이렇게 남겼습니다. ‘주석하라 주석하라 그리고 다시한번 주석하라!!!’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 반드시 듣는 이에게 바르게 해석되고 들려져야만 합니다. 내 귀에 들려지지 않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말씀일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내고, 그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타고 내려와 죽은 심령을 살려내야만 비로서 말씀은 능력이 되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삶을 들여다보면 문제 없는 사람없고, 갈등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래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 땅의 삶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 개개인이 경험하는 매일의 삶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일도 없이 보이고, 별스럽지 않아보이지만, 때때로 함정 처럼 도사리는 문제들은 한번 빠져들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고 위협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타인의 아픔을 가볍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문제들도 힘에 겹지만, 느닷없이 찾아오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문제나 환경앞에서는 미쳐 무엇을 붙잡아야할 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럽기만 하며, 이럴 때는 제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정신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을 닥쳐오는 삶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되고, 또한 어떻게 여러분의 영혼을 지켜내고 있습니까 ? 자꾸만 문제로부터 도망하거나 회피하려는 발걸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워 세우고, 그 말씀이 파도와도 같은 문제앞에 직면할 용기를 주고, 흔들리는 영혼을 붙잡고 의연하게 진리와 함께 서도록 돕는 힘으로 경험되고 있습니까 ? 아니면 제 마음 하나 지켜내는 것에도 무력한 연약한 말씀이 되어 있습니까 ?
’신앙을 갖는다는 것’,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수 많은 문제들로 가득차 있는 매일을 내 뜻과 생각의 한계가 아닌, ‘진리의 말씀’을 기준삼아 해석하고, 그 말씀이 이끌어 가시는대로 살아내는 삶을 말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들리고, 선명해지면, 폭풍속에서도 등대의 불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오롯한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역사란 우리 삶을 말씀의 역사가 지켜내는 것을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살아내게 하시는 말씀의 역사에 사로잡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 하나님 부재의 현장에서
오늘 구약본문인 이사야서 65장의 말씀의 배경을 한번 되짚어 볼까요? 지금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곳은 유다백성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의 상황입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이니 자유를 얻게 되었다음이 왜? 기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기뻐할 수 많은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70년만에 돌아온 고향은 말 그대로 폐허입니다. 그들이 떠나온 바벨론에서의 삶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먹고 살만했고, 실은 어느 정도 자유도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돌아와 마주친 땅은 그들의 트라우마로 남겨진 상처를 자꾸만 아프게 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바벨론에서부터 이어진 페르시아의 거대 제국의 통치아래에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신은 야훼 하나님이 아닌 이방의 신들인 셈입니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이 제국의 신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제국에 의해 유린되고 깨어진 흔적들만 남아 보입니다. 성전도 성벽도 모두 깨어지고 허물어졌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하나님 부재’의 유대인들의 아픈 신앙경험이 훨씬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수록 제국의 권세가 커보이고, 그렇게 제국의 신이 커 보일 수록 그들의 신앙은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정도의 깊은 나락과 상처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제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런 세상에서는 어떤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듣고 말씀을 펴서 읽으려해도, 고통의 심연까지 내려간 상황에 처하면 하나님을 쉽게 잃어버리고 마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평상시처럼 쉽게 들리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 말씀을 읽고, 감사할 때 찬양하고, 힘이 있을 때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본문의 이사야나 숱한 선지자들 만큼은 현실이 가져다주는 패배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낙망할 때에도 의연하게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마침내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내실 것이라고 담대하고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선지자의 가슴속에는 현실을 향해 달려오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대체 이런 믿음의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
온전하지 못한 세상, 엉터리 같은 세상입니다. 깨지고 뒤틀려버린 이 세상을 고치고 회복시켜 새롭게 하실 분은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뿐입니다. ‘그가 반드시 새롭게 하고야 마실 것이다’ 선지자는 이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고,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그들은 세상과 타협한다거나 혹은 변화나 새로운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나 패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혹시 내 인생은 어쩔 수 없다고, 이런 인생이, 이런 세상이 바뀔 수 있겠냐?는 비관주의나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 아니면 지금 이사야에게 들리웠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실 하나님의 말씀이 희망의 불꽃이 되어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까 ?
# 창조의 능력
세상을 뒤덮고 있는 패배주의 속에서 선지자를 희망의 메신저로 건져내고 지켜낸 것은, 찬란한 내일의 청사진도 아니었고, 결연한 의지나 결단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번째, 선지자는 압도하는 제국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폐허가 된 유다 땅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습니다. 두번째, 이사야의 눈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창조’ 이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라고 생각되시나요 ?
여러분에게 ‘창조’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새겨져 있습니까 ? 그랜드캐년이나 광활한 대자연앞에 서서 경험하는 압도적인 감동입니까 ? 아니면 지구의 생성 같은 나의 오늘과 연결시키기에는 턱없이 멀리 떨어진 아득한 기억을 생각하십니까 ? ‘창조’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 즉 ‘무에서부터 유’로의 능력입니다. 없는 것이 있음이 됩니다. 어둠이 빛이 됩니다. 죽은 것이 생명이 됩니다. 절망이 소망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현실에, 가능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창조’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며, 하나님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조’는 결국 ‘하나님 부재’의 자리에 ‘하나님 임재’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정의하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필연적 운명은 죽음 뿐입니다. 죄와 죽음 아래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실감할 수 있을까요 ? 죄와 죽음은 실체가 보이질 않지만, 그 흔적 만큼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 비참함, 자신안에서 발견하는 무능과 불쌍함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억눌림과, 비난, 조롱이나 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고,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도, 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여도 ‘생명’이란 스스로 얻을 수 없으니,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애당초 인간의 운명인 ‘죽음’이 생명 없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움을 틔우는 ‘생명’이 바로 창조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과 내가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창조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나는 예수님을 통해 이러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 다시 말해 ‘이제 나는 예수 믿고 살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거나, 삶을 완성해야한다는 세상의 요구에 속아서도 않되고, 굴복당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속박된 삶에서 자유하게 되는 길은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창조의 능력을 믿으며 사는 것 뿐이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만 창조의 능력이 있음을 믿게 되면, 세상의 권력과 힘에 휘둘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을 때에만 경험하게 되는 안정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거나 혹은 천사를 만났다,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님 없음의 삶에서 어느날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때부터 이전까지는 알지 못하였던 하나님 경험이라는 새로운 지경이 열리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인생의 창조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삶이 새로워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암흑만 있고, 불가능만 가득하던 나의 세상에 드디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려지게 됩니다. 기도라던가 하늘의 은혜 같은 말을 공허한 빈말로 여기며 평생토록 돈이나 명예를 구원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말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분명한 세계가 또 업습니다. 예수를 믿고 이전까지는 없던 세계가 새롭게 열려졌으니,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밖에는 살 수가 없습니다. ‘창조’는 이처럼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힘으로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늘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넘쳐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안에 있는 창조의 능력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시는 여러분의 삶에 충만히 임하여, 매일이 새롭고, 소망이 넘쳐나는 기쁨의 날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_이사야 65:17
유다가 경험했던 이전의 시간은 세상의 권력과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내일’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창조해내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삶을 무겁게 짓누르던 모든 것으로부터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달려있으며, 우리는 오늘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써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_고린도후서 5:17
바울은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는 ‘창조’ 의 능력이 가져다주는 참된 자유를 어디서 얻게 된다고 말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불행하지만 예수 믿음안에서 자유를 맛보는 우리도 죄와 죽음의 억압과 공포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죄의 무게는 우리를 눌러옵니다. 그리고 그때 마다 좌절하기도 하고, 아득한 내일 때문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소망의 불꽃을 피워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속절없이 꺼져만 갑니다. 죄의 힘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죄’를 ‘소외시키는 힘’으로 소개합니다. 맞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소외시켜버리고, 이제 ‘사람’과 ‘사람’사이를, 그리고 결국은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나’와도 소외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소망 없음’, ’절망’입니다. 그래서 그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기위해 세상은 자신의 삶을 무한정으로 투자하며 살도록 내몹니다. 이 벌어진 사이, 소외된 이 골짜기가 메꾸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메꾸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3:18)‘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만 죄와 죽음을 이겨내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믿지 않으면 ‘죽음’ 의 심판 아래에 있게 됩니다.
#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교회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에서 벗어나지 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그것에만 마음을 쏟으며 사는 것이 죽음에서 생명을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기대며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만 ‘소망’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이었으며, 교회의 ‘전통’입니다. 치열한 투쟁이나, 삶을 살아냈다 하여도 그 안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결핍과 허무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지배력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는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만 무장해제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언젠가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가버렸다고 외치게 될 세상을 기대하며 기뻐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_65:17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예수 안에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맛보고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_막 1:15
예수님과 함께 이 깨어진 세상에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가 이미 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 안에서 음습한 죽음의 땅이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회복되는 창조의 능력을 발견해 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며, 그때야 비로서 현실의 절망을 뛰어넘어 종말의 날에 맞이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꿈꿀 수 있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찾아와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비록 깨어져보이고, 폭력과 억압과 물신의 지배아래 신음하는 것 같은 일상속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일상은 벗어내야하는 굴레가 아닙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그것을 믿으십시오. 이 믿음이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니면, 얼마나 볼품없고 깨어졌었는지와 관계 없이, 성령께서 새로운 창조의 꿈을 꾸게 하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길이 되어 줄 것입니다.
가능성이 없는 땅, 가능성이 바닥난 인생처럼 보이십니까 ?
하나님이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우리 살아가는 이 땅을 온전하게 이루어가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는 우렁찬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서의 거울 앞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1201 대림절 첫번째 주일 (0) 2019.11.29 191124 성령강림후 마지막주, <왕국절> (0) 2019.11.22 191103 성령강림후 21 째 주일 (0) 2019.10.30 191027 성령강림후 20주 ( 종교개혁주일 ) (0) 2019.10.25 191020 성령강림후 19주 (0) 2019.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