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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01 대림절 첫번째 주일
    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1. 29. 13:41

    성서일과

          1 독서 | 이사야 2:1 ~ 5

          제 2 독서 | 로마서 13:11 ~ 14

           3 독서 | 마태복음 24:36 ~ 44

                 | 시편 122

     

    설교음성

    https://drive.google.com/open?id=1mqPhIuUkYqeOLGwkrqHBSi4QvzO35LP8 = '클릭' 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

     

    설교영상

      * 촬영 카메라 에러로 2주째 설교영상이 없습니다 ... 

     

         

    "깨어있는 이들이 꾸는, "

     

    촛불을 밝히며

    어느덧 2019년의 한해가 지나고 맞이한 대림절 첫주일, 우리는 강단위에 촛불 하나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대림절 4주간 매주일 하나씩, 그렇게 4개의 초를 밝힐 것입니다. 비록 하늘 거리는 것이 언제라도 꺼질 같은 모습이지만 초의 빛이 더해질 때마다 마침내 평화의 빛으로 오셔서 어둠에 잠겨있는 땅을 구원해내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갈망은 더하여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대림절의 기다림이 깊어만 가는 것은 주님만이 답이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다른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오시면 죽음처럼 드리워져있던 모든 어둠이 사라지게 것입니다. 그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다림과 소망을 또한 그가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땅의 교회들은 우리의 영혼과 세상이 어둠에 삼키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믿음으로 대림절의 초에 불을 밝힙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이 요즈음 자꾸만 낯설고 이질적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대림절기와 성탄의 의미가 가지는 그리스도를 향한기다림소망 자꾸만 깊어가는 같습니까? 아니면 퇴색되어가고 있는 같으십니까? 교회에서 들리우는 예수 탄생을 향한 찬가보다는 상점가의 캐럴 소리가 크게 들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함이 희미해진 건조한 칸타타나 성탄 예배가 가져다 주는 공허함이 자꾸만 우리 마음을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우리의 기대가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대림절을 마주하는 우리 마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보니 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점점 좁아져 버린 우리는 어느새오늘 너머 대한 꿈조차 꿀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감은 얼마나 멀게 느껴지겠습니까 ? 실은 우리네 속마음은 다시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꿈만 같은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꿈만 같다 !’ , 사실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1 -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2 -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라는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간절한 희망과 이상을으로 품으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같은 이야기라며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체념한 살아갑니다.

    하지만 척박한 세상에서 꿈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합니다. 이루어질 없는 영역,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현실의 너머를으로 그려낼 있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기 이전 에덴에서 우리가 누리던 영혼의 기억과 흔적들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 영혼에 새겨진 DNA 세상의 힘앞에서, 음험한 어둠속에서 우리를 불러 냅니다. 불의한 세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음에도, 세속의 권세앞에서 의연히 거스를 있는 순백의 의지가 바로입니다. 불법에 굴복하지 않고, 유혹과 기만에 타협하지 않았던 이들은 모두 꿈을 꾸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세상의 힘도 꿈을 있는 인생들은 어찌할 없는 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누구나 같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태초의 창조이야기, 노아의 홍수이야기,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과 골리앗, 다니엘과 친구,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베드로, 바울의 이야기까지하지만 실제로 꿈만 같던 성경의 이야기들은 모두 조차 없는 삶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꿈꾸었던 이들에게 응답하시고 역사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들입니다.

     

     

    꿈을 잃어버린 '대림'

    주위를 둘러 보면, 21세기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이 암담하게만 보입니다. 정치, 문화, 외교, 경제, 교육 영역에서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를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오늘의 일들 문제가 아니라내일 꿈꾸지 못하고 있다는 입니다. ‘내일 이야기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소유나 업적을 꿈으로 착각하는 왜곡된 기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꿈을 꾸기 이전에 먼저 주판부터 튕기고 실현성을 계산하고는 포기해 버립니다. 내일을 향한 엄두도 내지를 못합니다. 그저 오늘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합니다. 모두가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꿈을 꾼다고 하면 시시하다거나 어린 아이처럼 미숙한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익숙한 세상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둡기만 합니다. 

     

    꿈을 잃었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내일을 담보잡혔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소유와 집착으로 몰아세우는 맘몬의 지배력에 익숙해진 결과입니다. 금권주의, 물질만능주의를 힘으로 삼는 우상은 사람들의 시야를 좁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지금’, ‘먹고 사는 ’, 그것만 보입니다. 그저 그것 뿐입니다. ‘너머 보지 못하도록 가리웁니다. 여러분은 노련한 사냥꾼은 몰고 있는 짐승이 다른 길은 보지 못하도록, 오직 길로만 도망치도록 몰아간다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요즘은 시를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낭만이 사라졌고, 상상력도 없습니다. 모두들 오늘이라는, 어둡고, 음습한 삶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것만 같습니다. 맘몬이 장악하고 있는 세상은돈이나 명예, 복지 아니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립니다. 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은 땅에 천착하지 않는 법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오늘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내가 없는여기 시선이 머물지 않고, ‘ 너머 엿보는 데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스레 하늘을 올려다보기 마련이고, 마침내는 나의 무능 너머 일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고보면 맘몬이 우리에게서 꿈을 앗아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꿈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빼앗긴 결과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도, 삶과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꿈과 소망도 믿지 못하게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불의함, 맘몬의 폭력 입니다.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절망이라는 오늘에 갇혀 있지 않고, ‘오늘 너머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깨어있으라

    마태복음 24:32~44 말씀속에도꿈만 같은 이야기 등장합니다. ! 주님이 다시 오실 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졌던 시대입니다. 예수님 당시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자리가 그러합니다. 로마의 폭압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버리고, 곳곳에서 살육이 자행되던 때입니다. 주님은 그런 세상에다시 오시마라고 약속하셨지요. 그때! 누구도 벗어날 없을 것만 같은 암담하고 참혹한 세상을 막아서고 주님은 평화의 , 심판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늘 우리에게서 꿈을 앗아가버린 모든 불의와 불법, 제국과 힘은 심판앞에 무너질 것입니다. 참으로 꿈만 같은 약속입니다. 꿈만 이루어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은 얼마든지 참아낼 있을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 그러나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_24:36

     

    그때, 그날, 주님이 다시 오실 약속의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끝이 정해져있다면 그끝을 알고 이후부터는 고난은 희망을 향한 통로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약속이 있고, 희망이 있어도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면, ‘희망이라는 말이 도리어 가혹한고문 수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날짜를 가르쳐주시면 오실 길을 예비하는 뿐만 아니라, 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넉넉히 살아갈 있을텐데, 주님도 때를 모르신다고 하시니 허망할 뿐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에겐 여간 불친절한게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 !’ 다시 읽어보아도 결국 말씀 뿐입니다. 다른 힌트는 없습니다. 그져 홍수때 노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밭을 매던 데려감을 받은 사람처럼, 멧돌질하다가 데려감을 받은 여인처럼,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몰라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말씀이 우리의믿음 없음 만나게 되면, 언제일지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불안감을 조장하고, 공포감을 일으키기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때에 대하여 체념해 버리고, 어떤 이들은 강박에 내몰려, 24시간 기도한다거나,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삶을 버리고 현실을 도피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안으로

    깨어 있으라 말씀은 향하고 있습니다. 때를 알지 못하니 깨어 있어야 하고, 때를 위해 깨어있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다려야만 한다고 하신 헬라어로 카이로스라는 독특한 히브리적 시간개념을 말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시작에서부터 끝으로 직선처럼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간 개념은 크로노스라고 말합니다. 1, 2년이 지나 십대가 이십대로, 그렇게 어느새 나이가 불쑥 들어버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냥 살다보면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누구에게나 지나쳐가는 시간입니다. 특별한 의미도, 특별한 사건도 없습니다.

     

    누구나 지나쳐온 '크로노스' 때인 2019년이지만,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안에 거하며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의 풍성함 가운데 살아갈 있었으니, 저에게 2019년은 누구에게나 똑같았던 그런 한해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안에서 살아낸 시간,  카이로스입니다.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며, 순간 소망이란 품을 수도 없던 참담한 하루하루를 살던 유대인들이었지만, 그런 인생의 시간도 매우 특별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카이로스’ ! ‘하나님안에서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충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는 시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깨어지고 버려진 고난의 시간이더라도 하나님의 충만이 임하시면 살아남의 시간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소비되어 사라지는 유한한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임재안에 있을 때에는영원 생명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카이로스 때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언제, 몇날, 몇시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라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안에 거하게 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그런면에서 날과 때는 이미 우리안에 찾아와 있습니다. 그때를 마주친 사람과, 때가 오직 않은 사람과, 그때를 지나쳐버리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인가 무심코 지나치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똑같아 보였던 화분에 꽃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이렇게 꽃을 틔였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밤사이에 수줍은 색시가 인사하는 모습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제까지 아무일 없다가 지난 밤사이에 꽃이 터져 나왔을리 만무합니다. 매일 매일 가지 끝에 꽃망울이 오르고 점점 부풀어 오르다 때가 이르렀을 여린 살갗이 터지고 꽃이 나왔을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시간인카이로스 시간은 하나님께 주목하는 이들에게만 보이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일에 분주하고,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다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이 보이질 않습니다.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는 이도 있지만,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는 이도 있습니다.

    깨어진 세상, 상해버린 , 소망 없는 절망에 짓눌려 버린 걸음만 눈에 담고 있다보면, 너머에서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을 놓치고 마는 법입니다. ‘깨어있으라 주님의 음성은, 그런 흔들리는 걸음일지라도 넘어지지 말고 하나님의 손이 너를 붙들어 주실 것이니, 똑똑히 주목하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바울도 로마서 13:11에서깨어 있으라 외칩니다.

     

    • 그날 그날 해야할 일에 너무 열중해 지친 나머지, 그만 지금이 어떤 때인지 잊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서 꾸벅 꾸벅 졸며 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제 밤이 끝나고 새벽이 밝아 오고 있습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에 눈을 뜨십시오 !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음 믿었을 시작하신 구원 사역에 마무리 손질을 하고 계십니다’ ( 메시지 성경 )

     

    덧없이 흐르거나 어둠이 주관하는 대로, 생각이 말하는대로 주어진 삶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살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매주일마다 카이로스의 때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주일이카이로스 때입니다. 주일이야 말로 세상이 몰아세우는 시간 흐름을 거슬러 삶의 모든 호흡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회복시키는 날이니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시간안에서 사는 것을 12절에서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같다고 말합니다.구체적으로는단정히 행하는 , 방탕하지 않고, 취하지 않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않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는 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을 위해 소비하고 탕진해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깨어있는 사람들의 시간안에 채워지는 들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살아가려는 욕망을 끊어내거나, 그런 시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노력한다고, 애를 쓴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조금은 나아진 같아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만큼 해내야한다는 말이 결국 만큼 내지 않으면 않된다는 강박으로 이어질 밖에 없기에, 일단 강요에 한번 내몰리는 순간부터는 조급해지고 불안해지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유한한 시간의 한계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영원 시간에 나를 맡길 있는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자꾸만 초조해지고 조급해지는 이유는 물신의 지배 아래에서의 소유와 강요에 눌렸던 삶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이 아닌, 유한한 시간,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아닌 지나쳐 가버리고 마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갇혀 버린 포로들의 삶입니다. 영원에 잇대어 있으면 100년이나 1년이나 차이가 없다는 간단한 진리도 깨닫지 못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3장을 마무리하면서 14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맘몬은 시간의 한계를 통해 우리를 자꾸만 몰아세웁니다. 그때마다 육신의 , 나를 위한 욕망의 시간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 우리 안에서 꿈틀거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말합니다. 입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날마다 입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충만, 33년의 생을 모두 하나님의 카이로스에만 이어져 살아냈던 예수님께 이어져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예수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고 살때만크로노스 흘러가는 세월을,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살아내는카이로스 시간으로 구원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두려움과 절망의 모습으로 내일을 가리우며 옴짝달짝 못하게 가두어두려고 하는 오늘의 , 오늘의 서슬퍼런 세상 권세를 거부하고 저항할 있습니다. ‘내일 보는 , 지금 있지 않은 , 오늘 너머를 보는 것이이고, 그것만이믿음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고 현실의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때를 향해 깨어 있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꿈꾸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꿈은 주님을 향한믿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안에서 믿음은 소망과, 소망은 믿음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구약본문 이사야 2장에도 꿈만 같은 관한 선포로 가득합니다. 1 ~ 4절까지 함께 읽어봅시다

     

    •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_ 2:4

     

    정말 꿈만 같은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 우리가 이런 날을 맞을 있을까요 ? 언제쯤이면 이런 날을 있을까요 ? 금방이라도 통일이 것처럼 무르익었던 한반도의 평화의 기운이 겨울 바람처럼 싸늘히 식어버리는 것을 보면 이런평화 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꿈만 같은 이야기인지 실감이 됩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우리가 아무리 경제력, 군사력을 증진시키더라도 이런 평화를 이루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에게만 천착하게되는 인간 심연의 본성때문입니다. 오직 평화는 하나님만이 이룰 있고, 하시는 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실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꿈은 하나님안에서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이런 날을 꿈꾸고 계십니까 ? 엉터리 같은 세상속에서도 이런 평화의 날을 이루어내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고 계십니까 ?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꿈을 이루어내실 하나님께 깨어 있는 사람!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안에 오시는, 주님

    종말의 시대앞에서 우리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예수의 말씀대로라면,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있는 최선은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해 깨어 있는 뿐입니다. 삶에 침몰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꿈을 향해 삶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에 마음을 모으고, 뜻을 다하여 사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인 , 날을 꿈꾸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꿈만 같다 체념하고 포기하던 것들을, ‘카이로스 시간안에서 이루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반드시 임할 것을 여러분은 반드시 믿으셔야만 합니다.

    주님께 삶을 주목하며 꿈을 꾸는 이들만이 깨어진 세상의 틈새에서 주님의 날을 발견하며 살아갈 있습니다. 주님이 삶의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갇혀 언젠가 지나쳐갈 시간이 아닙니다. 때는 바로지금주님을 향해 깨어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안에 숨어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꿈만 같다 차이는, 성취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터무니 없다고 조롱하던 꿈만 같은 일들을 버리않으시고,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카이로스 안에서 반드시 !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깨어 있는 사람만이 꿈을 있습니다. 꿈을 빼앗아가는 악마적인 세상을 거스르며 사십시오. 우리를 향한 위로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훗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만큼은 카이로스의 날이오늘 수도 있습니다. 촛불을 꺼트리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십니다. _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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