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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4 성령강림후 마지막주, <왕국절>성서의 거울 앞에 2019. 11. 22. 22:31
성서일과
1독서 | 예레미야 23:1 ~ 6
2독서 | 골로새서 1:11 ~ 20
3독서 | 누가복음 23:33 ~ 43
응 송 | 시편 46 또는 누가복음 1:68 ~ 79
설교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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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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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밑의 사람들
# 오늘, 복음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_고린도전서 24
우리는 숱한 바울 서신을 통해 확신에 차 ‘복음’을 힘차게 외치는 그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듣기만해도 가슴이 설레이고, 부르기만 하여도 가슴이 뛰는 ‘복음’ 이신 주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 24절의 선언 바로 앞에서, 세상이 ‘복음’을 무엇이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맹목적인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덮어놓고 믿는 이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_23
바울도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는 있지만, 발딛고 있는 것은 이 땅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며,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는 그런 정도일 뿐입니다. 그가 구원자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만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고백을 들고 ‘세상 한복판’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
그런데 과연 화려하고 멋진 세상의 성공앞에서 예수는 우리의 삶을 맡길 만큼 매력적일까요 ?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의 행복을 말하며 온통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온갖 구원자들이 즐비합니다. 화려한 집, 재산, 명성, 돈과 부유함, 사람들의 인정같은 업적들이 그렇습니다.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천년전 십자가에 달려죽음을 맞이했던 예수는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안에 있을 때, 은혜 안에 머물고 있을 때가 아니라, 여러분이 매일 염려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지나치는 치열한 삶의 복판에서 말입니다.
가난하고 배가 고프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게 되거나, 혹은 사특하고 거짓된 길을 좇으면서도 비교적 안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또 그런 이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세상앞에서 주눅이 들게 되는 때에는, 그들을 그렇게 대단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은 세상의 구원자들에 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너무나 무력하고, 초라하고, 작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가 ? 라는 이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만 합니다. 그때에만 생명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우리의 인생에 살아계신 주님으로 예수를 마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여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지 못하게 되면, 그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영생할 수 있다는, 구원자인 예수에 대한 유보된 불확실성에 기대게 될 뿐입니다. 어느때에는 믿음이 태산처럼 높아 보이다가도 밑천이 바닥날 즈음,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던가, 내면이 치유된다던가, 혹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건강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예수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맹목적인 ‘믿어야만 한다’는 조급함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물론 앞서 말한 것들은 예수를 주님으로 믿을 때에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예수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품이나 내면, 혹은 마음을 지키고 수련하는 것이나, 혹은 율법의 내용을 지켜내는 것이라거나, 무언가를 이루어 고매한 인격자가 된다거나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것도 예수 믿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잘 훈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본 받으며 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는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호령하고, 우뚝 서 있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그 볼품없이 찢기고 상하여 죽임당한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계십니까 ?
# 당혹스러운 예수의 십자가
사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실 수 있느냐?’는 이 물음은 우리 뿐만이 아닌,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도 치열하게 씨름하던 문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아래에 살아가는 현실의 삶에서, 황제와 같은 세상의 통치자로서가 아닌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은 예수를 믿으며 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이야기, ‘아포리아’였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주일이며 왕국절로 지켜집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온 땅의 왕이심을 온 교회가 선언하는 절기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다음주부터는 성탄의 기쁨과 평화, 구원의 주님을 기대하는 소망을 앞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예수의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늘 제3독서 복음서인 누가복음 본문은 너무나 쌩뚱 맞아 보입니다. 대림절을 앞두고 만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야기는 우리를 깊은 당혹감의 질문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왕’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고, 그런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며, 온 땅의 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말고 본문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 예수가 구원자이신지 본문의 음성을 들어내야만 합니다. 본문속에는 우리들 말고도, 의아함을 안고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등장 인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서 구경하는 백성들(35), 비웃는 관리들(35), 조롱하는 로마군인들(36),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33)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첫번째, 예수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만치 떨어져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니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제국의 죄인일 뿐인지 스스로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고 보겠다는 식입니다.
두번째, 예수를 비웃었던 관리들은 아마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향했던 그들의 비웃음은 결국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원자인 증거를 보여보라는 말입니다.
세번째, 로마 군인들도 예수를 희롱합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로마 군인이 정의하는 구원자는 왕과 같은 정치, 군사적 권력자입니다. 그것을 보여보라는 것입니다.
네번째, 예수와 함께 달린 행악자들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죄수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누가는 이들이 ‘행악자’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악을 행한자, 범죄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범한 악은 로마를 향한 반란이었습니다. 죄인이라는 낙인을 쓰고는 있지만, 실은 목숨을 걸고 로마와 항쟁하다가 붙들린 독립투사 같은 이들입니다. 이들 중에 한편에 있는 행악자가 예수를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사람의 눈에 비친 예수는 그저 비겁하고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면 로마를 전복시키고, 유다를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합니다. 자비와 사랑, 용서와 화해를 말하다가 로마에 붙잡혀 아무것도 못 이룬채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는 당신이 구원자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속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거부합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의 우리들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세상의 힘 앞에서 이렇게 스러져가는 예수를 구원자로, 왕으로 믿으라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예수에게 우리의 인생을 건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세상은 ‘그렇게 제 자신 조차도 지켜내지 못했던 이가 어떻게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고 우리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니 이것은 부끄러운 갈증과 함께 우리 안에서도 수시로 일어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면 예수를 믿은 이후로 우리는 수 많은 문제안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삶은 변함이 없는 듯 싶습니다. 여전히 몸은 아프고,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문제 투성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엉터리 같습니다. 악의 득세함은 더 강화되는 것만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약삭바르게 사는 것이 인생을 더 잘 사는 길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도, 로마인들의 눈에도, 우리가 함께 마주하는 오늘의 세상의 눈에도 여전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복음의 선언은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권력과 위엄, 찬란한 부유함을 뽐내는 세상앞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내 믿음의 자리를 초라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섬칫 놀라 스스로의 믿음 없음을 채근하거나 강요하며 본질적인 이 질문을 회피해 갑니다.
# 흑암의 권세와 예수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매일은 이전과 달라졌습니까 ?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아직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의 근본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앞서 누가복음에서 만났던 네부류의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구원자’에 대한 저마다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있었고, 그런 구원자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이며, 왕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분명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로마인에게는 군사력, 정치권력이 있어야만 왕이라 불리울 수 있습니다. 행악자라 불리우는 편에서는 이런 세상을 뒤바꾸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민중을 이끌 수 있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영웅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이 찾고 있는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구원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구원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발견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구원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 예수야 말로 그리스도이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_ 골 1:13 -14
여러분은 바울의 이 고백이 절절하게 들리십니까 ? 바울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구원자’로 바라본 이유가 이 고백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우리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잘나보여도, 결국은 폭력과 억압의 힘인 흑암의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울의 말이 옳습니다. 예수 이전의, 예수 없이 살던 인생과 삶을 돌아보십시오. 세상의 구원은 늘상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라고, 채워내라고,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두려움을 무기 삼아 우리를 강요와 위협으로 몰아세웁니다. 제 힘으로 삶을 완성시켜내야만 한다는 이 억압이 바로 죄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성취를 향한 억압이나 혹은 욕망에 휩쓸려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흑암이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권세에 굴복하며 살게 되며, 어느새 그 끝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절망과 불행과 마주치게 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를 하여도 여전히 비어있고, 여전히 허무합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도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시대에는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돈의 지배력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어떤 기업인이 자살을 했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다가 큰 손해를 보고 낙망하여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가 자살했을 때 그의 예금에 남은 돈은 7억이었다고 합니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잃어버린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셈입니다. 우리들 같은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은 우리도 모두 이런 식의 사고안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행복과 더 많은 감사가 있음에도 누리지 못한 채, 누구보다, 무엇보다라고 하는 세상의 기준에 내몰려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이고, 이것이 세상의 힘, 흑암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흑암의 권세는 나를 움짝 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자유를 빼앗기 위해, 나에게 중요한 것,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실질적인 권세로 사용합니다. 돈이 없어 아무것도 못한다면, 돈이 권세이고, 사람들이 없으면 않되면 사람이 권세이고, 내 아이가 잘되지 않으면 않된다면 아이의 출세가 권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마다 이런 흑암의 권세앞에 약점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하여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런 권세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처절한 깨우침이 있을 때에만 주님을 믿는 것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예수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를 죽인 세상의 모든 가치, 모든 권세를 거부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흑암이 권세로 사용하던 것들이 이제는 내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돈이 없으면 죽을 것 같던 사람이, 이제는 돈이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해도, 건강해지지 않아도, 내 아이가 출세를 해도 못해도 괜찮습니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예수께 대해 사셨습니까 ?
예수를 믿음으로 흑암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을, 바울은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속량’이고,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힘, 흑암의 권세, 나의 자유를 빼앗던 가치로부터 벗어나 자유케 되었다는 말입니다. 흑암의 권세를 뿌리칠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취를 향한 죄의 힘에 짓눌려 배고프고, 결핍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불평하며 흑암 아래에서 살던 우리가 그 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부터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구원해내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지 않아도 되며, 다른 방식으로,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인정을 받아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사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주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여도 그것만으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였어도 죽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실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삶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주시고, 누리게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완성시켜주실 때에만 생명일 수 있습니다. 말로만 예수가 나의 생명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먹이고, 입히고, 살게 하시니 예수가 나의 생명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의 힘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능력을 예수안에서 경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나라로 옮기워졌으니 적어도 이제 우리는 살기 위해 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세상의 억압,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 믿음안에서만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이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졌음을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을까요 ?
십자가에 달려죽은 그 예수를 생명의 근원되시는 구원으로 믿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너무나 뻔한 답이라고 여겨지시나요 ? 하지만 이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내고,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성취하려고 애를 쓰고, 심지어 예수를 알아내고, 지식을 쌓는 방식으로도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를 믿으라’고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진 사건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하고, 애를 써도 그런 세상은 경험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바라볼 때 비로서 그의 아들의 나라는 열려지고, 보여지고, 역사되어지는 세상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본문을 봅시다. 40절 이후를 보면, 예수를 비방하던 행악자를 책망하던 반대편의 행악자가 예수를 향하여 외칩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_ 누가복음 23:42
목숨을 걸고 유대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그의 치열했던 삶은 결국 허망한 죽음앞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방식, 자신이 그 동안 믿었던 방식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무능함을 결론 내려렸던 생의 마지막 포기의 자리에서 비로서 그의 눈에 예수안에 있는 아들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안에서, 예수와 함께, 그 나라로 옮기워주실 것을 믿기로 결단하며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의 믿음에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_ 누가복음 23:43
흑암의 권세 앞에 벌거벗기워진 예수가 보이십니까 ? 그 모든 권세가 예수의 육체를 찢고 십자가위에서 살해하였지만, 예수는 그 권세에 굴복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흑암의 권세가 태산처럼 몰려와도 오롯이 아버지께 향하였던 자유함의 상징, 구원의 상징입니다. 세상 모두를 굴복하게 만드는 권세가 예수를 향하여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를 조롱하던 그들은 흑암의 권세에 굴복하며 살다가 그 권세 아래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이전에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부활의 주로 높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 대림절의 계절에 …
대림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발 아래에 두신 왕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려움과 절망으로 몰아넣는 모든 거짓된 권세를 심판하실 그 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고 있다” 하나님의 포고다 “내가 진정으로 의로운 다윗 가지를 일으켜 세울 날이 오고 있다 그는 정의롭게 통치를 펼칠 것이며, 정의를 세워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리라 그의 시대가 이르면, 유다는 다시금 안전한 곳이 되고 이스라엘은 평안을 누리리라 사람들은 그를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시는 하나님’이라 부를 것이다” _ 예레미야 23:5~6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손에 의해 모든 것이 바로잡아지는 날, 진정한 구원의 날이 올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가 보게 될 그 날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구원자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
예수 없는 삶,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왕으로 고백되어지지 않는 삶은, 제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하여도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삶일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여전히 죄의 속박 아래에 놓여 있는 인생에는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흑암의 권세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기워졌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아침에 이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만 합니다. 그 사실에 오롯이 기대며 사십시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만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왕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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