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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8/ 16 성령강림후 11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8. 12. 15:59
성서일과
| 1독서 창세기 45:1 ~ 15 혹은 이사야 56:1, 6~ 8
| 응 송 시편 133 혹은 시편 67
| 2독서 로마서 11:1~2s, 29~32
| 3독서 마태복음 15:(*10~20), 21 ~ 28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sfee8Yf7z0hrN0UfE678ysojPAy0y4s9/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vVCoM8EjXU8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눌 수 있습니다
‘경계’의 선상에 서있는 ‘그리스도인’
1
저는 오늘 대단히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뭐 그리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철썩같이 믿고 붙들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대단히 위험한 말씀이 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불의한 것들을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단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되면 생각이나 믿음, 삶의 방식 모두 말씀을 따라 바꾸어야만 합니다. 주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가 ‘복음’을 믿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믿는 이들, ‘성도’에게 주어진 순명의 길입니다. 바라기는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무거워질 때에라도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듣는 귀와 열린 마음이 있기를 빕니다.
2
성경안에 담겨있는 스토리들은 가족들의 만남, 이웃, 나라, 민족, 교회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만남’을 중심으로 쓰여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만남도 있고,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불행한 만남도 있으며, 복되고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만남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실 오늘 성서일과의 이야기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만남은 모두 ‘불편한 만남’들입니다.
1독서인 창세기 요셉과 형제들과의 만남이나, 2독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만남, 그리고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을 전해주고 있는 3독서 마태복음까지 모두 불편하기 그지 없는 만남들입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이방땅에 팔아버린 원수같은 형들을 드디어 대면하고 있는 요셉이나, 그토록 못되게 굴었는데 보란듯이 출세한 요셉앞에 설 수 밖에는 없던 형들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이방인을 대하는 유대인들도 그렇고 그런 유대인들 앞에서 이방인들의 마음도 불편한 것도 같습니다. 결국은 여인의 믿음이 칭찬을 받기는 했지만, 예수님과 이방여인 사이에 주고 받았던 껄끄러운 대화 내용도 불편하기만 합니다.
이런 불편함은 실재 우리들의 만남안에도 가득합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몰상식하고 개념이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힘이 듭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더 불편합니다. 코로나로 인한 세간의 시선이 불편한 우리는, 이제 ‘차별금지법’ 문제로 여기저기 시끄러운 것이 또한 불편합니다. 찬성과 반대가 나뉘고 그 안에서 시작된 갈등이 좀체로 가라앉지를 않더니 급기야 이제는 상대를 향한 미움과 증오를 조롱과 저주의 언어로 쏟아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누구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끝날 것 같은 위태로운 증오가 하늘에 닿아 있는 듯 합니다. 이쪽이 아니면 다른 쪽이고, 내편이 아니면 악한 것이며, 옳은 것 아니면 틀린 것, 그러니 나와 다르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식의 사고에 익숙한 우리의 언어입니다. 사실 옳고 그름을 헤아려보는 수고함 보다는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구원이 온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믿고 있는 이들에게 이길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런 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이 척박해지고, 세상이 말세라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간 역사의 시작 아래, 인류는 늘 갈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하고 평화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만, 엉터리 같고,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죄인들이 활개하는 꼴이란 두고 볼 수 없지 않느냐? 는 답답한 속내를 하소연들 합니다. ‘사랑해야하는 것은 알지만 또한 용서할 수는 없다’는 모순의 굴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길을 보여주실까요?
3
오늘 3독서 마태복음 15장 안에는 불편한 몇개의 만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무리들과 한바탕 다툼(15:1~9)을 치루셨고, 무지한 제자들과도 작은 논쟁을 벌이신 후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성경에 능통했던 그들과의 갈등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비롯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규정을 어겼다는 겁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2)
‘장로들의 전통’ 그러니까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겁니다. 뭘 이런 것 가지도 뭐라하느냐 싶지만, 위태로운 역사속에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율법이나 규정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걸려 있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런 유대사회의 규정을 어겼으니 이것은 분명 제자들이 잘못한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부당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제자들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제자들을 옹호하시는 듯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외식함을 크게 봅니다. 왜일까요?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은 중요하게 여기고 또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이들은 정죄하고 책망하면서도, 더 상위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과 정신은 따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주님께서 이런 거짓되고 외식한 이들, 스스로의 거짓을 감추고 진실된 양 말하는 이들을 두고 보실리가 없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15:9
주님의 책망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롬 11:32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순종’의 본 모습이란 것이 하나님앞에 정직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외식하는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양식삼고, 오롯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살아가시는 주님에게 이런 이들은 부딪히고 갈등할 수 밖에 없는 이들입니다.
4
주님께서 한바탕 소동이 있던 게네사렛 땅을 피해 이방인들이 거하는 두로와 시돈이라고 하는 이방인들의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입니다. 가나안 여인 하나가 큰 소리로 주님을 부르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앞에 나아오던 아픈 사람, 귀신들린 이들을 기꺼이 고쳐주시던 주님이 여인의 간청에는 일언반구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여인과 주님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기대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맙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 15:24
이방인인 너의 딸을 고쳐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단호한 말투가 더 냉정하고 차갑게 들립니다. 그러나 애당초 이방인 여인으로서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나설 때는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었던 탓에, 이런 정도로는 여인은 순순히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주님이 일?을 치고 맙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 26
싫으면 그만이지, 이건 인격모독을 넘어선 폭력입니다. 이쯤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분노에 치를 떨고 가버릴 법도 한데, 여인의 답변이 놀랍기만 합니다.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27
어찌보면 간도 쓸개도 모두 내다버린 것처럼 비굴해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28절을 보니 그때 비로서 ‘네 믿음이 크도다’라며 여인을 칭찬해 주셨고, 여인의 딸은 고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의 숱한 논쟁에서 져보신 적이 없던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만 서면 누구라도 그 밑천과 얄팍한 속내가 드러나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발칙한 이방 여인의 대꾸에 그만 할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주님이 부러 여인에게 져주신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인의 당찬 답변에 말문이 막혀버린 듯한 주님의 모습속에서 왠지모를 통쾌한 미소가 베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대체 이 여인에게서 주님은 무엇을 보고 계셨을까요?
5
22절을 보면, 여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구약 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이 갈망해온 하나님의 ‘메시아’ 즉 ‘구원자’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여인의 외침속에는 ‘당신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당신은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보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믿음이 이방땅을 넘어 이스라엘과의 경계를 뛰어넘는 순간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믿음의 태도 또한 매우 특별합니다. 그녀는 냉정하고 단호하게 자신을 향해 벽을 세운 예수님 앞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여인이 참을성이 많고, 어떤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요?
지금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살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아이를 살려내실 수 있는 분이 맞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가 그리할 겁니다. 내 기분, 감정, 가진 것 따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까짓 것들일 뿐입니다. 당연한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다’라는 영적인 자각이 없이는, 세상의 시름이나 유혹앞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붙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모든 것 위에 예수님을 모실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모든 것’에는 인종, 성별, 문화, 국가, 이데올로기, 자부심, 성공, 자존심, 모멸감, 수치심, 실패 그리고 종교를 포함한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말씀에 ‘아멘’해야만 합니다. ‘너’의, ‘우리들’의, ‘나’의로 표현되는 그 무엇도 예수님을 향한 절뚝거리는 걸음, 예수님이 향하시는 올곧은 걸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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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불편하고, 사람이 불편하고, 세상이 불편한 근원에는 이스라엘와 이방인의 사이처럼, ‘나’와 ‘너’는 다르다고 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경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내 밖의 것들과 ‘비교’하고 ‘차별’함으로 딱 그 만큼의 ‘거리감’을 만들곤 합니다. 당하는 이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하는 이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그 만큼의 구렁이 생기는 셈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세상에서 비교되고 차별받아 힘들고 그래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힘겨운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도리어 나를 향한 누군가를 또 저만치 떼어놓음으로 내가 좇아가려고 하는 차별 만큼의 거리감으로 메꾸려고 합니다. 이런 본성이 결국은 누군가의 허물을 들춰내고 찌르고 비난함으로 의롭고 정의로운 자리를 얻으려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 따지고보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으면서 또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피해자이면서 또한 가해자인 셈입니다. 어느 순간 악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고 아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악의 방관자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오늘 15장에서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 게네사렛에서 두로와 시돈으로 배경이 전환되고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유대인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며 비아냥 거렸던 것처럼, 게네사렛과 갈릴리 주변은 당시에 유대 주류로부터 비교당하고 차별받는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그런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차별과 다름으로 비난을 받고 내몰렸다 것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더 깨어지고, 더 버려진 이방의 땅으로 피신하신 것은 아니었을가요? 동병상련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주고, 아픈 사람이 아픔을 주는 격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악한 본성입니다.
7
그러나 우리는 인류 역사안에서 반복되어 오늘에 이르러 더 격화되고 있는 저주와 미움, 그리고 차별과 증오의 이 우울한 사슬이 끊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나안 여인에게서 보게 됩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자신의 딸만 치유해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으셨고, 그녀는 버림받은 이방인에서 주님의 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꺼이 그녀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품어주셨습니다. ‘개’라 불리우며 차별과 냉대, 증오와 갈등의 벽 너머에서 살아왔던 그녀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딸’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보다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마 15:28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조준하고 있습니다. 여인을 ‘개들’로 표현한 예수의 말씀에 눈살을 찌푸렸던 우리인데, 돌아보니 지금 우리들이야말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세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하는 식탁을 빼앗고 나와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거리로 내모는 잔인한 차별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 갈라진 사람 사이의 구렁이 매꾸어질 수 있을까요?
설교 첫머리에서 갈등과 차별의 현실속에서 무엇을 어찌해야할 것인지 질문했습니다. 비난과 정죄, 갈등과 차별은 내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고자 하는 ‘자기의’에 비롯합니다. 이대로 두면 않되고, 내가 아니면 않된다는 이런 마음안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는 큰일 날 세상 따위는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악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붙들고 온 세상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고 했던 철천지 원수인 형들과의 그 불편한 만남을 요셉은 어떻게 ‘복’된 화해와 평화의 자리로 만들 수 있었는지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 창 45:8a
성서기자는 요셉의 입을 통해, 형들에 의해, 삶의 깨어짐을 통해 사탄은 요셉의 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악’ 또한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역사의 승리자이시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그 사실을 믿었던 것이고, 우리도 이것만을 믿어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시선은 멈추어져야하고,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고 있는가?’에 반응하는 정직한 걸음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만을 믿는 너와 내가 살아갈때만 세상 곳곳에 패어진 구렁은 매꾸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이 아닌, 예수님의 걸음, 예수생명의 ‘복음’입니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자칫 내것을 잃거나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여기고,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틀렸고, 죄인이라고 여기며 돌을 던지는 땅의 경계를 허물고 구렁을 매꾸며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잃어버린 죄인을 찾기 위해 경계를 넘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길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도리어 주님과 함께 경계를 넘는 그리스도인이어야만 합니다. 경계앞에 멈추지 않으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도 차별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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