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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성령강림후 10주 |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8. 6. 16:27
성서일과
1독서 창세기 37:1 ~ 4, 12 ~ 28 혹은 열왕기상 19:9 ~ 18
응 송 시편 105:1 ~ 6, 16 ~ 22, 45b 혹은 시편 85:8 ~ 13
2독서 로마서 10:5 ~ 15
3독서 마태복음 14:22 ~ 33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WOmpRqwi8jOeZK-YMWGEtfT-DBtzVC32/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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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과 '예수'사이, '믿음'
| 비틀거림
코로나로 시작된 2020년을 어쩌면 무력한, 그래서 세상보다 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함 가운데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는 고사하고 ‘바른 신앙’을 간과하고 결국 그저 제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몫 만큼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우리의 어제가 초래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위기의 순간에는 믿음과 신앙이야말로 빛을 발하는 능력이 되어야하는데, 삶을 길어올리는 능력으로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미 낯설은 언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으니 두려워집니다.
여전히 땅을 살아가야 하는 삶에 찾아오는 실재적인 어려움은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경제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해고와 실직, 파산, 건강, 내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숱한 문제들과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도 믿음이 튼실할 때에는 하늘의 소망에 기댈 수 있었는데, 자꾸만 겪게 되는 어려움속에서 예수님을 믿고는 있지만 어느새 구원에 대한 확신은 희미해지고, 삶의 기쁨은 사라지고, 생의 의미는 희미하기만 합니다. 그런 모습에 화들짝 놀라던 마음이 무뎌져, 불현듯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파산된 것만 같은 삶 앞에서 우리는 괴롭습니다.
그래서인지 ‘믿음을 지켜보겠노라’고 몸부림칠때 마다 자꾸만 성경에서 만나게 되는 ‘초대교회’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사뭇치곤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달리 믿음도 좋고 신앙심도 깊었다는 생각에 이내 우리를 잔뜩 주눅이 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들의 형편이나 신앙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들은 곳곳에서 다툼이 있었고, 오만하고, 잘난 척하는 이들도 있고, 여전히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해 갈등도 심했으며 믿음에 파산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당시의 핍박과 환란은 그들의 삶 뿐만 아니라, 신앙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마태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떠나신 이후 남겨진 제자그룹의 신앙생활의 형편을 고스란히 표현해주는 이야기 한토막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24
세찬 풍랑이 휘몰아치고 있는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작은 배 위에 그들이 있었습니다. 이리 저리 흔들거리며, 언제라도 끝장나버리고 말 것처럼 위태롭고 아찔해 보입니다. 당시 교회의 상황이 이런 형편이었던 겁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 31b
바람소리에 놀라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던 수제자 베드로를 향하신 주님의 책망을 통해, 마태는 제자 공동체가 그들을 둘러싼 환란을 이겨낼 만큼 단단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 흡사 오늘 우리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처해있는 어려움과 그들의 곤란함의 정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마태는 특별한 단어를 하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25절에 씌여있는 ‘바다’가 그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건너가고 있는 이곳은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리우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둘레가 52km에 이르지만 분명 호수입니다. 고대근동의 문화에서 ‘물’은 공포와 파괴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건기에는 바짝 말라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우기에 강이 범람하는 순간이면 광포한 파괴자가 되어 삶의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물’은 한껏 조심하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히브리어는 ‘바다’, 나 ‘강’은 크기에 관계 없이 모두 ‘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심지어 성전 뜰에 놓인 물을 담아둔 놋그릇도 ‘바다’라고 했을 만큼 물은 그들의 본능에 파고든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서 ‘물’의 이미지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우상신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의 눈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제자들, 그리고 교회가 마치 바다를 건너다 파괴의 신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 것처럼 안쓰럽고 애처로운 작은 배로 보일 뿐입니다.
대견하게도 바다로 뛰어들 만큼 믿음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느 한순간 바람 소리에 놀라 베드로는 다시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당시 교인들의 신앙은 늘 이런 시련과 믿음, 그리고 다시 믿음 없음으로 떨어지는 일들이 반복되는 신앙의 자리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흔들림을 아무일 없는 것처럼 여기거나, 언젠가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 느슨하게 여기곤 합니다. ‘믿음 없음’이라는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구원이 되시는 천국의 삶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끝없이 몰려드는 폭풍속에서 또 그 만큼 반복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 내가 믿고 의지하고, 걸어두었던 신앙적 근거가 모두 허물어지는 것같은 그 폭풍치는 어두운 밤, 주님 조차 마치 ‘유령’으로 보이는 것처럼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밤에 우리는 내몰려야만 합니다. 그곳에서만 우리는 ‘믿음’이야 말로 구원하는 능력이됨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더 먹고, 얻고, 누리고,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복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우리인데, 이제 코로나 19가 찾아온 이후, 그리고 폭우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지금에야 우리는 비로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생명’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가슴에서 공감이 되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또 시간이 지나고나면 다시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말겁니다. 생명은 ‘생명’ 없음의 자리에서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처럼, ‘믿음’은 ‘믿음’없이는 지나갈 수 없는 곳에서만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입으로는 ‘믿음’을 외치지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던 바울의 말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치 출항하기 이전 항구에 정박되어 있는 배위에서 ‘믿음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풍랑이 없고,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믿음’의 결실만 따 먹으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만 발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유령’처럼 덧없게 느껴질 때가 있으신가요? 내일을 그분께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마치 파도위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무모하게 보이시지는 않던가요?
‘믿음 없음’이라는 헬라어의 의미가, ‘두 가지를 선택하려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항구에 있고 싶고, 믿음도 얻고 싶습니다. 배위에 있고도 싶고 주님 말씀을 믿고 바다위로 뛰어들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한가지를 선택하는 겁니다. 믿음은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 예수, 그는 누구이신가?
그러고보면, 성경에는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보다 더 처절한 위험에 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곱의 아들이었던 ‘요셉’은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사람입니다. 배위에 있던 제자들과 달리, 일말의 소망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끝까지 떨어졌던 인생입니다. 부모의 편애를 받으며 안락한 삶을 살던 그였지만, 그만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들의 손에 의해 결국 생면부지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지요. 팔려간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총애를 받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그는 국사범들이나 갇히게 되는 왕실감옥에 투옥되고 맙니다. 모두에게 버림받고 감옥에 갇혀 왕의 한마디면 언제 죽을지 모를 비참한 삶입니다. 나락으로 떨어져도 이렇게까지 망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절망스러운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극심한 고난와 환란속에서도 그 고난에 삼키워지지 않고 일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밑이 없는 허공을 발버둥치는 것처럼 기댈곳 없는 삶에서 오히려 늠름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했던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마태가 제자들의 걸음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곳에 오기 바로 직전 제자들이 들판에서 체험한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마태’는 그 들판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들리시나요? 이제 눈을 감고, 폭풍을 뚫고 그들을 찾아와 배에 오르셨던 예수님을 향해 제자들이 했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33절
이 고백은 이 일후에, 16장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 사도가 했던 위대한 고백으로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 16:16
이제 마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지시나요? 마태가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기적이나, 이적 사건 자체가 아닙니다. 배고픔, 풍랑, 그리고 오병이어사건으로부터 물에서 건져내진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과연 이분이 누구이신가?’라는 물음에 제자들과 같은 답을 찾아 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파괴의 신인 바다와 흉포한 바람을 무찌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날뛰는 바다 위를 흔들림없이 걸으시고, 그것들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이야 말로 바다를 이기신 하나님이신 겁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하고 계시니,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겁니다.
| 물위로 뛰어드는 베드로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것은, 폭풍을 뚫고 자신들을 찾아오고 계시는 주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 마 14:26
사실, 밤 늦은 새벽 폭풍치는 바다, 그 물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소리치고 말았을 겁니다. 밤에는 실체처럼 공포 그 자체가 되지만, 동이 터오는 순간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유령’입니다. 그러니 ‘유령’이라고 외친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혹은 ‘믿을 수 없다’ 라는 말인 셈입니다. 이것이 ‘이성’의 소리이며, 합리와 경험과 세상의 이야기,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지식이 폭풍앞에 서 있는 제자들을 ‘이제는 죽게 되었다’는 두려움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압도당해 어찌할바를 모르는 이런 상황을 깨트린 목소리가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 마14:28
베드로의 외침입니다. 역시 수제자 답습니다. 달라도 뭐가 다릅니다. 일단 ‘유령’이라 생각되면 누구든 절대로 물 위로 뛰어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이시거든’입니다. 그 말속에는 폭풍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베어있습니다. 그리곤 그는 ‘오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시퍼런 파도에 몸을 던집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이겨내고 싶습니다. 베드로처럼, 믿음의 위대한 역사를 삶에 새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입술의 고백만으로 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라’ 말씀하시면 다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그때부터가 진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한시라도 이 두려움의 자리에서 벗어나고는 싶지만 유령처럼 허망하고 허무한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들,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심드렁하게 그저 ‘오라’고 말씀만 하시는 주님, ‘그래 뛰자’ 결단해 보지만, 어느새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말도 않되는거야’, ‘그런건 다 헛소리라구, 뛰어드는 순간 죽는거야’ 라는 생각이 이전까지의 애써 다잡은 마음을 송두리째 뒤엎습니다. 괴롭습니다. 그저 어찌할바를 모른채 발만 구르다 결국은 흔들리는 배 갑판위에 주져앉고 맙니다.
| 믿음의 도약 (跳躍)
그러나 배 위에 있는 한은, 바다가 원하는 대로 벌벌 떨고만 있어야 합니다. 안전하다 싶은 배 위에서 ‘죽음’은 더 선명하고 가까이만 보입니다. 힘을 다해 물을 퍼내고, 짐을 바다로 집어 던지고, 돛을 거두고, 경험과 지식을 총 동원하며 부산을 떨지만, ‘안전하니 바다로 뛰어들라’ 부르시는 예수님이 없는 배위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삼키려고 달려드는 흉포한 바다,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힘은 ‘배’위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시퍼런 파도앞에 얼어붙어 있던 그때, 베드로는 제 발을 붙들던 갑판을 떨쳐내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마도 곁에 있던 이들이 볼 때 베드로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이시거든’ 에 인생을 걸었던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무력했던 베드로의 믿음이 한단계 ‘도약’하게 되는 때였습니다. 막상 차가운 파도에 발이 닿는 그 짧은 순간에 아마도 그의 이성은 ‘망했다’는 절망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를 삼키려던 바다의 권세도 중력의 힘도 그를 삼킬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힘이, 우리를 두려움의 힘으로부터 구원합니다.
하지만 물위로 뛰어들었던 그가, 어느 순간 다시금 바람소리에 놀라 두려움에 빠져들고 말았었지요? 그러니 이제 다시금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서 기자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의 정체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믿음을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내가 바라는대로 무턱대고 사실인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나, 제 자신의 바라는 것들에 대한 간절함이나, 열정의 수준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처럼, ‘믿음’ 또한 내 열심으로 환원시키려고만 했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이런 미신적인 것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주님이시라면…’ 이 고백은 주님과 나와의 사이에 ‘관계’에 터잡는 겁니다.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정작 위태로운 순간이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유령’은 결코 주님이 아닙니다. 인생을 뒤엎으려 찾아오는 어떠한 바다와 바람이라도 능히 무찌르시고, 빠져드는 물속에서 억센 손으로 건져 올려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을 기꺼이 내어맡겨도 좋은 ‘주님’이신 겁니다.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사건인겁니다.
만일 요셉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들의 시기를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지 않았다면 우물에 내던져지지도 않았을 테고, 우물에 던져지지 않았다면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의 손에 팔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고보니 인생에는 ‘만약’이라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니 실은 우리 삶은 하나님이 하실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이 가득차있는 셈입니다. 다만 지금 볼 수 없었고, 우리가 어찌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지금 ‘만약’이라 돌아보는 그 너머에서 우리의 손을 놓치 않고 굳게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십시오. 어떠한 풍랑속에서도 우리를 건져내시고 마는 그 넉넉한 손이, ‘주님이시거든’이라 주억거리며 주저하는 우리 인생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믿음으로 도약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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