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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3 성령강림후 12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0. 8. 19. 11:00
성서일과
| 1독서 출애굽기 1:8 ~ 2:10 혹은 이사야 51:1 ~ 6
| 2독서 로마서 12:1 ~ 8
| 3독서 마태복음 16:13 ~ 20
| 응 송 시편 124 혹은 138
설교음원
https://drive.google.com/file/d/1Rh9tGF2iJcrL4AitF_DyD5TEeQb2gwFi/view?usp=sharing = '클릭'하시면 설교음원을 청취하실 수 있습니다
설교영상
https://youtu.be/VWYCLTGtjTE = '클릭'하시면 설교영상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 * 주일 예배후,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
'하나님의 일', 그리고 '사람의 일'
/1
질병관리본부, 의료진, 그리고 국민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코로나19의 사태를 버텨내며 지내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이 일순간에 허사가 되어버린 오늘에 망연자실한 우리입니다. 방역당국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복절 이른 아침부터 성조기에 일장기?까지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든 수 많은 군중들 안에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곧장 올해초 대구발 신천지 때와는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로운 확산 조짐이 모두를 긴장하게 하고 있습니다. 허망함 너머 유독 우리에게 속상하고 아픈 상처처럼 그러나 피할 수도 없고 더더욱 외면해서도 않되는 그 책임과 비난의 중심 ‘교회’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만큼 낯설은 오늘 교회는 할말을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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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위기 가운데 서 있습니다. 전도를 할 수 없다거나, 이렇게 가다가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형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된 신앙에 물들어 ‘복음’의 참 맛을 잃어버린 정체성의 위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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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본받지 마라’던 바울의 외침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공적(共的) 신앙을 거부하고 세상을 악으로 몰아세우는 근거로 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랑은 다르다’는 차별이 ‘거룩’으로 포장되고, 자신들의 행동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자기 강화가 ‘믿음’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 기저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정체 모를 사명감도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현기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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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안에 있는 교회이지만 세상과 달라야하고, 세상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세상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이 세대를 본받지 마라’는 말씀은 무엇을 본받지 마라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은 또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앞에 깊은 숨 들이마시고 진중하게 서야만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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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성서일과 1독서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마치고, 출애굽기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애굽의 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져주셨다는 가슴벅찬 구원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짐을 받은 자’ 라는 뜻의 애굽식 이름입니다. 갓 태어난 히브리 아이들 중에 사내아이는 다 죽이라는 애굽왕의 서슬퍼런 명령속에서 그런 애굽왕의 공주의 손에 의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장성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민족의 구원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이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어준 ‘율법’의 터를 닦은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전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 자체가 율법의 가치와 중요성을 드러내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의 대변자이며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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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구출해 내신 것은, 다시는 권세나 힘에 굴복당하는 종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라와 민족 같은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그곳에는 반드시 힘이나 권력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가진자와 갖지 못한 이도 생겨나게 될 겁니다. 제 아무리 평등을 가치로 내세운다고 해도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를 이룬 우리이지만 물질, 권력 수 많은 이유로 차별과 계층이 생겨버린 오늘의 삶이 그것을 대변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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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왜곡과 타락을 막아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전장치가 ‘계명’과 ‘율법’입니다. 계명과 율법은 유일신 신앙, 안식일 규정에서부터 부모공경이나 살인, 도둑질 등등 하나님을 향한 삶과 하나님 백성 상호간의 삶 모두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로 이웃들을 향하고,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장’으로 삼을 것을 규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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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와 ‘하지마라’는 계명의 형식 때문에 삶을 속박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계명이 주어졌으니 이외에 어떤 것도 이 백성을 속박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보호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제 아무리 큰 힘과 권세를 지닌 세상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험을 치루듯 1, 2등을 차별해 내기 위해 계명을 잘 지켜내라 하신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채 율법조문에 매이기 시작했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속박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외형의 옷이 아닌 그것을 입고 있는 사람이 중요하듯 율법 자체가 아닌, 오늘 우리는 율법과 말씀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깨달아 알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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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님의 제자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당연 베드로일 겁니다. 수제자이기도 하거니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을 향한 그의 걸출한 고백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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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마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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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황제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오늘도 주님의 교회는 모두 이 고백위에 세워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곧장 주님께 책망받는 신앙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애당초 성경이 인간의 위대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그를 책망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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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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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또 무엇일까요?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박해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 삼일뒤에 부활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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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당하는 사형틀인 ‘십자가’는 깨어지고 찢기워지고 생명이 파괴되는 고통스러운 상처와 아픔의 자리입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하고 낭만적으로 그려놓아도 십자가는 여전히 잔인한 ‘죽음’의 자리일 뿐 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다하지 않고 이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깨어진 패망의 길을 하나님을 위한 일로 삼으며 걸을 수 있으려면, 이런 삶을 통해서도, 이런 방법을 통해서도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때에마나 유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문을 열어젖히심으로 십자가 죽음에서도 생명을 건져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이 삶속에 개입하시고 일하시는 방식,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며 행하는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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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런데 ‘이렇게 하면 살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식의 성공과 영광의 길을 보여주는 세상의 방식과 달리,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은 너무나 투박하고, 거칠고, 그래서 두렵고, 무섭습니다. 사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영낙없이 죽는 길처럼만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을 의지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한눈을 팔라치면 절대로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만 믿으며 살아가야한다는 말씀을 이해하고 수긍도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멈추고 싶고 그만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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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때! 십자가의 길,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이 어리석어 보이고 따를 수 없어 멈추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고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이 세대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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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와 시대정신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려고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던 당시의 시대정신은 바로 ‘로마’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속국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로마’는 세계를 재패한 천국이고, 로마의 황제는 누구에게나 신처럼 보였을 겁니다. 로마가 제시하고, 로마를 지향하며 사는 것이야 말로 성공을 향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로 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투기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고, 이익을 많이 얻는 것이 시대정신입니다. 교회도 이런 시대정신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크고, 교인수가 많고,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으면 그것이 곧장 영성이 있고, 신앙이 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 되고, 그렇게 옳음이 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이 길을 따르며 살고는 있지만, 행복해진 사람은 없습니다. 성공과 행복을 향한 길은, 모두를 노예로 전락시켜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이런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을 ‘사람의 일’을 좇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자유하게 하고, 속박에서 구원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과 세상의 방식의 선택지를 받아쥐고 갈림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두가지 선택지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는 선택지라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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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앙의 자리, 특히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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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을 드리는 바와 같이 ‘삶’을 드리는 예배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수 있는 ‘영적 예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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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 예배’라는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영적’이라는 단어는 ‘로기코스’입니다. 루터는 독일어 vernünftig (베넌프티휘) 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합리적’, 혹은 ‘이성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우리의 삶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이어야만 하는 겁니다. 지금의 한국교회 현실에서는 대단히 낯선 단어입니다. 우리는 영적이라고 하면, 이성과 합리성을 포기하고 보이는 현상에 스스로를 매몰시키는 것을 떠올리고, 반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공적인 사고의 영역은 ‘영적’이지 못하고, ‘인본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해오곤 했습니다. 세상의 방식, 인간의 일을 따르면서도, 그런 세상을 박해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형국입니다. ‘이성’이야 말로 우리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임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이성’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여겨왔고, 그 결과, 세상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면서도 신앙적 헌신을 운운하는 괴물같은 교회를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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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실 영적인 예배란 삶을 통해 드러날 수 밖에 없듯,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좇고 있는 교회 또한, ‘공적인 신앙’의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우리는 할 수 없어도 이런 한 걸음 한 걸음을 통해서도 생명을 길어 올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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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늘 설교의 출발점은 무엇을 하면,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는 것인지?의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말씀속에서 해답을 찾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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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브라’와 ‘부아’, 볼품없어 보이는 히브리 산파들은 히브리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애굽왕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거스르며 뻔히 죽음이 기다리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했고, 히브리인 어머니 ‘요게벳’은 역청을 바른 갈대 상자에 모세를 담아 물위에 흘려 보내는 것으로,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물에서 건짐을 받았던 모세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볼 때 그보다 더 망할 것이 없는 길인, ‘십자가’위에서, 도망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선택하고 걸어가신 그 길의 끝에서 예수님은 결국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뒤에 그는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해야 산다’라고 말하는 시대 정신을 거스르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만을 믿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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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약점과 결함 투성이인 우리의 선택과 삶이지만 주님을 믿으며 나아가는 그런 삶에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시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은총과 부르심, 그리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손과 은사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결코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거창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일들, 숨겨놓은 자기 욕망에‘교회’라던가,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오늘의 삶이, 주어진 한 걸음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 작은 걸음을 통해서도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만 믿으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의 삶이 그러하며, 그 길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당신만을 믿는 이들의 삶의 구원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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