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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0 성령강림후 13주 (왕국절)성서의 거울 앞에 2020. 8. 28. 17:35
성서일과
1독서 출애굽기 3:1 ~ 15 혹은 예레미야 15:15 ~ 21
응 송 시편 105:1 ~ 6, 23 ~ 26, 45c 혹은 시편 26:1 ~ 8
2독서 로마서 12:9 ~ 21
3독서 마태복음 16:21 ~ 28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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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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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땅에서, 주님을 만나다
1.
오늘 성서일과의 핵심 키워드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참으로 은혜롭게 들리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여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아무일 없을 때, 중요하지 않은 경우라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그닥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우리이지만, 당장 죽고사는 문제라고 여겨지는 순가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움켜쥔 손을 놓지 못한 채, 영낙없이 주저앉고 맙니다. 불안하고, 억울하고, 손해볼 것만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은 멀기만 하고 여전히 불확실해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독서 로마서 12장 말씀의 핵심은 19절부터 21절입니다. 원수갚는 것을 제 손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이해도 되고, 찬성도 됩니다. 하지만 실재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맡겼는데도 불구하고 원수가 형통한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기억들 때문입니다. 원수는 발 뻗고 있는데, 나만 힘이 듭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원수를 갚아주시는 통쾌한 장면은 보이질 않으니 억울하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3독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 극한 믿음의 끝자락까지 몰아세웁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 16:24b
가슴을 뛰게 하는 말씀이지만, 들리는 그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시쳇말로,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일 뿐입니다. 돈과 명예가 생명줄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고 산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풍요와 쾌락의 환상으로 움켜쥐고 있는 ‘물질’과 황제의 ‘영광’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믿고 사는 길로 곧장 나아가라고 하지만, 그렇게 살면 이런 세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겼던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모두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고 싶고, 하나님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분입니다.
2.
극적으로 물에서 건짐을 받고 애굽의 왕실에서 자란 모세가 어느덧 사십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왕위를 물려받고 새로운 세상의 주인, 살아있는 태양신인 ‘바로’가 될 몸입니다. 인생 역전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고 바랬던 모습입니다. 아니라고는 해도 세상이 말하는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꿈꾸던 ‘성공’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크게 세단락으로 구분되는 모세의 인생중에서도 홍해를 가르며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진 후반기 뿐만 아니라, 전반기 왕실에서 보냈던 사십년 생활도 꽤 긍정적으로 대하곤 합니다. 애굽의 왕자로 지내온 사십년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애굽의 정치, 왕도, 체제, 법률, 군사,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준비의 때로 삼아주셨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하나님은 최고 엘리트의 길을 걷고, 권력이나 재력이 있고, 잘 배우고, 준비된 사람만을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심각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때, 기독교신앙을 가진 학생은 학교에서도 일등을 해야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사업가는 최고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축복에 이르기까지 세속적 성공주의에 한국교회가 편승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삶을 정직하게 직면할 수 없게 만들고, 그 결과 연약하고, 깨어진 세상, 신음하는 삶,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은혜안에 올곧게 걸어가는 한 걸음의 곁을 지키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기형적 신앙인을 양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미디안 광야를 헤매이던 모세의 사십년을 눈여겨 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어느날 갑자기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입맛에 달다고 삼키고,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뱉어내거나 간단히 생략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 때 더 바랄 것이 없는 애굽 최고의 촉망받는 인물이던 모세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동족인 히브리인을 폭행하는 애굽인을 쳐죽인 사건때문입니다. 아마도 왕권 다툼의 헤게모니속에서 이 사건이 구실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도 히브리인이었으니, 애굽 토착 세력의 눈에 모세가 믿을만 하거나 곱게 보였을리가 없습니다. 여튼 그는 예상치 못했던 일을 기화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셈입니다. 생면부지의 척박한 땅 미디안, 성공의 길과는 반대로 이어진 그곳으로 도망치면서 ‘모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3.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나거나 사업이 망해서 남부럼지 않던 삶에서 밑바닥의 삶으로 곤두박질하게 되면 정작 지금의 처한 상황이 아니라, 이전의 ‘기억’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렵다고 하더군요. 이를 악물고 잘 극복하며 살다가도 한순간 ‘내가 예전에’라는 생각이 밀려들면, 현재의 상황이 곧장 지옥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내것’을 다 빼겼다고 생각하면 없음이 더 크게 보이고, 불편함이 괴롭고, 삶이 저주처럼 여겨지는 겁니다.
사람이 ‘죽음’처럼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을 직면하게 되면 보통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렇게 다섯 단계의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모세도 그랬을 겁니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더욱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한순간 그의 눈에는 혈기와 분노가 가득 차올랐을 겁니다. 그러다 곧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스스로와 타협합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일년, 이년, 덧없이 반복되는 시간속에서 아무리 기다리고, 또 몸부림쳐보아도 변할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 뒤에는 극심한 실망감과 우울에 빠져들었겠지요. 장인 이드로의 양이나 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한 없이 처량하고 죽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시간이 사십년 동안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셈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한가롭게 양이나 치고 있는 목가적인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그는 하루도 양을 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매일 자신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분노, 억울함, 안타까움, 그리고 아쉬움과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지난 사십년간 양을 치면서 이 광야 어디에도 모세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면 양떼를 먹일 풀이 있고, 어디를 가면 생수를 얻을 수 있는지를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었던 그에게, 호렙은 낯설은 곳일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게 되었던 불타는 떨기나무 역시 그닥 신기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메마른 광야에서는 작렬하는 태양빛이 바짝 마른 덤불 같은 것을 자연발화하게 하여 불이 붙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불이 붙은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유독 그 날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를 지나치지 않고 시선을 고정했다는 겁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하나님의 사자가 떨기나무에서 불꽃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찾아내셨고, 불러내신 사건이라고 전합니다.
늘상 보아왔던 이 곳, 얼마전에도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며 통곡하며 지났던 이곳에서 일어난 놀랍고 기이한 일에 모세는 압도당했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떨기나무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지난 사십년 동안 자신이 고독속에 괴로워할 때마다 침묵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출3:5
4.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왜?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요?
히브리인들에게 ‘신발’은 소유나 권리를 나타내는 수단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신발’은 에덴에서 쫓기워진 인간이 저주받은 거칠은 땅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첫번째 경계이기도 합니다. 제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인간, 제 인생의 주인임을 상징하는 것이 신발인 겁니다. 그래서 ‘신발’을 신었다는 것은 나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내 앞에서 너는 자유인이 아니다’ 혹은 ‘내 앞에서 너는 어떠한 소유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애당초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었으니 너는 빈손위에 주어진 은혜로만 사는 존재일 뿐이라는 말씀인 겁니다.
지난 사십년간, 모세를 괴롭힌 것은 애굽에서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눈을 떠도 다 ‘내것’이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것일 수 없으니 괴로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내것이 아니었다는 것, 나 자신 마져도 소유된 존재일 뿐임을 깨닫는 것 뿐입니다. 본래가 내것이 아니었는데 아까울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평생을 내것 아닌 것을 붙들고 후회, 아쉬움 그리고 원망과 불평의 독을 뿜어내며 살아갈 만큼,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견고한 자기 자아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깨트리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이 들고 불행합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사십년간 채워져온 자아를 깨트리기 위해 모세가 광야에서 뒹굴어야만 했던 시간이 무려 사십년이었다는 것이 가볍게 보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아마도 사십년을 몸부림치던 모세에게 그날 ‘네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장엄한 명령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초대의 음성처럼 들렸을 것 같습니다. 모세는 드디어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대변하듯 찢기고 터진 신을 벗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모세가 걸어가야할 또 다른 사십년이 남아있습니다. ‘내것’을 붙들려고만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해져야만 광야를 벗어나 하나님 손에 들리워진 구원의 막대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애굽의 심장, 바로의 앞으로 보내시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주님 명령에 뒷걸음질 칩니다. 십자가를 지시면 않된다고 자아를 드러내던 베드로의 모습이 겹칩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 4:12
두렵습니다. 함께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자인 것만 같으니 그렇습니다. 모세도 주저앉고, 베드로도 넘어졌으며, 주님을 믿고는 있지만 우리도 오늘 여기에서 한걸음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는 ‘광야’,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מִדְבָּר)입니다. 뜻은 사막, 버려진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미드바르에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어근인 ‘다바르’의 뜻 자체가 ‘명령’, ‘말씀’, ‘언약’입니다. 그리고 같은 어근에서 드비르’ (דביר) ‘지성소’ 라는 단어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광야’는 말그대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거룩한 임재가 머무는 지성소가 되는 겁니다. ‘광야’가 지성소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결국은 자기 자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고독속에서 견고한 자아를 부인하고 깨트림으로 삶을 바꾸고, 마침내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이어야 함을 뜻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애굽의 바로나 로마 황제의 궁궐이 아닌, 패배하고 실패한 이들의 상처만 나뒹구는 버려진 땅인 광야를 거룩한 지성소로 삼으시는 분이시라고 믿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인 안목이 놀랍기만 합니다. 패배와 허무만 보이는 삶, 그런 척박한 땅을 하나님은 기꺼이 당신의 거룩한 임재의 땅으로 삼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자신도 인정할 수 없고, 세상이 쓸모 없다고 버린 인생일지라도, 말씀과 언약을 품고 있는 지금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버려진 땅 ‘광야’,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겁니다.
‘십자가’라고 하면 순교나 박해를 생각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외면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말씀을 다시 한번 주의깊게 읽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이 지셨던 갈보리의 십자가를 똑같이 짊어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제 몫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정체성은 제 손으로 일구어내는 풍요와 쾌락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율법주의의 ‘자기의’와 돈이나 명예, 성공을 자랑하는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런 세상을 손에 잡지 못해 억울해 하지 않고, 버려지고 깨어진 듯 보이는 삶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소임을 믿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오직 예수님 한분을 주님으로 믿으며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비록 번드르한 애굽이나 로마에 비하면 형편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기꺼이 우리의 오늘을 거룩하신 당신의 지성소로 삼으셨습니다. 거짓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특하고 부정한 마음, 황제의 세상앞에 주눅들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마음을 모두 태우시되,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약속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삶이 불만족스럽고, 억울하고, 화가 날때,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것이 두려울 때, 지금 발딛고 서 있는 땅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척박한 광야, 고독만이 뒹구는 버려진 땅처럼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신을 벗으십시오. 바로 그곳에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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