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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0 성령강림후 20주성서의 거울 앞에 2021. 10. 6. 10:56
성서일과
- 1독서 | (계속) 욥기 23:1-9, 16-17 혹은 (선택) 아모스 5:6~7, 10 ~ 15
- 응송 | 시편 22:1-15
- 2독서 | 히브리서 4:12-16
- 3독서 | 마가복음 10:17-31
설교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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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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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부자’, 가능합니까?
1
오늘 각각의 성서일과 연중독서들을 이어주는 핵심은 ‘멀고 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서일과 본문에 모두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부자’를 대면하게 된다는 것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일어납니다. 태풍이나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위험을 알고 요란을 떠는 새들처럼, 성경이 부자에 대한, 혹은 부자가 되고 싶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단박에 전복시킬 것임으로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에 이르러서 ‘부’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종교를 이루었을 만큼 기세가 등등합니다. 강대국이나 약소국이나 모두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어느새 마치 ‘세계에서 제일 큰’이라고 하는 타이틀이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인정하신 증거로 통용되고 있고, 그런 교회의 목사는 신의 대리자처럼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결코 ‘부유함’ 자체를 권장하거나 신앙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1독서 욥기는 그의 ‘부유함’이 삶을 더 비참하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은 비할 바 없을 만큼의 거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무죄한 그에게 찾아온 낯설은 환란의 때에 그의 부유함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속절없이 깨어진 상실감이 자신이 처한 비참함의 깊이를 더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겨울의 매서움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부’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고 맙니다.
2
한 청년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길을 나서는 주님을 놓칠새라 매우 급히 찾아온 걸음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대단한 명망을 이루었고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려는 거룩함이 삶에 베어있을 만큼 반듯해 보였습니다.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주님이 보시기에도 흡족했습니다. 으레 아쉬울 것 없는 부자들이란, 복음에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법인데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가 ‘영생’에 대한 갈급함을 안고 주님을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삶에 대해 얼마나 진중하고 진실된지를 알기에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라면 하나님 백성의 마땅한 의무이며, 하나님을 위한 최선이라 믿고 있던 율법과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 (20)는 그의 당차고 자신감 있는 고백이 허투루 하는 빈말처럼 들리지도 않습니다. 제자로 삼기에 이만큼 신실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짙게 베어있습니다. 애당초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복되게 살라고 우리 자신을 위해 주신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지켜드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바른 행동을 하고 우리 보기에 옳게 보인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를 들여다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의 열정은 방향이 어긋나 있던 겁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마가복음 10:21b
율법을 잘 지켜왔다는 확신에 차 있던 그의 시선을 주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이 말씀은 ‘하나만 더하면 더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그가 최선으로 삼으며 달려온 모든 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한가지가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는 평가인 겁니다. 대체 무엇이 부족했길래,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의 걸음이 무의미하다고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안에서 여전히 주님은 그를 제자 삼고 싶어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람을 만드는데있어서 주님은 언제나 너무 성급하십니다. 적당히 칭찬해주시고 천천히 가르쳐가셨으면 충분했을 텐데, 당신의 기준까지 이를 것을 요구하셨고 결국 그는 쓸쓸히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인재를 하나 잃고 만 셈입니다. 그러나 답답해 보이기는 해도, 내편을 만들겠다고 하는 얄팍한 마음에 휘둘리지않고 영생을 향한 그의 시선과 삶을 바르게 고쳐주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주님의 마음이 참 따듯해 보입니다.
3
주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아온 재산을 모두 팔고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움켜쥔 그 손을 놓으라는 겁니다. 그 동안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붙잡고 있던,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라고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라는 도전인 셈입니다. 오늘은 오늘 몫만 있으면 그 만임에도, 스스로의 내일을 지켜내야 한다는 불안에 제 손을 움켜쥐고 재물을 쌓아둔 사람을 ‘부자’라고들 합니다. 그러고보니 부자 청년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나, 어릴 때부터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다는 그의 자신감에는 온통 ‘내가 해왔고, 내가 해냈다’고 하는 자기 구원과 자기의가 고스란히 베어있습니다. 애당초 처음 주님께 말씀을 건내던 때도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마가복음 10:17b
영생을 얻고 싶어 찾아온 그였습니다. 여기에서 ‘얻다’라고 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ὲω)는 ‘상속받다’(inherit), ‘소유로 받다’(receive as a possession)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 ‘영생’을 ‘상속’으로 얻고 싶었다는 말인데, 무언가 이상합니다. 애당초 ‘상속’이란 무엇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속’은 오직 ‘누구냐’는 이유로만 받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데에는 그가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켜왔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제 손으로 이루었고 붙들고 있는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손에 들려 있는 것들을 버리지 못해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을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재산이냐가 아니라, 제 손으로 움켜쥔 것은 놓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에 갈급했지만, 그에게는 움켜쥔 제 손을 모두 펴고, 주님의 손을 붙들고 함께 떠날 용기가 없었습니다.
4
부자청년이 떠나가고 난 이후 25절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주님 말씀에, 제자들이 곧장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맞받아 칩니다. '그런 식이라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푸념입니다.
그런데 분명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부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들 자신도 구원받지 못할 것을 염려하고 있으니 재밌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팽개쳐두고 주님을 따른 길이었으니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들 면면이라야 솔까말 거지꼴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자가 되고 싶은 지향과 ‘언젠가는’이라는 부러움이 그들의 마음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겁니다. 사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지워낼 수가 없고 천국도 돈으로 환산해야 마음에 와닿으니 우리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에도 ‘부’를 ‘축복’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목하는 ‘복’은 부유함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있을 뿐입니다. 부유함 자체는 악도 선도 아니지만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축복이 아닌, 저주나 불행이 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율법’이나 ‘부유함’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은 다 선한 것임에도 움켜쥐려는 인간의 손에만 들어가면 악한 것을 쏟아놓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이 주신 삶의 존엄을 지켜갈 수 있도록, 부족한 곳에 하나님의 손이 되어 흘려보내고 나눌 수 있는 복된 존재가 되도록 주셨던 ‘부유함’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곤 합니다. 권력이 고여있는 곳에는 타락이 있는 것처럼, 부유함이 고여있는 곳은 부패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5
1독서 구약 본문 아모스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최초의 문헌 선지자인 아모스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부자들’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권력으로 행세했고 힘없는 자들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던 정의도 공의도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부유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노예처럼 짓눌렸고, 부자들에 의해 재판도 기울어졌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끊임없이 부자의 이권에 착취를 당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불사르시겠다던 죄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던 부유함이 부자들 자신의 영혼을 맑고 거룩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도리어 그 주변에 착취와 억압과 소외와 배제된 이들만 양산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했음에도 돈과 재물이 가지고 있는 마성은 여전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착한 부자’를 만나고 싶다는 아득한 불가능에 대한 기대를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을 마주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부자청년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라는 것도 문제이지만, 판 것을 자신이 아니라 일면식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라는 주님의 요구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도전일 뿐입니다.
두번째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뜻 그대로 읽는다면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불가능’할 뿐입니다. 그것이 얼마라도 움켜쥔 손을 펴지 못한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니 그렇습니다. 첫번째 요청에도 닿을 수 없는 우리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얼마나 단호하고 엄한지 태산처럼 무겁게 짓눌러 옵니다.
애당초 하나님 나라는 대가를 치르거나 사는 것이 아닌, 오로지 상속으로만 얻을 수 있는 나라이니, 무능한 우리로서는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몸부림쳐봐야 닿을 수 없는 희망고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닿는 유일한 길은 오직 은총에 기대는 길 뿐입니다. 우리 측에서는 이미 불가능하니,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주시는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성안에 잇대어 있고, 주님과 교제를 맛보고 은총을 경험한 사람이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불가능이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리고의 삭개오에게서 이미 입증되었습니다.(눅 19:8)
6
부자청년과 주님이 대면하셨던 첫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주님은 선하신 선생님’이시라는 부자청년의 호칭에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다’고 부정하셨습니다. 또 다시 주님의 반응이 당혹스럽습니다. 명망있는 이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니 드러내고 으쓱거리지는 않더라도, 빈 웃음이라도 지어주면 그만일 것을 주님의 단호한 답변은 그를 머쓱하게 만들고 맙니다. 주님은 왜 스스로를 드러내시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우러름을 받고 명성을 얻게 되는 식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주님 자신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한 사랑안에 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라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들으시는 것은 말씀이었으며, 그의 평안은 오직 하나님과의 사랑안에만 있습니다.
비로소 우리는 ‘영생’ 즉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던 부자청년의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정작 하나님 백성으로 초대를 받았던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칼날위를 서는 것처럼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이처럼 무거운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편에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은 없습니다. 한호흡의 생명도 돈으로 살 수 없음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진 무엇으로도, 혹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보좌는 두려움과 공포와 위엄의 대상이 아닌, 한없는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그로 인해 멀게만 존재하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는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히브리서 4:14) 이제 하나님의 부재로 절망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빛을 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은 할 수 없는’ 이것을 ‘하나님만은 하실 수 있다’ (마가복음 10:27b)는 복음을 계속해서 경험해가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관계에 집중하며 살아갈 때만 경험하는 나라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고난, 아픔, 상처, 질병, 소외에 내몰려있어도 손을 잡아주거나,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로움 가운데 방치되고 외로움 가운데 버려진 홀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연대가 끊어진 삶이야 말로 이 시대에 가장 치명적인 ‘가난’입니다. 지난 주 두번째 창조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본래 ‘홀로’있으면 않될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홀로’있도록 버려두어서는 않된다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임을 배웠습니다.
움켜쥐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제 손을 펴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부자이고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가난(홀로)하게 방치하고 고립시키는 세상에서 자신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부재의 현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삶이 하나님 임재의 빛에 닿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그런 부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이어져, 세상을 부요케 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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